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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으로 - 한국 문학사에서 지워진 이름. 평생을 방랑자로 산 작가 김사량의 작품집
김사량 지음, 김석희 옮김 / 녹색광선 / 2021년 8월
평점 :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느날 오후. 무거운 비에 맞서 우산을 붙잡고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동네 입구쯤에 이르렀을 때, 교복을 입은 중학생정도 되어보이는 앳된 남자아이가 비를 흠뻑맞은채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냉큼 달려가 우산을 씌워주며 함께 가자고 했다. 어쩌자고 이런 날 우산 없이 이렇게 가느냐고 그러다 감기걸린다고 집이 어디쯤인지 물었다. 아이는 부끄러워하긴 했지만 다행히 호의를 거부하진 않았다. 비가 엄청 쏟아져서 아마 그럴 겨를도 없었을것이다. 내 몸이 홀딱 젖은것처럼 안쓰럽고 눈물이 날것 같았다. 아이엄마가 이 상황을 보면 얼마나 속상할까.100미터쯤 걸었을 때 물었다."집이 어디쯤이야? 어디 살아? 누나가 (나는 지금도 아이들을 보면 누나라고 강조한다)집까지 바래다 줄께"아이는 oo아파트라고 대답했지만 내가 다니던 쪽이 아니라 어딘지 알수 없었다. 불편해할까봐 우산을 주어 보낼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여분은 없었고 쫄딱 맞고 가기엔 엄청난 비였다. '이런 인연도 있구나. 이 아이에게 우산을 씌워주려고 이 시간 이곳을 지나친 것일 수 있겠다'하는 생각을 했던것 같다.
예상보다 그 아이 집은 멀었다. 아이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그애가 낯선 사람과 우산 하나로 같이 걸어가는게 어색할까 이것저것 학교 생활에 대해 어떤지 물었다. 어림잡아 4키로쯤 걸어 드디어 그 아이가 사는 아파트 현관에 다다랐고 우리는 그날 만난것 치고는 정답게 헤어졌다. 비는 아직도 고집스럽게 내렸고 집까지 다시 4키로 이상을 걸어야 했지만 발걸음은 날아갈듯 가벼웠다. 하물며 일본에 나라를 침략당한 끔찍한 상황에 타지에서 우리민족의 피가 흐르는 아이를 보는 심정은 오죽했을까. 비록 그 아이가 못되게 굴더라도 말이다. 장대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큰 슬픔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니까.
'빛 속으로'
김사량의 자전적 이야기임에 분명한 첫 번 째 단편 '빛 속으로'에서 남 선생은 아이들과 섞이질 못하는 외톨이 하루오와 갈등을 겪는다. 자신도 혼혈임에도 조선인을 무시하는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하루오는 남 선생 주변을 맴돌며 관심을 보이는 듯 하지만 그가 조선인임이 드러나자 아이들 앞에서 그를 조롱한다. 조선인임에도 일본인처럼 이름이 잘못 불리는 것에 대해 정정하지 않는 남 선생과 하루오의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 죄의식은 어떤 면에서 유사한 비극이었다. 식민지 상황이었지만 시대를 넘어 공감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눈자위가 하얗게 보였다. 아이들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침을 삼켰다. 그 애의 눈에 문득 눈물 한 방울이 맺히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 애는 조용히 눈물을 삼키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조오센징노 바까!(조선인, 바보!)"p.25
'천마'
식민지배의 상황에서 일제의 끄나풀로, 조선인들에게는 광인 혹은 들개같은 존재가 되었던 극단적인 인물 소설가 현룡. 그의 허황된 말들과 행동을 통해 단지 그 시대 뿐 아니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뇌를 비춰볼 수 있던 점이 의미있었다.
햄릿도 아닌데, 날더러 절에 가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니 우습지. 그게 말이야, 비구니들의 절이라면 몰라도 대머리 중들이 있는 데라고. 이보게, 내가 오필리아야? - P123
'풀이 깊다'
고향을 찾은 박인식은 과거 그의 스승이었던 '코풀이 선생'의 비굴한 모습을 보게된다. 코풀이 선생은 별명 답게 코를 훌쩍이곤 했기에 그의 상황은 더욱 비참해 보이기도 했다. 이른바 '색의장려'란 운동을 마을에서 하고 있었는데 실용적이지 못한 하얀 옷을 입지말라며 조선 사람들의 옷에 먹물을 뭍히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실제로도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인식에게 한 때 조선어를 가르쳤던 '코풀이 선생'은 이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으며 일본인 선생들의 심부름을 하고 '색의 장려'활동을 할 때에는 붓을 들고 사람들의 옷에 먹물을 뭍힌 것이다. 산에는 굶주린 화전민들이 불을 지르다 큰 불로 번지곤 했는데 백백교라는 사이비교가(이것도 실화라고 하는데 당시 무려48구의 시신이 발견됐었다고 한다.) 등장해 순박한 이들의 피를 빨고 살인까지 했다. '색의 장려'에 대응한듯 하지만 백색 옷의 구원을 빌미로한 이들의 만행은 작금의 권력이 가진 횡포와 이중성을 여실히 담아낸다.
돈이라도 냉겨 가지고 오면 어데 덧나는지. 맨날 날으 꼴딱 새고 기 들어오는 주제에 술이 당키나 하우! 머어, 잔체(잔치)라고? 당장 낼 떼꺼리 (끼니)도 없는 주제에 코댕가리가치 몬느므 잔체요! 내 하에 치매 우트 할꺼나고? 우트 할끄나니까? 비러머글 군청놈들, 즈 집 오슨(옷은) 애끼노미(아끼면서) 나므 치매(남의 치마)는 말이 되우야… 내거 부애가 치밀어 살수가엄싸요."- P161
이 책의 저자인 김사량은 본명은 김시창으로 평양출신의 소설가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친일작가와 저항작가라는 극단의 이미지를 오고가는 와중에 1980년대 말까지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지되었으나 이후'(2000년대)에는 윤동주에 비견되는 저항작가로 알려졌다.'(p.224.번역자) 하지만 오랜 세월 그는 지워지다시피했고 그런만큼 그의 작품은 표제작 이름과는 달리 빛을 보지 못했었다. 일본어로 출간되었던 이 작품은 그들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당시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올랐었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을 읽으며 부유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삶의 단면들이 그려져 가슴아팠다. 김사량에 대해 석,박사 연구까지 한 번역자의 해설이 읽어볼만하다. 나중에 다시 재독해보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