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0년 전쟁 - 오늘의 유럽을 낳은 최초의 영토 전쟁 1618~1648
C. V. 웨지우드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평점 :
문득, 올 여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이제스트 판으로 책을 접하고 그 내용을 다 아는 듯한 착각을 가지는 것의 위험성이 문학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하는.
어린 시절 오빠의 교과서나 참고서 읽기를 즐겨했다. 오빠의 중학교 국어 완전정복 자습서를 읽어 보면 한 단원 끝날 때마다 세계 명작을 간략히 소개해 주는 코너가 있었다. 겉멋들린 초딩의 눈에 보기에 왠지 소개된 작품들이 멋져 보여서 두근거리는 가슴 지긋이 누르며 책장에 침 묻혀 넘겨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맙소사, 자라서 그 작품들을 직접 읽어보니 그만 알게 되었지 뭔가. 그 다이제스트 판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웃긴 것인지를 말이다. 예를 들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수용소에 갇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묘사함으로써 당시 스탈린 체제를 비판한 작품'이라고만 알고 있는 사람과, 직접 그 작품을 읽어 보아서 따끈한 스프 한 그릇을 배급받는 이반의 그 순간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느끼고 보는 세계는 엄밀히 다르지 않은가. 문학작품에만 그런 생각을 하다 올 여름, 내가 좋아라 읽는 역사서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통사류 책에서 그 사건 진행 과정과 역사적 의의, 이후에 끼친 영향을 저자의 시선으로 짧게 요약된 것만 읽는 것과, 내가 한 권의 책으로 그 사건 전체를 시종여일 더듬어 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일 것 같았다. 마침 십자군 관련 책을 읽고 그외 유럽의 종교 전쟁에 대해 더 궁금하던 차에 영국의 역사학자 C. V. 웨지우드의 <The Thirty Years War>의 초판 번역본이 나왔다는 신문 기사를 접했다. 딱 지금의 나를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하. 게다가 30년 전쟁은 지금의 유럽을 만든 전쟁이라지 않은가.
그럼, 이 전쟁의 배경과 진행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자.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이후 계속된 종교전쟁은 일단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종결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중 오로지 루터파에만 적용되어 칼뱅파는 보호를 받지 못한 점은 분쟁의 불씨를 살려 둔 셈이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주변국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형성되어가고 있는 반면 독일에서는 분열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 분열상태는 제후들의 갈등요인에 단순한 종교 문제가 아니라 영토 문제가 깔려 있음을 암시해 준다. 게다가 발트해 진출을 노리는 덴마크와 스웨덴은 같은 프로테스탄트 국가였지만 정치 경제적으로는 독일제후들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같은 구교 국가인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조간도 경쟁자적 입장이었지 결코 종교적으로 동반자적 관계는 아니었다. 그 전 네덜란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공식적인 30년 전쟁의 시작은 구교도 제후인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어 신교도 탄압에 나서자 보헤미아인들이 반란(유명한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을 일으키는 1618년에서 시작한다. 보헤미아의 신교도 귀족들은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추대하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마티아스 사망 이후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는 구교 연맹과 에스파냐의 도움으로 프리드리히 5세를 몰아낸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는 보헤미아인들의 종교적 자유 뿐만 아니라 정치적 독립의 열망이 큰 동인이 되었다. 여기에 루터파의 덴마크왕(신성로마제국의 한 제후인 홀슈타인 공이기도 하다) 크리스티안 4세가 개입하여 북독일 지방의 신교도들을 원조하고 북해의 항구를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독일을 침공한 그의 군대는 황제군 지휘관 발렌슈타인의 군대에 격파되고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로서의 독일 내 특권을 빼앗긴다. 승리에 고무된 황제는 반환령을 공포,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래 신교도들에게 들어간 구교회의 재산을 원상회복하려 든다. 이에 신교도 편에서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이 참전한다. 스웨덴 국왕은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대패, 전사하지만 아내와 딸 크리스티나 여왕이 뒤를 이어 전쟁을 지속한다. 독일은 이미 황폐화되었다. 용병들은 제때 급료가 지불되지 않거나 식량 보급이 늦어지면 약탈에 나서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무덤을 파헤쳐 썩어가는 시체의 살까지 발라먹는 세월이 이어지지만 무능력하고 이기적인 제후들은 이익 따지기에 앞서서 민중들의 현실의 고통을 보지 못한다. 발렌슈타인 사후 궁지에 몰린 황제는 휴전을 제의하지만 어떤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도 종전과 평화를 독일에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다들 여전히 자신과 자국령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만 따지고 있는데 또다시 외세가 개입한다. 즉 같은 구교 국가이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숙적인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가 개입한 것이다. 이후 로크루아 전투의 대참패 이후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모두가 패색이 짙어가는 현실을 인정, 마침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면서 정확히 30년을 끌면서 독일전역을 황폐화 시킨 전쟁은 끝난다.
이 전쟁이 이후 유럽과 세계 근현대사에 끼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일단 베스트팔렌조약은 근대 국제 조약의 효시인 성격을 지닌다. 이 조약에서 승자의 입장에 있던 프랑스는 알자스(130년후 보불전쟁 때 다시 독일영토로 되어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 등장하는 그 알자스)를, 스웨덴은 발트해와 북해연안의 영토를 얻고 브란덴부르크(나중에 프로이센이 되는) 선제후도 동부 폼메른 지방을 얻는다. 그러므로 독일의 경우 주요 강 지역의 영토를 다 외세에 빼앗긴 셈이 되어 바다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가 거의 막히게 된다.(이후 독일이 제국주의 후발주자가 된 이유 중 하나)그리고 이미 전쟁 이전 어느 정도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던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이 정식으로 인정된다. 종교적으로는 칼뱅파도 가톨릭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며 교회 재산의 소속은 1624년을 기준으로 삼기로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조약은 신성로마제국을 구성하고 있던 국가들의 완전한 주권과 독립을 정식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독일민족의 제국은 황제와 8선제후, 96제후, 61자유시의 연합체가 되어 1871년까지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붕괴하고 오늘날의 오스트리아로만 남게 된 셈이다. 그리하여 에스파냐와 오스트리아 양 쪽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힘을 잃고 프랑스가 유럽을 장악하게 된다. 이렇게 30년 전쟁은 독일의 종교전쟁으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결국은 각국의 이해관계와 영토야욕이 얽힌 국제전쟁이 되어 결과적으로 근대적인 국제적 외교관계가 수립되게 되었던 것이었다. 즉 국가간의 세력균형이나 외교 조정 등은 이전에는 교황청에서 하던 역할인데 한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손을 거쳐 이제 각국의 동등한 주권행사와 외교관계가 성립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또한 이 전쟁에서 생산력을 200여년 전 수준으로 되돌리고 3/4가 넘는 인구감소를 가져오게 한 주요한 원인인 용병집단의 학살과 민간인 살해, 약탈 등의 문제가 국제적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30년 전쟁은 근대 국가 자체의 성립보다 근대 체계의 성립에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결코 종교전쟁만이 아닌 것이다. 십자군 전쟁과 마찬가지로 종교를 내걸었지만 속내는 영주들의 영토야욕이 기본으로 깔려 있던 전쟁이기도 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출판사측의 책 소개글에 따르면, 유럽 근대사가 전공인 저자는 학자의 길을 택하지 않고 저술가의 길을 택한 사람이며, 대여섯개의 언어로 된 1차 사료들을 뒤져서 놀랍게도 29세(!)의 나이에 이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 초판은 1938년에 출간됐는데,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증쇄를 거듭할 만큼 30년 전쟁을 다룬 최고의 책이자 전쟁사 가운데서도 인정받는 책이라고 한다. 나는 30년 전쟁만을 온전히 단행본으로 다룬 책은 처음 읽었기에 이 소개가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30년 전쟁에 대해 다른 책에서 짧게 언급한 내용이 다 이 책에 자세히 나와 있음은 확실히 알겠다. 또 책 소개글에 따르면 이 책의 특징이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라 생생하게 인물을 살려 내는 이야기식 구성이라고 하는데 이 점은 내게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다. 대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익숙한 시오노 나나미나 이덕일식 역사 서술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책은 좀 밋밋하다는 느낌을 받을 것 같다. 읽어가다 무릎을 치며 감탄할 만한 논평도 그리 많지 않았다. "독일 지배자들 등 누구도 집을 잃고 한겨울 추위에 나앉은 사람도, 입에 풀을 문 채 죽은 사람도, 아내와 딸이 성폭행을 당한 사람도 없었다. 극소수만 흑사병에 걸린 게 고작이었다. 그들은 목숨이 위태롭지도 않았고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었기 때문에 인간의 고통이 아니라 정치의 견지에서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 (본문 327쪽)" 정도의 모범생적 논평 뿐이다. 이는 아마 집필 당시 저자의 나이와 관계있지 않을까, 싶다.
700 페이지가 넘는 두께가 사람을 좀 질리게 하지만, 산술적으로 7시간이면 읽을 수 있는 분량이기에 두께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내게는, 신성로마제국, 즉 지금의 독일 지역의 공국, 백국 등의 위치와 지명, 그리고 다 비슷비슷한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혼맥, 가계도 등이 머리속에 확실히 잡혀 있지않아서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읽다가 한 번 맥을 놓치면 지도와 가계도를 찾고 다시 수십 페이지 거슬러 올라가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상보다 꽤 오래인 3주 동안이나 이 책을 잡고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른 통사류에서 간단히 몇 페이지 요약적으로 언급하고 지나가던 내용을 세밀히 살펴 볼 수 있어서 올 여름, 꽤 보람을 느끼며 읽었다. 말하자면, "간단히 신교와 구교 갈등만 아닌 영토 야욕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던 전쟁이다" 라는 문장에서는 미처 다 보지 못했던 것들, 즉 각국 지배자들의 영토야욕과 명예욕, 피지배 민중을 고려하지 못하는 이기심과 근대 민족국가 설립 이전 외세를 끌여들어 자리를 보전하려 했던 통탄할만한 현실과 전쟁을 거쳐 지나치게 성장한 용병집단들의 문제 등등이 지금 현재 세계에까지 어떤 전례를 남겼는지를 나는 이번에 볼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말한다. "전쟁을 멈출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하지않은 사람들에게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워야 한다."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더불어 지배계급의 이익을 둘러싼 종교 전쟁 와중에, 종교랑 상관없이 생존을 위해 민란을 일으킨 당시 독일 민중의 역사 사례도 눈물겹게 기억해 두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역사 사실 자체보다 그를 서술하는 역사가의 눈길을 느끼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나는 뻔뻔하게도 조금 알 것도 같다. 1차대전을 목격하고 대공황을 겪고 히틀러의 부상을 보며 스페인 내전이 진행중인 1930년대에 2백년 전의 전쟁의 참상을 사료를 뒤져 재현해주는 저자의 펜이 얼마나 떨렸을지를.
결론적으로 솔직히 지금의 내 수준에서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완전히 다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왠지 이후 나의 독서생활에 큰 영향을 줄 것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