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p.9
정보라의 '저주토끼'가 올해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다고 해서 바로 구입해 읽었다. 수상작은 5월 26일 발표된다고 한다. 이 책에는 10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데 대체로 무섭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우선 표제작인 '저주토끼'는 한 집안에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가업인 '저주용품 만들기'의 결과물 중 하나다. 할아버지가 사적인 목적으로 저주용품을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친구의 복수를 위해 만든 '저주토끼'는 전등에 붙은 장식인데 토끼등을 만지는 사람은 저주에 걸린다. 독특한 주제와 실제로 일어날 법한 잔인한 인간의 모습이 어우러져 공포감을 상승시킨다. 무시무시한 저주의 결과는 과연 어떤 것일까? 두 번째 이야기인 '머리'는 내가 사용한 변기에서 하나의 작은 형체가(사람의 머리 모양과 비슷한) 나와 나에게 말을 거는 황당한 상황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모습이 완성되면 조용히 이곳을 떠나 자기 삶을 살겠다고 말하며 자꾸만 나를 귀찮게 한다. 그 모습이 꺼림직한 나는 '머리'가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밀어넣고 변기물을 내린다.
어제 잠들기전 3편 정도를 먼저 읽었는데 무서워서 한동안 바로 잠들수가 없을 정도였다. 전반적인 느낌은 타자에 대한 무지와 그로인한 간극, 공포다. 사르트르는 '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잊지못할 명언을 남겼는데 이 책에서 풍기는 느낌과도 잘 어울리는 말인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사람은 타인이다. 그리고 나 또한 상대에게는 타인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단절과 연결을 반복하며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고뇌한다. 상대는 선의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때로 악의로 내게 접근하기도 하지만 매사가 이분법적으로 분명하게 나뒤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 악의와 선의를 모두 지니고 있기도 하다.
가는다란 목소리는 여전히 가느다랗게 킥킥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조금 걱정해 주는 척한다고 , 그 목소리가 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아무 데나 따라오고..."뒤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킥킥 웃으면서 여전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p.79
프랑스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인 디디에 에리봉이 자신의 고향인 '랭스로 돌아가다'라는 제목으로 완성한 이 책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이고 분석이다. 게이로써의 정체성을 비롯한 문제들로 인해 아버지와 단절된 채 살아왔던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어머니를 만나러 고향을 찾는다. 그는 자신이 성 정체성에 관한 문제 보다노동자 출신의 삶을 살아온 부모와의 관계를 더 외면하고 숨겨왔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부모와는 다르게 지식인으로 성장한 그는 아버지와 형의 모습을 반면교사삼아 주어진 계급을 벗어나고자 노력했다. 그가 성장해온 시대와 정치상황은 자신의 삶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럽고 모순 투성이었다. 그의 부모는 노동자 출신으로 좌파를 지지했으나 점차 우파로 돌아섰다. 그들은 구조적인 문제를 직감적으로는 간파했으나 본질적인 성찰이 없었기에 개인의 탓으로 돌리며 순응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들의 거주지인 임대아파트를 중심으로 이민자들이 늘어나자 아버지는 가감없이 혐오를 드러냈고 그런 인종주의적 발언과 낙인은 이성애자가 아닌 아들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남겼다.
그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고, 나는 그녀가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그녀는 내가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할까 봐ㅡ그녀가 참지 못하고 폭로를 할까 봐ㅡ 겁을 냈고, 그녀는 암시적인 농담들로 내 두려움을 가지고 놀았다. 나는 그 농담들을 이해한 사람이 나뿐이길 바랐다. p.239
마침 나란히 읽게 된 두 책이 모두 타자와의 심연을 다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심연은 때로 공포스럽고 두려운 것으로 타인을 지옥처럼 느끼게도 하고 집단적일 경우 푸코가 말한 것처럼 '소리 없는 지배'로써 나의 자유를 억압하는 감옥과 폭력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디디에 에리봉을 통해 개인에게 그 심연의 시작은 부모와의 관계에서 시작한다는 다분히 프로이트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부모는 우리가 맞딱뜨리는 첫번째 타자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타자와의 관계를 처음으로 학습한다. 가장 먼저 만나는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그런 그들로부터 물려받은 계급적 성향은 탯줄을 끊어내듯 쉽게 분리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과 성장기를 통해 내면적으로 잠재되어 내 안에서 쭉 나와 같이 살아오고 있다. 그런 과거와의 통합속에서 계속해서 나를 발명해나가며 우리는 재표명되고 재창조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성'에서처럼, 이러한 판결을 내린 법정을 찾으려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본부를 두고 있지 않으며, 존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판결이 이미 내려진 세계에 도착한다. 생의 어떤 순간 우리는 공적으로 기소당한 사람들의 자리에 놓여, 비난의 손가락질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 p.250

휘봉씨~♡
휘봉씨에 대해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3492598
내겐 여전히 계급적 판결과 성적 판결의 인장이 남아 있다. 하지만 내 삶의 어떤 순간에 그것들은 서로 충돌하기에 이르렀고, 나는 하나를 다른 하나에 맞세우면서 나 자신을 스스로 발명해야 했다.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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