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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바오 / 2009년 5월
평점 :
참으로 애틋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겠고, 참으로 감동 받으며 읽은 책에는 리뷰를 선뜻 못 쓰겠다. 내 맘 속에 아껴둔 존재에 대해 내 부족한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표현하는 순간 나의 진지한 감정이 남들에게 유치한 감상으로 보여져 버릴까봐 겁나기도 해서이다. 그래도 이따금은 세상에 대해 크게 외치고 싶다. 나 이 사람을 읽고 사랑하고 있노라고. 내 친구인 당신들도 이 사람의 매력을 인정하라고.
나는 역사 관련 서적 읽는 것이 좋다. 특히 자신의 앞 시대를 냉철히 고찰하며 자신의 당 시대를 열정적으로 살아간 역사 저술가들의 책을 읽는 것이 좋다. 예를 들자면 사마 천. 그는 궁형의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아 <사기>를 썼다. 또, 프랑스 아날 학파의 대표적 학자이며<봉건 사회>의 저자인 마르크 블로흐. 그는 강단에만 머무르지 않고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에 자원하여 활동하다가 독일군에게 총살당했다.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는 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망명하던 도중 시대의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이런 저자들이 쓴 역사서를 읽으면 배경으로 나온 시대만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통해 자신의 시대를 말해주는 저자들의 낮은 목소리가 행간에서 들린다. 소름이 돋아 미칠 것만 같다.
나의 슈테판. 독자들은 그를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트와네트>의 전기 작가라든가, <광기와 우연의 역사>의 대중적 역사 에세이 작가라든가, <모르는 여인의 편지>의 문학가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안타깝다. 내가 보기에 그의 진면모를 읽을 수 있는 책은 이 책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나 <에라스무스>, <아메리고>인데 말이다. 물론 그의 다른 책들에서도 섬세한 심리 파악 문체라든가 인간 사회에 대한 통찰력 등 그의 매력은 충분히 넘쳐 난다. 하지만 과거 한 시대의 폭력에 외롭게 저항하거나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던 사람의 이야기를 생생히 들려주어서 자신이 살고 있는 현 시대의 폭력까지 고발해 버리는 그의 양심과 지성을, 겉으로는 고요해 보이지만 분노로 거세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의 박동을 느끼기에는 위의 3종의 책이 최고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책이 다루는 시대는 서양의 16세기이다. 루터와 칼뱅이 활약하던 종교개혁의 시기이자 헨리8세와 프랑수아1세와 카를5세, 슐레이만 대제란 걸출한 군주들이 등장했던 유럽 격동의 시기이다. 게다가 지네 말로는 대항해시대인 서구 세력의 침략이 한창 진행되던 시대. 정말 작가들이 쓸 거리도 독자들이 읽을 거리도 많은 시대이다. 더불어 아직 미숙한 내가 보기에 한 가지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시기가 바로 현대까지 이어지는 세계사와 세계관의 주요 기틀이 거의 다 짜인 시기라는 점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는 종교개혁만 해도 그렇다. 나는 신학적으로는 모른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근대적 정신을 지닌 개인의 탄생과 기존 권위의 부정이라는 면에서 본다. 그런데, 신교도들의 이후 역사를 보면 이상한 점이 보인다. 자신들이 카톨릭에 의해 박해받던 시절에 내세우던 주장과 달리, 자신들이 권력을 잡은 이후에는 자신들과 다른 종교적 해석을 하거나 신앙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면에서 신의 이름을 내걸고 반대자들을 박해하는 모습이 너무도 많이 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다른 해석을 할 권리를 들고 기존 교회에 저항했기에 그들의 명칭이 프로테스탄트인 것인데, 그렇다면 그러한 프로테스탄트 내에서는 이단이란 개념조차 성립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내에서 이단에 대한 공개 화형식이 일어났다.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구현한 칼뱅에 의해서, 역시나 신의 이름을 내걸고.
1509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칼뱅은 신학과 인문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종교 개혁적 입장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껴 스위스 바젤로 망명한다. 그 곳에서 그는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여 종교 개혁의 대표적 신학자로 인정받는다. 이후 옛 동료 파렐의 강요로 제네바의 종교 개혁에 참여하게 된 칼뱅은 설교자 자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종교 제도들을 도입하여 시의회와 갈등을 빚고 파면당하나 카톨릭 세력의 위협을 느낀 제네바 측이 다시 삼고초려하여 그를 모셔간 이후로 제네바를 "개신교의 로마"로 만들고자 엄격한 신정정치를 펼친다. 문제는, 칼뱅은 자신과 다른 종교적 해석이나, 신앙과 상관없는 부분에 대한 다른 의견을 못 받아들이는, 지나치게 독선적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점. 곧 엄격한 법 집행으로 제네바의 거리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고 오직 종교경찰의 감시의 눈초리만 번득이게 된다. 심지어 어린이에게도 사형이 집행된다.
1553년, 칼뱅은 삼위일체설을 부인하고 칼뱅의 권위에 도전했던 스페인 출신의 세르베투스를 부당하게 대하여 이단으로 단정, 화형에 처해 버린다. 이에 칼뱅은 전 유럽 지성들의 비판을 받는다. 칼뱅이 무서워 각자의 서재 안에서 문을 닫아 걸고 한 비판을. 이에 맞서 공개적으로 칼뱅의 오류를 지적한 사람이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카스텔리오이다. 카스텔리오는 <칼뱅의 글에 반대함>에서 말한다. "한 인간을 불태워 죽인 일은 이념을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살해한 것이다! "라고. 그후 카스텔리오는 칼뱅의 스파이들에 의해 일거수 일투족 감시당한다. 치사하고 비열한 허위 고발과 중상모략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카스텔리오는 자기 의사를 표현하여 반박할 권리조차 빼앗긴다. 뛰어난 전략가인 칼뱅은 자신이 다스리는 제네바 시와 카스텔리오가 있는 바젤 시의 외교 문제로 이 문제를 이끌어가서 문인에게서 글을 쓸 권리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카스텔리오의 책이 인쇄되어 출간되기까지 이후 백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칼뱅 측의 지속적이고 야비한 공격에 카스텔리오는 온화하게 "기독교도에게는 사랑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자.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적들의 입을 다물게 하자. 당신은 당신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도 자신들의 의견을 그렇게 생각한다. "라고 기독교적인 관용 정신으로 맞선다. 점점 궁지에 몰려 가던 카스텔리오는 48세의 나이로 운명한다. 그의 친구의 말처럼 "하나님의 도움으로 적들의 발톱에서 빠져 나간" 것이다. 아마,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세르베투스처럼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카스텔리오의 관용정신은 17세기 로크가 <관용에 대한 서한>을 쓰기 이전에, 18세기 볼테르가 <관용론>을 집필하기 이전에, 19세기 말 에밀 졸라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서한으로 드레퓌스를 옹호하기 이전에 몇 세기나 앞서서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극도의 대립과 증오로 혼란스러웠던 16세기 종교개혁의 와중에 말이다. 그러나 카스텔리오의 투쟁과 원고는 잊혀졌다. 그의 책은 사상의 자유를 가장 신성한 기본법으로 요구한 유럽 최초의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칼뱅의 승리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도덕적인 노력도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영원한 이상을 위해 너무 일찍 나타났던 사람들, 그래서 패배한 사람들도 패배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미를 실현했다. (중략) 언제나 승리자들의 기념비만을 바라보는 세상을 향해서, 수백만의 존재를 망가뜨리고 그 무덤 위에 자신들의 허망한 왕국을 세운 사람들이 인류의 진짜 영웅이 아니라, 폭력을 쓰지 않고 폭력을 당한 사람들이 진짜 영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
- 본문 23쪽
바로 위와 같은 대목에서, 나는 본다. 칼뱅의 독재와 독선에 맞선 카스텔리오의 단단하고 날카로운 펜을. 또한 나는 본다. 나치 독일의 폭력에 맞서는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의 역시 단단하고도 날카로운 펜을.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폭력의 시대에 저항하는 두 명의 사랑스런 인문주의자 남자들이 그려져서 심장이 마구 뛴다. 갈비뼈가 아플 정도이다. 뿐만이랴, 내가 무식해서 미처 모르는 그 어떤 카스텔리오가, 그 어떤 슈테판이 더 있었을지,,,, 아, 이런 감상적 문장이 나올까봐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오랫동안 못 썼던 것이다!
나의 슈테판이 쓴 책들을 읽다보면 이상한 현상이 생긴다. 처음에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등장 인물의 전기적 정보와 관련된 부분에 줄을 치며 읽는다. 그런데 갈수록 주요 내용과 상관없이 슈테판의 멋진 논평이 드러난 문장에 감탄하며 줄을 치게 된다. 그래서, 책을 다 읽은 후에 리뷰를 쓰고자 다시 책을 후루룩 넘겨 줄친 부분만 읽으면, 책의 내용을 요약하기에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지만 너무도 반짝이는 문장들을 눈부시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이 리뷰를 마무리짓기 위해 도대체 어떤 문장을 인용해야 할 지 난감하다. 그래도, 이 책의 주제와 이 저자의 매력을 한 칼에 보여주는 문장을 고른다면, 아래와 같다.
일시적으로 이 이념이 말을 못하게 막으면, 그것은 모든 억압이 미치지 못하는 가장 깊은 양심의 공간 속으로 도망쳐 들어간다. 그래서 권력자들이 자유정신의 입을 틀어막고서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는 것과 더불어 새로운 양심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는 인류와 인간성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위한 싸움을 떠맡아야 한다는 정신적인 의무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모든 칼뱅에 맞서 어떤 카스텔리오가 다시 나타나서 폭력의 모든 폭행에 맞서 사상의 독자성을 옹호하게 될 것이다.
- 본문 288쪽에서
그러나 결코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카스텔리오를 영웅적으로 묘사하고자 칼뱅을 근거없이 비방하지는 않았다. 그가 이 책을 집필하고자 자료를 찾던 1935년에 쓴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지금 나는 카스텔리오에게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기 때문에 칼뱅에 대해서 공정한 태도를 취하고, 그에 대한 적대감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가 카스텔리오에게 부당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부당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또한 이 책 본문 280쪽에서도 저자는 이렇게 분명히 말하고 있다. "칼뱅이 요구했던 것과 역사의 발전 속에서 칼뱅주의가 이룬 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큰 잘못일 것이다. " 바로 이 점이 내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나의 슈테판"이라고 부르는 많은 이유 중 하나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저서들은 나치 독일 시절에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2차대전 종전 후 재간행된 이 책은 기독교 칼뱅파 쪽으로부터 신학적, 정치적으로 심한 공격을 받았다. 카스텔리오가 겪은 일과 비슷한 일이 그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이에 카스텔리오와 슈테판 츠바이크를 다 지켜본, 두 남자를 다 사랑하는 나는 마지막으로 이 문장을 쓴다. 어느 시대든, 이념이나 종교 자체보다 광신의 자세가 더 문제인 것이다, 라는 문장을.
*** 사족 : 혹시 이 글이 불편하실 분들을 위해 이미 칼뱅의 추종자들은 1903년에 세르베투스가 화형당한 제네바의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 칼뱅의 오류를 인정한 바가 있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