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의문을 갖게 되었던 많은 부분에 대답을 해 주었다. 161페이지로 얇은 책이지만 신기할 정도로 알찬 내용을 품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책을 읽고 소개글에 나온 권김현영의 말에 저절로 공감하게 됐다. '페미니즘에 대한 얄팍한 인상비평에 기대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과 싸우는 데 지친 사람들 모두에게 이 책을 권한다.'
이곳저곳에 북마크를 잔뜩 붙일만큼 핵심 어젠다로 가득하다. 일단 서문에서 페미니즘이란 무언지 잘 정리하고 있고 이어지는 7개로 나뉜 장에서 1.지배구조 2.권리 3.노동 4.여성성 5.성 6.문화 7.경계와 미래라는 주제로 페미니즘의 역사와 그 과정에서 첨예한 갈등을 빚어온 논쟁들을 다루었다. 리뷰에서 다 다룰 수 없으므로 한두가지만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나중에 공유하기 위한 짧은 추가 글을 올려볼 예정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같은 일부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이제까지 남성지배에 저항할 수 없었던 이유는 "생물학의 손아귀에서 끊임없이 놀아나기" 때문이라며콕 집어 말했다. 하지만 파이어스톤이 그 글을 쓴 1970년은 과학과 기술이 발달해 그러한 환경이 바뀌던 때였다. 이에 파이어스톤은 미래에 인공 생식이 발달하면 여성이 생물학적 부담을 완전히 벗을 수 있다고 봤다. 많은 페미니스트가 파이어스톤의 주장을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자기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여성에게 돌려주자" 라는 요구에는 대부분 동의했다. 남성이나 남성지배적 제도(국가, 교회, 의료계 등)가 아니라, 여성 스스로 출산 여부와 출산 시기를 결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여성해방이 도래한다.- P36
아직 파이어스톤의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녀가 주장하는 바는 익히 접해왔다. 다소 과격하고 전복적이지만, 그래서 당시에도 페미니스트들이 모두 그녀에게 동조하지 않았지만. 근본적 문제제기에는 상당수가 동의했고 지금도 그럴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책이 아직까지 읽히는 것이겠지. 여성은 특히나 남성에 비해 자신의 몸에 관한 권한이 없다. 불과 몇년전만해도 나는 분명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몸은 당연히 내것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전쟁중인 중동지역이나 아프리카.그리고 러시아와 전쟁중인 우크라이나까지 여성들은 전시강간을 당하고 있고 그녀들의 생물학적 조건이 남성이라면 -물론 남아에 대한 성적착취를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이렇게 성적으로 유린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단 전쟁 상황 뿐 아니라 종교,문화적 이유로 여성의 임신중단을 허용하지 않는 국가들도 여전히 많다. 그 외에도 대리모를 비롯해 히잡이나 부르카 착용 심지어는 여성할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신체의 자유에 관한 많은 논쟁들이 있고 당사자는 물론 이 문제를 바라보는 페미니즘 안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일관성 없이 여러 주장이 혼재한 모습은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의 실마리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인 데버라 캐머런은 제 1세대, 2세대 그리고 이후의 물결에서 페미니즘이 그래왔듯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후 한 시대를 바라보면 비교적 일관성 있게 보일것이라 말한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나는 페미니즘 내부에 이러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게 더 건강하고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런 만개한 주장들 속에서 핵심적인 문제에 상당수가 동의하면 인식변화가 선행된 뒤 에너지가 집중되어 구조적인 변화가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여성들만으로는 부족하다. 남성들의 연대가 필수적이다. 페미니즘은 결코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선 남성들 또한 자유로워져야 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잘 몰라서 무턱대고 반대하거나 심한경우 혐오하고 비난하는 부류도 있지만 잘 모름에도 묵묵히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고 조금 이해했지만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며 분명한 이해로 넘어간 부류도 있다. 여성인 나도 많은 문제에 무지했는데 남성들은 오죽할까. 영상에 나온 최재천교수는 호주제 폐지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진화생물학자로써 자신의 지식을 동원해 헌법재소에 힘을보탰다. 그리고 호주제는 폐지되었고 이후 그는 '여성운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주 120시간 노동이란 말도 안되는 주장에는 노동자에 대한 기본적인 착취의식과 함께 그 노동을 뒷받침하는 여성들의 무급노동을 전재하는 이중적인 착취, '악의'가 담겨있다. 신자유주의의 포식과 횡포에는 더 많은 연대와 공감이 절실하다.
효과적으로 저항하려면 다양한 지지층과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폭넓은 연합이 필요하다. P.150
그의 눈이 눈물에 젖었다. "그게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입니다. " 그가 잠시 뒤 말했다." 제가 그 산에서 본 것, 그들이 제 약혼녀에게 저지른 짓은 제 마음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더는 제가 죽든 살든 상관없었죠. 처음에는 그들과 싸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최고의 복수는 유럽으로 가서 살아남은 소녀들을 돕고 세상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중략)독일에서 난민 신청이 승인되자 그는 야지디 활동가의 페이스북 그룹을 운영하며 다른 여성들을 구하려 애쓰고 있었다. P.43
페미니즘은 수십년간 거센 비난과 협박, 부정에도 살아남았다. 살아남는 것은 힘이 있다. 이 변화는 더디지만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