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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 - 상 ㅣ 영국의 역사
나종일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전에, 대한교과서(현 미래엔)의 세계각국사 시리즈를 (아무도 시키지 않았건만) 의무감을 가지고 머리카락 쥐어뜯어가며 광적으로 읽어댄 적이 있었다. 세계사 통사로 전체 얼개 파악한 후에, 말하자면 각개 격파를 시도한 셈이었는데 그 빽빽한 활자들이며 흑백 사진들에 질려 한동안 각국사를 읽지 않게 되는 후유증이 남았다. (앙드레 모로아나 케임브리지 시리즈, 아틀라스 시리즈나 간간 손댔음). 머릿속에 지식은 남았지만 즐거운 독서의 기억은 없다. 힘든 연애의 추억같은 힘든 독서의 추억만 남았다.
그 과거의 질린 경험 때문에 이번에 다시 영국사를 읽을 때에는 교보 문고에 가서 서양사 코너를 훑어 보며 실제 책을 보고 꼼꼼하게 골랐다. 가벼운 이야기류의 책들에게는 코웃음을 날려 주고, 옥스퍼드 영국사에는 식겁한 후, 이 책을 골랐는데, 다 읽고 난 지금 매우 만족스럽다. 사십년 묵은 노안에 걸맞게 활자도 시원하고, 지도도 정확히 필요한 위치에 있다. 도판과 사진이 흑백인 점은 뭐 그다지 흠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편집을 좀더 세련되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책은 제목 그대로 영국사를 다룬다. 상권인 이 책은 원시 켈트족 시절부터 크롬웰 시대 명예혁명까지 다룬다. 책이 상,하 2권으로 나눠져 있어서 튜더 시대 이전 고, 중세사를 깊이 읽을 수 있는 점이 특히 좋았다. 다른 1권짜리 얇은 역사서들은 거의 튜더 시대 이전 서술의 분량이 너무 적은 데 비해서 이 책은 튜더 이전 시대, 즉 원시 시대와 로마 지배하의 브리튼, 앵글로 색슨과 노르만 정복 시대, 앙주 왕조, 프랑스와 전쟁을 보낸 13-14세기와 랭커스터가와 요크가 등에 대한 서술 분량이 250쪽에 달한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 관심을 가진 고중세사 부분을 다른 책에 비해 깊이 읽을 수 있었다.
그밖에, 영국의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대륙에 대한 끊임없는 간섭과 전쟁, 그로인한 전비 마련을 위한 의회 소집 등을 읽으며 영국식 의회 민주주의가 어떻게 성립하고 발전해나갔는지, 의회와 군주의 갈등이 역시 어떻게 현재 영국의 정치 제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서술이 특히 재미있었다. 정치 사상과 같이 언급해주신 점도 읽기 편했다.
관심있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역사서를 주로 읽다가 이렇게 통사를 한 번 읽어주면 그 관심 시기 앞 뒤의 배경 등을 보면서 전혀 상관없이 보였던 사건들의 맥락이 이어져 시야가 트이는 경험을 하곤 한다. 이렇게, 이 책은 교과서같은 좀 읽기 지루한 통사서도 종종 읽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다. 다른 이야기류, 검증되지 않은 야담까지 서술하고 도판만 화려한 영국사들에 비하면 월등히 가치있는 책이다. 워밍업이 좀 되었으니, 하권까지 떼고 나면 나를 식겁하게 만든 옥스퍼드 영국사에 도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