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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ㅣ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평점 :
일본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개항을 하고 외국과 문물을 교환했다. 그런 와중에 천주교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하게되고 많은 신자들을 모으게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집권초기에 천주교 보호정책을 쓰다가 이후 사교로 판정하고 금지한다. 과도한 세금 징수로 가난과 굶주림을 벗어날 수 없었던 농민들은 신앙을 갖게 되면서 마음의 위안을 찾게되고 불의한 현실에 차츰 눈뜨게 된 것일까. 정치적 위기로 느낀 정부는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하며 급기야 살해하기에 이른다. 핍박이 한창이던 1632년경 포르투칼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가르페와 로드리고 신부는 자신들의 스승이었던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고문을 받고 배교(신앙을 저버리는 행위)한 사실을 전해듣는다. 심지어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둘은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스승을 찾아 일본으로 향한다.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려던 일행은 일본에서 포루투칼 선교인들의 입국을 금지시켰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밀항을 위해 일본인을 찾게되고 고향땅을 밟고자하는 남루한 차림의 기치지로라는 사람을 만난다. 기치지로는 교활하고 비굴한 눈빛과 행동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지만 일본에 도착한 두 신부는 그에 의해 도모기 마을 사람들과 접촉한다. 알고보니 이 마을 주민 모두가 비밀리에 천주교를 믿고 있었고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정부의 박해와 감시가 삼엄해 신부들은 낮에 숨어지내며 밤이면 교대로 그들을 찾는 신도들에게 세례를 해주고 고해를 받고 축복을 해주었다. 그러다 소문을 듣고 이웃마을에서도 신도들이 찾아오고 결국은 두 신부 모두 관리들에게 붙잡히게 된다.
로드리고 신부는 이 모든 과정을 기록이 가능한 순간까지 글로 남긴다. 포르투칼에 있는 교회에 보고형식으로 편지에 쓴것이다. 믿음을 갖게 된 어린시절부터 로드리고 신부가 마음속으로 그려오던 예수님의 형상은 일본에서의 여정내내 그를 따라 다닌다. 로드리고 신부가 경험한 일본에서의 고난의 과정은 아마 배교한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여정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또한 예수가 유다에게 배신당하듯 로드리고 신부는 기치지로에게 배신당한다. 그리고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를 상징하는 듯한 관리 이노우에는 농민들을 고문하고 죽이며 로드리고 신부에게는 십자가 대신 농민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하라고 종용한다. 참수된 신자들을 삼킨 어둡게 침묵하는 바다처럼 신은 이들의 고통에 침묵한다. 예수의 길을 따라 걷고자 했던 로드리고 신부는 마음깊이 미워할 수 밖에 없던 배신자 기치지로의 억울해하는 항변에 고뇌하고 흔들린다. 결국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될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읽어보시길.
이 소설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막바지에 이르던 시기의 실제 사건을 일본인 작가 엔도 슈사쿠가 각색하여 만들었다. 신부들의 숨막히는 도피과정, 신도들의 처절한 죽음에 침묵하는 신을 향한 고통스러운 로드리고의 신부의 질문을 따라가며 신앙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나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까? 위해를 가하려 하는 자 앞에서 신념을 굽히지 않을 자신이 있나? 엔도 슈사쿠는 고상한 이미지가 아닌 현실적이며 추하고 비열한 상황을 제시해 대답하기 힘든 질문을 집요하게 던진다. 누구나 유다를 비난할 수 있지만 모두가 예수처럼 죽음을 감수할 수 있는건 아니다. 그렇다면 평화로운 상황에서의 믿음이란 과연 온전한 것인가? 진실한 믿음이란 무엇일까?
그리스도는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것이나 선한 것을 위해 죽는 일은 쉽지만, 비참한 것이나 부패한 것들을 위해 죽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저는 그날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 P60
저는 오랫동안 성인전(聖人傳)에 쓰인 그런 순교를, 이를테면 그 사람들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돌아갈 때 공중에는 영광의 빛이 가득하고 천사가 나팔을 부는 그런 빛나고 화려한 순교를 지나치게 꿈꿔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있는 일본 신도의 순교는 그와같은 혁혁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고 이렇게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아아, 바다에는 비가 쉴 새 없이 계속 내립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들을 죽인 다음 더욱 무서우리만치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 P93
달이 차츰 둥그런 보름달이 되어 갔다. 옥사 뒤에 있는 잡목림에서 산비둘기와 올빼미가 서로 어울려 매일 밤 같은 소리로 울었다. 그 잡목림 위에 걸린 보름달이 기분 나쁠 정도로 붉은색을 띠고 검은 구름 사이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숨바꼭질을 했다. - P213
인간이 성경 속에 쓰인 신비를 모두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신부는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냥 모두 다 완전히 알고싶었을 뿐이다. "오늘 밤 너는 반드시 배교할 것이다"라고 통역은 자신 있게 말했다. 마치 베드로를 향해 그분이 말한 것처럼, "오늘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새벽은 아직 멀고닭이 울 시각은 아니다. - P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