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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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닥터가 처방해준 약을 먹고, 마음이 아프면 내가 처방한 책을 읽는다. 그런데 아, 이 책 약발 끝내준다!

 

이 책은 <축의 시대>로 유명한 종교 저술가 카렌 암스트롱(1944 ~ )의 자서전이다. 영적인 삶에 관심있던 저자는 17세에 수녀원에 들어간다. 명민한 그녀는 옥스포드 대학에 진학해 영문학을 전공한다. 그러나 경직된 수녀원의 조직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7년만에 환속한다. 신경 쇠약을 앓는다. 세상에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공부에 몰두하지만 수녀원에서 7년동안 익힌 삶의 방식 때문에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힘들다. 최우등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 논문을 쓴다. 자신의 한계를 알기에 자신이 교수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교 외 세상에 적응해 살 자신이 없다. 간질 발작이 시작된다. 박사 논문은 통과되지 못한다. 대학에 남지 못하게 된다. 여고 교사로 취직해 영문학을 가르친다. 수녀원 경험을 다룬 첫 책을 쓴다. 병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저자는 자신이 번번이 실패하는 사람이며 낙오자, 주변인이라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그런데 자신을 이렇게 망가뜨린 수녀원과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저자는여전히 영적인 것에 끌린다. 방황한다. 생계를 위해 덥석 맡은 방송 작가 일로 예루살렘에 취재하러 갔다가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접하며 종교, 신, 영성에 대해 새로운 각도로 보게 된다. 종교 공부를 시작한다. <신의 역사>와 <마호메트>를 저술하며 드디어 신과 종교의 본질에 대해 깨닫는다. 다른 문화권의 종교에 대한 편견, 혐오를 없애는 역할을 하며 종교와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동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넓고 근사한 계단이 아니라 좁은 나선형 계단(책 표지 이미지)을 빙빙 돌며 번번이 제 자리에 있다고 생각한 자신의 삶이 그래도 빛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도중에 있었다는 의미 부여를 하며 책은 끝난다.  

 

큰 내용은 위와 같지만 얼핏 보기와 달리 그리 종교적이며 근엄한 내용만을 갖고 있지는 않다. 1944년생인 저자는 2차 대전 후 영국에서부터 2001년 911테러까지 세계사의 굽이굽이와 자신의 방황을 함께 이야기한다. 그 굽이와 방황이 어떻게 자신을 성장시키고 '마음의 진보'를 이루어냈는지를. 종교에 관심이 없어도 마음이 힘든 분이나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별개로 자신의 길을 찾으며 성장을 꿈꾸는 분들이라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아래 인용 부분, 뭉클하지 않은가. '남의 괴물과 싸우지 말고 자신의 괴물과 싸워야,,, 자기 삶에서 빠져 있었던 것,,,' 이 문장에, 나는 그만 책상에 머리를 박고 한참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신화를 보면 남이 갔던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번번이 길을 잃는다. 영웅은 낡은 세상과 낡은 길을 버리고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지도도 없고 뚜렷한 발자취도 없는 미지의 어둠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 남의 괴물과 싸울 것이 아니라 자기의 괴물과 싸우고 자기의 미궁을 탐색하고 자기의 시련을 감내해야만 자기 삶에서 빠져 있었던 것을 결국 찾아낼 수 있다. 이렇게 거듭나야만 자기가 두고 온 세상에도 무언가 쓸모 있는 것을 안겨줄 수 있다.

- 본문 453 ~ 454쪽에서 인용

 

문학 전공자인 저자는 곳곳에 영미 명시를 인용하고 신화, 전설을 예로 든다. 문장도 솔직하면서 품위 있다. 게다가 내 입장에서는 저자가 문학 덕분에, 또 글을 쓰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스스로 성장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한 것이 참 좋았다. 나는 그동안 이 저자가 종교학 박사 출신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 박사 학위도 없었고 문학 전공자였으며 종교는 독학으로 공부한 것이었단다. 정신 병원에 입원도 하고, 거식증도 앓는 등 병든 심신을 추스리고, 독학을 하고, 모든 실패를 딛고 글쓰는 삶에 도전하고,,, 이 모든 것이 저자 나이 40대에 이룬 성과였다. 그리고 결국 저자는 지금 어린 시절에 꿈꾸었던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추구하며 살게 되었다. 과거의 자신을 넘어서게 되었다.

 

나는 독학으로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였지만 아마추어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아마추어는 어차피 자기가 좋아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 아닌가. 나는 고독한 나날을 말없이 나의 주제에만 몰두하면서 보냈다. 매일 아침 어서 빨리 책상으로 달려가서 책을 펼치고 펜을 쥐고 싶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애인과 밀회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 밤에는 침대에 누워서 그날 하루 배운 내용을 뿌듯하게 음미했다. 가끔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혹은 국립 도서관에서 먼지가 쌓인 두꺼운 책을 읽다가 내가 연구하던 신학자나 신비론자의 마음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싶은 초월과 외경, 경이의 순간을 잠깐씩 체험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음악회나 극장에 와 있는 것처럼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나 자신을 넘어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본문 482 ~ 483쪽에서 인용

 

입시 준비하듯 책의 정보만 흡입하는 독서를 하다가, 오랫만에 감정 이입해서 500쪽이 넘는 책을 단숨에 읽었다. 몹시도 추운 날씨에 거리를 한참 헤매다가 난방 잘된 까페에 들어가 갑자기 뜨거운 커피를 마셨을 때처럼, 책을 읽어가며 좋은 문장이 나올 때마다 머리가 띵했다. 우지직, 살얼음에 금이 가는 소리가 났다. 한 240쪽 정도 읽어나가니 그냥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래, 다리가 아프니 좀 주저앉아 이 책을 읽으며 쉬어가자. 나의 나선형 계단, 지금 있는 자리가 가장 춥고 어두운 모퉁이도 아닌데 뭘.

 

좋은 책 읽을 때마다 호들갑 떨며 친구분들께 강추니 어쩌니 리뷰에 적곤 했지만, 이 책에는 그런 말을 못 쓰겠다. 읽는 사람이 각각 처한 상황에 따라 이 책이 각각 다른 무게로 느껴질 것 같아서.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절망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정말 큰 위안을 줄 수 있는 책임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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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기괴 명화
나카노 미요코 지음, 김정복 옮김 / 두성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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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나카노 미요코의 다른 저서인<서유기의 비밀 : 도와 연단술의 심벌리즘>을 읽어가면서 여러번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얼마나 쟝르 파괴, 크로스오버로 공부하고 읽으면 이런 것까지 보고 쓸 수 있는 것일까? 검색해보니 저자는 서유기 전문가이자 중국 도상학 전문가로 인정받는 대가였다. 그 방면으로 총 30여 종의 저서가 있는데 국내 번역 소개된 책은 단 두 권이다. 이미 한 권은 읽었으니 다음 책을 고르기 위한 고민은 할 필요가 없었다.

 

책 내용은 소개하거나 요약할 방법이 없다. 저자는 동서양의 그로테스크한 그림들을 놓고 관련 이야기를 풀어간다. 우선 전체 그림을 소개하고 자신이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을 확대한 그림을 또 제시한다. 손오공 캐릭터에 영향을 끼친 인도 고대 서사시 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원숭이 장군 하누만이 타이 방콕 왓 프라께우 사원 벽화에 어떻게 그려졌는지, 힌두교 창세 신화인 <유해교반도>가 20세기 현대 회화에 어떻게 재해석 되어 그려졌는지, 사람과 온갖 요괴의 목이 열매로 열리는 나무의 그림과 그 해석,,, 등등 동양 신화에 해박한 저자의 장기자랑이 책을 읽고 그림을 보는 내 눈앞에 펼쳐진다. 저자의 목소리는 내비게이션처럼 날 그로테스크하지만 매력 넘치는 세계로 안내하고, 신화와 전설, 종교와 상상과 현실의 박학/잡학 다식 박람강기의 세계를 접한 나는 문화적 충격에 빠졌다.

 

기가 막히게 세밀한 묘사력 때문에 아기 머리가 식물에 열매로 매달려 있는 모습이 너무도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지금 무심결에 '그로테스크'라고 썼습니다. 보통 '흉하다''기이하다''이상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말은 원래 식물에 인간이나 동물을 곁들인 장식무늬를 듯합니다.

- 본문 72쪽에서 인용. 카를로 크리벨리가 1482년에 그린 <카메리노의 세폭 제단화> 설명 부분.

 

일본 역사 학자들의 특징일까, 자신의 전공 분야를 세세하고 깊이있게 전문 서적으로 쓰면서도 다른 분야와 연결해 자신이 공부하다가 알아낸 곁다리 지식을 흥미로운 대중서적으로 풀어내는 이러한 능력은? 무슬림의 예배용 양탄자의 문양을 보고 이슬람 건축 양식을 말하다가 하늘을 나는 양탄자 전설로 날아가는 이런 아스트랄함이라니! 아, 사부님, 저를 제자로 거두어 주시옵소서, 하고 무조건 들이대고 싶어지누나!

 

결론적으로, 책 내용 자체보다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책을 쓰는 자세와 세상과 사물에 대한 호기심,  관찰의 일상화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요긴하게 써 먹을 참고자료 서적 목록을 얻어내어 기뻤다. 물론, 원서여서 좀 덜 기뻤다.

 

이 책의 그림과 관련한 배경 지식이 많은 분들은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 신화 전설이나 미술사에 좀 약하신 분들은 또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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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자궁 -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행복한 여자로 사는 건강법
이유명호 지음 / 나무를심는사람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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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그래서 설레나 봄. 나 역시 벚꽃나무처럼 꽃피우고 열매 맺을 수 있는 씨방을 가진 생명이기에.

봄이다. 그래서 아픈가 봄.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내 젊은 몸을 이제는 바꾸며 변화하는 환절기이기에.

 

특별한 병 없이 여기저기가 마구 아프다. 22살 때부터 비가 내리면 다리가 아파서 밤에 잠 못자는 저질체력이었기에 그동안 별로 젊음을 불태우지도 않고 조심조심 살아왔는데, 마흔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아프다. 이거 노화현상인가? 비록 지구에 발을 딛고 살지만 여자 몸 전체의 컨디션은 달나라의 주기에 따르기에, 몇 달 체크해보니 이제 나의 궁전은 문을 닫을 준비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아픈가 보다. 내 나이에 벌써? 오버 아니다. 늦은 나이 초경과 이른 나이 완경, 이후 급격한 노화 진행은 집안 내력이다. 살찌지 않는 체질을 물려 받은 것은 좋지만 평생 골골거리며 아플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그래서 내 공부를 위한 독서를 잠시 멈추고 검색하다 이 책을 만났다. 책에는 자궁 포함, 육장육부를 가진 여성이 마땅히 알아야할 건강정보가 넘친다. 월경, 완경(폐경대신 저자는 완경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질과 난소와 자궁의 병. 건강한 섹스와 임신과 출산과 모유 수유. 유방암과 우울증 예방과 치료까지. 유익하다.

 

게다가 원했던 건강 정보 외에 얻은 것이 많다.  여성으로 살면서 아팠던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저자의 이야기가 통쾌하다. 저자분은 여자로 태어나 아픈 이유를 철저히 한국 사회의 문제에 기초하여 콕콕 찍어내 주신다. 약이 되는 음식 정보를 알려 주실 때도 한 여성이 하루종일 희생해서 부엌에 매달려야만 하는, 현실적으로 실천 불가능하거나 주부들에게 죄책감을 안겨주는 정보를 주지 않아 좋았다. 걍 이 책에 읽는 대로 실천하고 늙어가는 내몸 고칠 수없으니 달래가며 사랑해주어야겠다. 늘어가는 나이와 아파가는 내 몸에 운동과 자연식, 마음 공부를 통해 대처해야겠다. 일단 팥주머니부터 만들고.   

 

초경을 시작한 십대 초반 어린 친구부터 완경 전후의 언니들에게, 아니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여자 친구들에게 이 책을 강추한다. 물론, 그녀들을 사랑하는 남성분들께도.     

 

이 책에서 마음에 안 드는 오직 한 가지 대목 : 질염은 일종의 이스트 같은 효모가 면역이 떨어지면 늘어나서 분비물이 느는 건데, 효모가 좋아하는 밀가루, 설탕, 맥주, 치즈를 먹으면 느는 경향이 있단다. 아, 괜히 읽었어. 이 대목은 빨리 잊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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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 혁명사 - 식민지 독립전쟁과 노예해방
로런트 듀보이스 지음, 박윤덕 옮김 / 삼천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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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민주주의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상당 부분 생도맹그 노예들의 투쟁 덕분이다.

- 본문 19쪽에서 인용

 

 

서구인 입장에서 서구사 위주로 세계사를 배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티 혁명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서인도 제도에 있던 섬나라 아이티는 독립 이전에는 프랑스의 식민지 생 도맹그였다. 사탕수수와 커피 플랜테이션을 위해 식민지 지배자들은 아프리카인들을 이 섬에 노예로 끌고 왔다. 1791년, 이들 노예들은 봉기한다. 이때 프랑스는 혁명 와중에 있었다. 프랑스 공화파들은 이들과 동맹을 맺는다. 혁명 이념의 평등한 적용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진실은 식민지 반란을 당당 무력 진압할 형편이 안 되었고 오히려 흑인 병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군사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프랑스는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이는 곧 식민지 노예제 폐지로 이어지고, 1794년, 프랑스 국민공회는 프랑스 영토내 노예들은 모두 프랑스 공화국의 시민이라고 선포한다. 한편, 프랑스가 대륙에서 전쟁에 휘말린 틈을 타, 산토 도밍고(현재 도미니카 공화국)를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과 자메이카를 식민지로 지배하던 영국이 생 도맹그를 침략한다. 흑인 군대들은 양대 제국과 싸워 이긴다. 그러나 프랑스 상황이 수습되자, 나폴레옹은 생 도맹그에 군대를 보내 '식민지 반란 진압'에 나선다. 혁명군은 삼색기의 흰 색을 찢어내고, 더이상 프랑스 공화국에 기대를 갖지 않는다. (생도맹그에서 삼색기는 흑인, 혼혈인, 백인의 평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역부족, 혁명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는 프랑스에 포로로 잡혀 간다. 1803년, 쥐라산맥에 있는 주 요새의 감옥에서 사망한다. 백인과 유색인의 보복 학살과 테러가 서로 자행되고, 남은 사람들이 버티고 버텨서 전쟁은 이어진다. 1804년, 드디어 생 도맹그는 프랑스로부터 독립해 본래 원주민인 타이노족이 그 섬을 부르던 이름인 '아이티'를 국명으로 삼는다.

 

아이티 혁명은 식민지 독립과 노예해방을 동시에 완수한,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이었다. 게다가 그시대의 막강한 제국인 스페인, 영국, 프랑스와 각각 전쟁을 해서 이겨 내지 않았는가. 이 혁명은 교과서에서 그렇게 위대하다고 말하는 프랑스, 영국, 미국 혁명보다 규모가 크고 더 전세계적으로 의미있는 혁명이었다. 유일하게 승리한 노예반란이기도 했다. 아이티 혁명은 카리브 해 식민지들은 물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독립과 혁명에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쳤다. 유색인과 가난한 사람, 여성을 차별하던 서구 혁명의 실상을 보라.  재산과 성별에 따라 시민권이나 선거권을 주던 앞서 세 혁명의 성과와, 1793년에 이미 여성들에게도 투표권을 주던 송토나 시절의 아이티의 성과는 비교도 안 된다. 프랑스 혁명 이념의 전파와 혜택, 식으로 아이티 혁명의 동기를 왜곡해서도 안된다.

 

아이티혁명은 온갖 피부색을 띤 모든 사람이 자유와 시민권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어 냄으로서 영원토록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이 혁명은 아메리카에서 노예제 페지의 핵심적 부분이었고, 따라서 인권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기초를 닦은, 인류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티혁명의 후예들이고, 또한 우리는 이 조상들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

- 본문 24쪽에서 인용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조상들을 알지도 못하는가? 그것은 서구인 시각에서, 서구인의 이익을 반영하여 쓴 세계사만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는 대로 보다보니, 전쟁광 나폴레옹이 위대한 혁명가인줄만 알고, 자신의 영토욕을 위해 자유 평등을 외치는 것에 속아 편협한 위인전만 읽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생도맹그에 '반란군 진압'을 위한 원정 군대를 보내면서 "아메리카에 일어나고 있는 흑인 야만주의에 맞서는 서양 문명인들의 십자군(본문 396쪽)'이라는 헛소리를 한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아아, 나는 이런 역사를 계속 공부하고, 나 역시 이런 잘 모르는 역사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주는 글을 쓰고 싶다!

 

워워,  이 책에 있는 기본적 내용 소개만으로도 너무 흥분했다. 아이티 혁명 요약이 아니라 책의 특징도 말해야 하는데.

 

책은, 전체의 절반 분량이 투생 루베르튀르의 본격적 등장과 활약 이전을 다룬다.그래서 아이티 뿐만 아니라  1800년대를 전후한 서인도 제도 식민지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볼 수 있어 더 좋았다. 아이티 혁명이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시각으로 왜곡되기 쉬운 이유 중 하나가, 혁명 주역 당사자들의 기록이 너무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당시 농장주의 편지 등 혁명 상황을 반영한 기록을 인용해서 최대한 1차 사료를 보여 주려 노력했다. <제인 에어>의 광녀 전처, 크레올 여성 버사에게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반가운 자료들을 많이 접해서 좋았다.

 

하지만 책은 혁명 이후 아이티 역사의 어두운 면까지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얼머무려 버린다. 혁명 후일담이랄까, 그런 점이 부족한 것이 아쉽다. 사실 그걸 다 써버리면 아이티 혁명이 기껏 독립했더니 내전 벌이고 독재하고 가난하게 살잖아? 하는 식의 반응을 받을 수도 있겠다. '왜정 시대' 찬양하는 우리나라 어떤 분들같은 반응은 세계사 어디에서나 나온다.

 

그러나 알 건 알아야지. 이 리뷰에 내가 공부한 아이티 독립 이후 역사를 좀 덧붙인다. 아이티 정부는 프랑스와 국교를 맺기 위해 배상금(농장 등 재산을 상실한 망명 농장주의 요구)을 1825년에 지불한다. 돈이 없기 때문에 프랑스 은행에 돈을 빌려서 프랑스에 지불한다. 그래서 현재까지 프랑스에 부채를 지고 경제가 종속되게 된다. 또, 상업 작물 플랜테이션외에 산업이 없기에 경제가 취약한 점. 식민지 시절에 농업이 왜곡되었기에 주 식량까지 수입해야 하는 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 플랜테이션에 집중하다보니 농업 노동자들이 농장에 다시 노예계약처럼 묶이게 되는 점, 독립 지도자들의 변질, 내전, 1915년 ~ 1934년까지 미국의 아이티 점령, 그 시기 미국이 자행한 6만 명 학살, 미국이 지원한 독재자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  최근의 아이티 지진,,, 내가 아는 건 대략 이 정도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아이티 혁명이 위대하구나야, 나는 아는데, 하고 잘난척하듯 이 책의 리뷰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이 책을 읽은 나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일단은, 이것을 하겠다 :

 

친구분들아! 이 출판사 책 좀 돈 주고 사 보시라! 촘스키 선생님이 쓰신 <쿠바 혁명사> 등 매우 좋지만 안 팔릴 책을 많이 낸 출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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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악마들 -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
피터 홉커크 지음, 김영종 옮김 / 사계절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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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실크로드 견문록>을 읽었다. 그런데 그 책의 '실크로드의 보물을 약탈한 서양인들' 챕터의 내용이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다. 그 앞의 현장법사의 취경 여행이나 8세기 당나라의 장안 등을 설명한 부분도 그랬다. 그동안의 독서로 인해 쌓인 배경 지식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얼쑤! 내 엉덩이를 내가 두드려주며 책의 성격은 애매했지만 신나게 읽어나갔다.

 

그런데 읽어갈수록 너무 이상했다. 나는 다음 장에 나올 내용까지 미리 맞출 수 있었다. 오, 드디어 내가 한 소식 들었나보다. 이제 경지에 올랐구나!,,, 하며 희희낙락하고 있다가,,,, 한 글벗님께서 이 책 <실크로드의 악마들>을 알려 주셔서 그제서야 두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 나는 이 책을 7,8년 전에 읽고 리뷰를 쓰지 않았다.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둘. <실크로드 견문록>은 이 책을 거의 베꼈다. 세상에나!

 

몇 시간쯤 갔을까, 헤딘은 물이 나올법한 곳에 이르러 땅을 파보도록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그제서야 자신들이 갖고 있던 유일한 삽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하들 가운데 하나가 고대 가옥들을 파헤칠 때 깜빡 잊고 삽을 거기다 두고 왔던 것이다. 헤딘은 즉시 그 부하에게 말을 타고 가서 삽을 찾아오라고 했다. 삽을 갖고 돌아온 그는 도중에 모래 폭풍에 휩쓸려 길을 잃었는데, 그때 우연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유적들을 발견했노라고 말했다. 언뜻 보기에도 무척 아름다운 목조상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들은 헤딘은 즉시 다른 부하들을 딸려 보내며, 그곳으로 가서 목조상들을 가져오라고 했다. 가져온 목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헤딘은 흥분으로 '눈이 돌아버릴'지경이었다.

- <실크로드 견문록>본문 270쪽에서 인용

 

 

몇 시간쯤 갔을까, 그들은 물을 얻기 위해 모래를 파기로 했다. 그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삽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 중 하나가 자신이 깜빡하고 고대 가옥에 삽을 두고 왔다고 자백했다. 헤딘은 자기의 말을 타고 가서 찾아오라며 그를 돌려보냈다. 삽을 찾아 가지고 돌아온 그는, 모래 폭풍을 만나 길을 잃고 헤매다가 우연히 전에 발견하지 못한 유적을 보았다고 했다. 모래 밖으로 아름다운 목조상 몇 개가 삐죽이 나와 있더라고 말했다. 헤딘은 그에게 즉각 그것들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다른 사람들도 딸려 보냈다. 가져온 목조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헤딘은 흥분해서 '거의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 <실크로드의 악마들> 본문 100-101쪽에서 인용

 

분기탱천, 나는 책꽂이 구석에서 이 책 <실크로드의 악마들>을 찾아냈다. 둔황 고문서처럼 쌓인 모래,,,아니고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읽었다. 역시 이 책은 대단했다. 다른 책이 베낄만한 권위를 갖고 있다. 서양의 중앙아시아 유물 약탈사나 실크로드, 둔황에 대해 알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이 기본이다. 자, 이제 내 사설을 그만 두고 책 소개나 하자.

 

<그레이트 게임>의 저자로 유명한 지은이는 냉정하게 중앙아시아 유물의 발견자이자 약탈자들의 행적을 복원한다. 책은 실크로드에 대한 배경지식 설명으로 시작해서 사라진 오아시스 도시들, 강대국들의 발굴 경쟁, 스벤 헤딘과 오렐 스테인, 르콕, 펠리오, 오타니, 랭던 워너의 발자취를 숨가쁘게 쫓는다. 서구인인 저자의 입장은 '스타인이 돈황 고사본들을 영국으로 가져간 것에 대한 잘잘못을 떠나서, 그 중 가장 중요한 몇 권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 듯 싶다(분문 249쪽)'에서 엿볼 수 있듯, 판단 없이 그들의 공적과 과오의 전과정을 독자에게 낱낱이 다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의 행적과 더불어 둔황 문서고를 아니 자신들의 고대사를 털린 후 '우리 인민들을 이에 대한 원한으로 증오 속에서 이를 갈고 있다(본문 249쪽에서 인용)'라고 비판하는 중국 측의 입장 역시 다 보여준다. 판단은 독자에게 맡길뿐이다.  

 

저자 뿐만 아니라 역자분 역시 대단한 정열을 갖고 이 책을 번역하신 티가 난다. 원서에 없는 사진(역자 개인 소장)까지 번역본에 넣어 편집하도록 했다. 중간 중간에 원저에 미흡한 내용을 역자 주로 보충해 놓았다. 역자는 [실크로드 길 위의 역사와 사람들]의 저자이기도 하니, 믿고 읽을만 하다. 읽다보니, 전에 읽은  실크 로드 관련 서양 책 번역서에서 '대안탑'을 '큰 야생 기러기 탑'으로,,,이딴 식으로 번역해놓은  것을 보다가 버린 나의 시력이 회복되는 기분이 든다.  

 

책의 주 배경이 되는 지역은 동서 투르키스탄 지역이다. 한동안 <서유기>와 <대당서역기> 관련 책들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어서 그런지. 이 지역에서 현장 법사가 얼마다 중요한 인물인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 모래 속에 파묻혀 천 년 넘게 잊혀진 도시를 발굴해보면 현장의 기록과 일치한다니!  둔황에서 왕도사가 현장법사의 이야기를 꺼낸 스타인에게 의기투합, 마음을 여는 장면이라니!  실로, 현장 법사는 洋鬼子들에게도  '수호 성인'이라 불리며 존경받을만 하다.

 

이렇게, 이 책을 두번째로 읽으면서는 나는 역자와 현장 법사, 두 사람의 역할에 대해 중점적으로 보았다. 또한 현장의 시대에 있던 것과 사라진 것, 스타인과 왕도사의 시대에 있던 것과 사라진 것, 그리고 이라크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유적유물 파괴 만행에 대해 생각했다

 

잊었던 좋은 책을 재발견하게 해 주신 그분께 감사드린다. ^^

 

*** 그래도, 옥의 티 :

본문 42쪽, 굽타 왕조의 아쇼카 왕 => 마우리아 왕조

235쪽, 먼차우즌 => 뮌하우젠(Baron Munchausen, 독일 소설<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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