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은 누구나 (협조적이건 비협조적이건 모호한 상태이건) 남성적세계의 테트리스(세계관)에서 어느정도씩 타자로써의 상실감을 경험한다. 어린 시절에는 가정과 학교에서,성인이 되면 직업과 성,결혼을 비롯한 사회적 관계에서 끊임없이 외부와 내부에서 그런 억압의 사례들과 소외의 암시를 받게 된다. 역사,문화,사회,경제적 상황의 테트리스 축적은 세계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의 존재가 필수적임에도 이들을 인정하고 동류로 받아들이거나 대우하지 않은채 존재하지만 비존재인것처럼 지우려고 꾸준히 노력해왔다. 그래서 남성들이 바라보는 이 테트리스의 탑에서 여성들은 기이하게도 (왜냐하면 테트리스를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전체적으로 아귀가 맞지않으면 제대로 축적되지도, 게임이 이어지지도 않는다.) 지워져 있으며 이는 특히 여성들의 입장에서 너무나 분명하다.
사람들은 여자를 부엌이나 규방에 가두어 두고서 여자의 시야가 좁은 것에 놀란다. 여자의 날개를 잘라놓고는 그녀가 날 줄 모른다고 개탄한다. 여자에게 미래를 열어 준다면,그녀는 더이상 현재에 정착해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자를 그 자아나 가정의 한계에 가두어 두면서 그녀의 나르시시즘과 이기주의 및 허영,신경과민,악의 등을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다. p.828
영화 '아저씨'는 내가 수도 없이 반복해 본 영화중 하나다. 전직 특수요원이었던 원빈은 아내를 잃은 뒤 모든 걸 뒤로한 채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어린 소미를 만나 그녀를 돕게 되면서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분출한다. 이런 영화의 클리셰는 '지켜주는 남주'와 '도움받는 여주'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원빈처럼 되고 싶지 소미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여성도 소미처럼 불행한 상황에 빠지고 싶진 않을 것이다. 다만 위기에 처했을 때 원빈같은 능력자에게 도움을 받고 싶을 수 있다. 비단 영화 뿐 아니라 결혼에 관련된 사회적 상황이 여성에게 원빈보다는 소미로 있는게 유리하다고 조장하고 요구한다. 국가가 남자들만 병역의무를 지게 하는 것은 그게 그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해서지 여성을 보호하거나 배려해서가 아니다.국가가 만약 여성을 배려해 '지켜주기 위해서'남성들만 군복무를 하게 한 거라면 여성군인에 대한 성폭력을 지금처럼 끔찍하게 방관하고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성을 억압하는 것은 그것이 이익이라고 남성들이 판단해서다.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218670
성폭행 피해 여군,그는 왜 유엔을 찾을 수밖에 없었나
https://www.ytn.co.kr/_ln/0101_202110191855411119
여야,공군 성추행'무더기 불기소'일제히 질타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남자들에 의해서 일어난다. 현실은 이러한 소설과 전설을 확인시켜 준다. 만일 여자아이가 신문을 읽고 어른들의 대화를 듣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이 세계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가 존경하는 국가원수,장군,탐혐가,음악가,화가들은 남자들이다.그녀의 가슴을 열정으로 뛰게 만드는 것은 남자들이다. (...)서구 종교에서 아버지 신은 남자며,전형적으로 남성적 특징, 즉 탐스러운 하얀 턱수염의 노인이다. 그리스도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한층 더 구체적인데, 긴 금발의 턱수염을 하고 살과 뼈로 된 남자다. 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천사들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그러나 남자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아름다운 젊은 남자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p.416
각종 거래를 포함한 세상이치나 실리적인 문제에 여성이 관심을 보이면 뭘 그런 것 까지 여자가 알려고 하느냐는 질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 광고에서 젊은 여성이 자동차 정비를 받으러 가기전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여자라고 더 바가지 쓰지 않기 위해 전문용어를 외우고 강한 눈빛을 연습한다. 하지만 막상 정비사를 만나 그녀는 멘붕에 빠진다. 이 광고가 웃음을 주는건 현실에 기반한 사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이런 문제에 약한건 사회가 그들에게 그런 정보가 여성들에게 불필요하다고 배제시켰기 때문이지 타고나길 그런 분야에 무능한 것이 아니다. 여성이 이른바 '남성적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면 특이한 사례가 되고 '놀라운 인물'이 된다. 하지만 그런 분야에서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여성도 완벽하게 그러한 남성과 동일한 입장이 될 수 없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여성들은 보다 안일한 선택을 하게 된다. 직접 능력을 키우기 보다는 능력있는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피보호자로 안주하는 것이다. 원빈과 같은 든든한 동반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사회는 권장하고 당사자는 받아들인다.
보부아르-"여자의 결점은 그녀의 처지를 나타낸다."
플라톤ㅡ"불의가 오래 계속되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시야가 좁고 소심하고 반항적인데다 감정적이며 눈치보고 변덕적이며 신경질적인 것... 이런것들은 생존을 위한 피지배자들의 특징이다. 이런 이유들을 대며 무능하다고 미리부터 배제하는것은 특권층의 기만이며 특권영속의 갈망을 반증한다. 이런 기본적인 기만의 구조에도 불구하고 흔히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남자들이 훨씬 뛰어나 많은 업적을 세웠으므로 그런 차이에서 오는 차별은 여성들이 수긍하고 감수해야한다고 말한다.(즉 계속 지워진채로 함께 테트리스를 이어가자는 것이다. 게임은 계속해야하니 너도 참여해라 하지만 모두?의 이익을 위해 너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지워져야한다.) 불과 수십년전 여성은 투표도 할 수 없었고(스위스는 1971년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했다.전 지역에서 인정된 것은 1990년이다.) 정치에서도 배제된채 집에서 머물며 바느질이나 요리,육아를 전담했다. 일부 특권층의 여성들만이 가사노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완전한 사회적 자유를 허가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여성의 사회진출이 허용되었지만 결혼한 여성들은 경력단절을 피하기 힘들고 가사노동에서도 풀려나지 못했다. 그리고 신체적으로 남녀간의 체력차이가 어느정도 존재하지만 이런 억압적 구조에서 여성의 나약함은 더욱 미화되고 기질화 되고 두드러지게 된다. '소미'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소미'가 되는 것이다.
"남자의미래는 남자에게 달려있지만 여자의 미래는 남자에게 달려있다"
남자들의 위업과 견줄 만한 위업을 이룩한 여성들은 사회적 제도의 힘이 모든 성적 차이를 초월해 찬양했던 여성들이다. 이사벨라 여왕이나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그리고 러시아의 카테리나 여제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그녀들은 군주였다. (그리고 상징이었다.-미미)
사회적으로 그녀들의 여성성이 사라지자, 여성이라는 사실이 더는 열등함을 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 위대한 치세를 보여 준 여왕들의 비율은 위대한 왕들의 비율보다 월등하다. p.212
남자는 보편이고 진리이며 유일한 주체다. 남자들은 낙태를 범죄라고 하면서 동시에 연인으로써는 낙태를 종용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다.낙태를 종용하는 당사자이기도 하고 무책임하게 피임을 거부하는 당사자이기도하다. 슬프지만 이런 기만적인 구조에서 여성이 그나마 얻게된 혜택들은 남성들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 여성들이 빼앗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성이 혼자 여행하는 것이 위험이고 큰 모험인 세계에서 어두운 골목길에 앞에선 여성의 공포와 마침 방향이 같아 뒤에선 선량한 남자의 거북함은 우리 모두의 불행이다. 영화 '미스 슬로운'이나 '킬빌'의 캐릭터, '길 위의 인생'의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런 열악한 조건을 이겨낸 현실적이지 않은 특별한 주인공아자 '쎈 언니들'이어서 감동과 짜릿함을 준다. 나는 이런 오랜 억압과 소외의 남성세계에서 그들이 조금씩 양보하는 조건들에 만족하지 말고 기본적으로 체력적 차이를 위한 노력을 여성들이 하길 바란다. 예를들면 약체가 자신보다 월등한 강체를 이길 수 있는 '주짓수'를 비롯해 최소한의 자기방어를 위한 운동을 하나씩 배우는 것이다. 뉴스에서 남성의 폭력을 제압한 기사가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면 그 반대의 경우와 다른 결과와 파장을 사회에 줄 것이다.
파국은 각 개인이 자기와 상대방을 동시에 상호적으로 객체와 주체로 설정하면서 각자 다른 사람을 자유롭게 상호 인정함으로써 극복 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들 간의 이러한 상호 인정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 우정과 관대함은 쉬운 덕목이 아니다. 그것들은 확실히 인간 최고의 성취이고,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진실을 체득한다. p.224
<제 2의 성>을 읽는 모든 여성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이 억압의 사례들을 수도없이 재발견할 것이다. 반면 남성 독자들은 누이들과 어머니,연인,아내,회사 동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사례들을 여럿 떠올려볼 수 있다. 나에게 가장 좋았던 점은 기존에 읽은 소설에서 새로운 맥락이 보였다는 점이다. 여성억압은 전세계가 역사적으로 꾸준히 공유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범죄이며 암묵적인 전쟁이다. 분투하고 잠에서 깨어나는 여성들과 이들과 함께 연대하려 하는 남성들로 인해 상황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지만 아직도 이 전쟁의 화마는 꺼지지 않은 상태로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다. 누구도 완전한 희생자도 완전한 가해자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 남성들은 이 전쟁으로 인해 큰 이득을 보고 있는 특권층이며 그로 인해 이 상황을 영속시키려고 한다. 개개인은 이 거대한 시스템의 급류에 공범이자 희생자인 것이다. 하지만 어떤 문화도 필연적이 아니듯 이 상황은 분명 바뀔 수 있다. 서로를 존중하는 상황이 모두에게 더 큰 이익을 줄 수 있지만 모두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다. 우선 모두가 이 전쟁의 실체를 똑바로 바라봐야하고 불필요한 희생을 더는 외면하려 해선 안된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분연히 문학과 철학,심리,역사,경제, 결혼등 사회적 관계안에 내제된 그 모든 속박과 굴레의 심연을 분석해 이 오래된 시스템의 문제와 모순,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불행이면서도 다행스럽게도 72년전 그녀의 분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보부아르의 명징한 목소리가 메아리로 퍼져 책 전체에 울려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