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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 세계화와 생태학적 관점에서, 새로운 발견 1
로버트 B. 마르크스 지음, 윤영호 옮김 / 코나투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아, 이 책 아쉽다. 참 좋은 책인데 왜 벌써 절판된 것일까? 외국 역사서의 경우, 번역되면서 당시 출판계 유행에 따라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제목이 이상하게 붙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책도 그렇다. 이 책의 원제는 <The Origins of the Modern
World: A Global and Ecological Narrative>이다. 아마 <다시쓰는 근대 세계사 이야기>라는 제목
때문에 청소년용 흔한 대중역사서같은 인식을 주어 독자들의 시선을 못 끌다가 그냥 잊혀진 것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통쾌했던 점은 1492년 에스파냐 레콩키스타 완료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상륙으로 근대사 서술을 시작하여 오직
근대사가 서구사인 다른 근대세계사 서술과 달리 전 지구적 세계화의 관점에서 근대세계의 기원을 설명하는 점이었다. 저자는 현재 세계의 패권을
잡고 있는 서구인들이 근대 세계 형성에 기여한 업적을 과대 평가하지 않고 '서구의 부상'이란 기존 관념을 비판하며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가
담당했던 역할을 밝혀준다. 결국 서구인들이 그들 주도의 근대화에 성공하여 세계지배체제를 이룩한 것이 그들이 지닌 우월성에 따른 승패의
결과라기보다는 민족국가를 이루고 그 역량을 자본주의와 식민지배 체제에 일관되게 쏟아부어 생태학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우연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유럽중심주의의 재해석에도 불구하고, 엄연한 현실인 현재 서구의 패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에 저자는 '비록 지난 세기의
유럽중심적 이데올로기가 신화로 굳혀진다고 할지라도 서구유럽은 영원히 세계를 지배하거나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 - 본문 233쪽 '라
일갈한다.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매우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세계사 개론
시간에 저자가 강의한 근대세계의 기원에 대한 대학 강의 노트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학생들이
너무 부러워 샘이 났다. 한편 이런 선생님 없이 독학했으면서도 페르낭 브로델부터 안드레 군더 프랑크, 포메란츠, 맥닐, 월러스틴 등 저자가
요약해 언급하는 대가들의 주요 저작들을 알아듣는 내가 기특했다.
친구분들께 강추하고 싶은데, 절판이다. 죄송해서 아래에 맛뵈기로 길게 인용한다. 이 인용 부분, 국내나 일본 대중역사서 읽다보면 흔히
만나게되는 유럽 근대 정신 찬양하는 견해와 비교해 보시길.
이 개념(앞에 '서구의 부상'이 언급되었음 -
껌정)의 이면에 숨겨진 사상은 매우 단순한데, 그 시작은 스페인의 아메리카정복 직후와 16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인들은 수백 명의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스텍이나 잉카와 같은 방대하고 부유한 아메리카 식민지를 점령하는 것에 깜짝 놀라게 되었다. 매균설과
멕시코 대참사 - 그 당시 3,000만 명에 달하던 멕시코인들 가운데 무려 90퍼센트가 천연두와 감기 같은 유럽인들의 질병에 감염되어 죽었다 -
의 원인을 전혀 몰랐던 유럽인들은 처음에 자신들의 우월성을 기독교에서 찾았다. 그러나 17세기와 18세기 계몽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그리스
문화의 유산에 기인한 세속적이고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사고에 자신들의 우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1700년대 후반 산업혁명과 1789년 프랑스혁명은 유럽인들에게 자신들이 단순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세계가 정체되어 있는 동안 유럽은 급속도로 '진보'하고 있다는 의식을 강화했다. 결국 유럽이 다른
세계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이었다. 19세기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 - 자유, 평등, 박애 - 에 심취하여 고대 그리스를 비롯한
민주주의, 공화제, 종교가 아닌 과학의 관점에서 자연세계를 이해하려는 이성주의에 대해 고찰했다. 서구의 부상에 관한 초창기 내용은 마치
릴레이경주처럼 진행되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민주주의 사상을 창안했지만 로마 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암흑기가 도래하면서 그만 바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윽고 기독교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봉건시대 유럽의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면서 다시금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후 고대 그리스의 유산이
르네상스시대에 재발견되고 계몽시대에 정교하게 다듬어져서 마침내 프랑스 혁명과 미국독립전쟁을 통해 '서구의 부상'으로 완성되었다.
- 본문 14 ~ 15쪽에서 인용(저자가 '서구의 부상'이란 견해를 비판하는 부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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