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꽃들의 시선은 힘없는 눈꺼풀 아래에서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했다. p.18
최근에 민음사에서 번역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1권을 아껴가며 읽고 있다. 총 13권으로 완간을 예정하고 있다는데 이런 속도라면 나머지 12권, 13권이 언제 다 번역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번역자에게 부담을 지우려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비교해 본 바로는 '잃.시.찾'의 민음사 번역이 가장 마음에 든다. 기다렸던 탓에 마음이 동요해서인지 또다시 곳곳에서 감탄하며 즐겁게 음미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게 된 생각은 만일 지구상에 모든 책이 사라지게 될 것이고 한 사람당 하나의 작품(한권또는 한 시리즈)만 간직할 수 있다면 나는 고민없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간직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괴로움이 드넓은 지평선 위를 더욱 자유롭게 떠돌아다니고, 확장되고, 휴식을 취하고, 꽃을 따러 가고, 접시꽃과 분수와 기둥들과 함께 놀고, 오르세 구역을 떠나는 기병대 소속 군인들의 뒤를 쫒고, 센강의 물결을 따라가고, 창백한 하늘을 제비들과 함께 날아오르도록 내버려두었다. 그의 상냥한 편지가 그녀를 슬프게 한 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p.25
그런만큼 프루스트가 20대 초 중반에 썼다는 단편모음집 '밤이 오기 전에'가 현암사에서, 국내최초로 최근 발간된 것이 무척 기뻤다. 40대에 작가가 발표한 '잃,시,찾'은 그야말로 작가들이 사랑한 작품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적으로 논문과 비평서가 가장 많이 발표,출간되는 작가 중 하나) 다만 특유의 만연체는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 작가들도 읽기를 포기하기도 하고 독자들도 1권을 넘기 힘든 경우의 고통을 적지않게 호소한다. 나도 두어차례 1권 읽기를 시도했다가 3분의 1지점에서 무너지곤 했었다. 그러다 10권부터 거꾸로 읽기를 해 도달한 1권은 전혀 다른 세계,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자신을 드러냈다. 삶의 순간순간을 사랑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던 프루스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통찰력과 지적 깊이를 작품에 오롯이 담아냈다. 그런 그의 20대 풋풋했던 시절의 글을 읽는다는건 나에게 설레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안쪽에는 약간 정신없어 보이는 느릅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나무는 바람이 가져오는 별 대수롭지 않은 소식에도 얼마나 소란을 떠는지 끝이 나지 않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대체로 아무도 그 나무를 상관하지 않지요. 그냥 거기에 혼자 있습니다. 그 앞쪽에는 호수가 있습니다. 호수 안에 가지를 넣고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버드나무 한 그루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떨지 않고는 일 분도 버틸 수 없는 환자 같지요. p.102
프랑수아즈: 시적인 장소 같아요.
앙리: 소설적인 장소에 가깝지요.
프랑수아즈: 그렇다면....(침묵)우리에게 잘 맞겠어요. p.103
반전의 묘미가 있는 단편도 있고, 결말이 분명하지 않게 끝나버린 미완성의 글도 있었다. 독특한 자신만의 음색이 있는 가수들이 노래에' 지문'을 남기듯, 프루스트의 '지문'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들이 더러 보여서 좋았다. 뒤쪽에 있는 해설로 이 원고들이 프루스트 사후 1세기 뒤에 출간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글은 조금은 지루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읽는다면 프루스트 만의 섬세한 문장들을 여럿 건져올릴 수 있다. 무심코 지나치고 흘려버릴 수 있는 찰나를 영원의 문장으로 살려내는 힘을 지닌 마르셸 프루스트. 그가 살려낸 장소들을 거닐며 그곳에 부는 바람과 공기를 느끼고 호흡하면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더 또렷이 바라보고 새롭게 감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읽고 싶은 프루스트에 관한 연구서들
노래:TOY
사진출처:서울신문(영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중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