앤드루 H.밀러의 책 '우연한 생'에서 제인 오스틴의 '설득'을 알게되어 찾아 읽었다. 오스틴 특유의 '관계 들여다보기'는 이번에도 유쾌했고 느긋하게 우려낸 차를 마시듯 갈등상황을 거쳐 얻어지는 평온을 맛보는 즐거움도 만족스러웠다. 주인공 앤은 월터 엘리엇 경의 둘째 딸로 가장 총명하지만 가족과 친밀하진 않다. 아버지 월터는 책이라고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준남작 명부만을 즐겨보는 속물적인 귀족인데다 잘난 자신의 외모에 자부심이 강한만큼 남들의 외모에 날카로웃 잣대를 들이대길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죽고 난 뒤로는 외모나 성격이 자신을 쏙 빼닮은 첫째 딸 엘리자베스와만 절친처럼 지내며 나머지 딸에게는 애정도 관심도 없다. 맏이인 엘리자베스 역시 귀족적 허영의식에 사로잡혀 씀씀이가 커, 가세는 점점 기울어갔고 결국 큰 집을 세놓고 모두 이사해야 하는 형편이 된다.
앤은 아버지와 큰언니를 우선 이사보내고 당분간 살던 곳 근처의 먼저 결혼한 동생의 집에서 기거한다. 아버지만큼이나 자기밖에 모르는 막내가 몸이 아프다며 언니를 필요로 한 것. 그녀는 시댁과 바로 이웃해 거주했는데 그 가족들은 다행히 앤에게도 다정하게 대해준다. 앤에게도 과거에 결혼할 기회가 있었다. 프레더릭 웬트워스라는 해군 대령과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였고 그들은 결혼까지 약속했었다. 하지만 돌아가신 엄마의 친구이자 앤을 누구보다 아끼고 귀하게 여겨주었던 레이디 러셀과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와 설득으로 앤은 파혼을 해야만했다. 그가 신분이 낮고 재산이 많지 않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앤은 웬트워스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레이디 러셀을 거역할 수 없었고 그와 헤어진 뒤 쭉 후회속에 살아왔다. 그녀는 조건 좋은 새로운 사람이 청혼해도 거절했다. 만일 그 때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더라면 여러 상황의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행복했을 거라고 앤은 확신한다. 그런만큼 그를 잊지못하고 다른 누구에게도 웬트워스에게 했던 것만큼 마음을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젊고 자신만만한데다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던 웬트워스는 앤의 배신에 고통스러워했지만 전장에 나가 여러차례 공을 세우고 부유해져서 고향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그는 하필이면 앤 동생의 시댁식구들과 가까워진다. 그 댁에는 결혼적령기인 딸 둘이 있었는데 가족 모두가 성격좋고 능력있는 웬트워스에게 반한 것이다. 그들은 앤과 웬트워스 두 사람의 과거를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모두 함께 자주 어울렸는데 웬트워스와 앤은 서로 간단하게 할 말만 할 뿐 데면데면하게 지낸다. 웬트워스는 앤 동생의 시누이들중 한명을 아내로 삼을 듯한 분위기. 앤은 8년간의 긴 시간동안 그를 그리워했고 지금도 그 앞에 서면 얼굴이 붉게 물들고 할말을 잃지만 웬트워스의 마음이 어떤지는 이제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여전히 젊고 더 근사한 모습과 조건으로 돌아와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는 웬트워스와 후회와 슬픔때문인지 더 초라해진 앤은 어찌될지 궁금한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길.
웬트워스 대령과 자신만큼 그렇게 상대방을 향해 마음이 열리고, 그렇게 취향이 유사하며, 그렇게 감정이 일치하고, 그렇게 표정이 사랑스러운 짝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남보다도 못했다. 서로 가까워지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한 사이였으니까. 영속적으로 소원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으니까.- P97
사람들은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그럴때 스스로 결정하거나 타인의 도움을 받아 다른 선택을 하기도한다. 어떤 길로 가든, 가지 않은 길은 후회와 부질없는 그리움 같은 느낌으로 씁쓸함을 남긴다. 이 길이 아닌 저 길로 갔더라도 그런 씁쓸함은 따라왔을 것이다. 누구나 가지 않을 길에 대한 미련과 거기 담긴 가능성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남이 아닌 내가 한 결정이었을때 후회와 원망이 덜 하지 않을까. 내 의지로 하는 것,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특별하고 의미있는 삶이니까.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방식으로 행복해지기보다는 차라리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참해지기를원한다." 해즐릿의 이 말은 프로이트를 연상시킨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행복이 아니다. "습관과 선호로인해 자신의 일부이고 수천 개의 회상, 결핍, 고통을 통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된 자신의 취향과 역량에 꼭 맞는 행복을 원한다." - P80
과거는 때로는 색과 모양이 제각각으로 비치는 어지러운만화경으로, 때로는 흑백사진으로, 때로는 냄새로, 때로는 피부를 따라 흐르다 마음을 옥죄는, 어디서 밀려왔는지 모를 감정의파도로, 때로는 얼굴에 번지는 작은 미소로 다가온다. 역광을 받은 텅 빈 도로처럼 아주 선명하게 다가오는 경우는 드물다. 이것이 신이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을 등장시킨 덕에 당신은자신이 살아온 삶에 비현실적인 확신을 갖고, 당신이 살지 않은삶에 그보다 더 비현실적인 확신을 가질 수 있다. - P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