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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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나름 분석하다가, 이게 걍 낭만적 사랑과 결혼, 결혼과 성이 일치된(일치되기를 꿈꾸었던) 빅토리아 시기 가족과 성애의 새로운 버전일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을 글로 정리하자니, 자본주의와 섹슈얼리티, 근대 가족 성립 쪽으로 더 공부해야겠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일단, 우에노 치즈코부터. 얊고 대중적인 책부터.

 

책은 300쪽이란 얇은 분량 안에 집약적으로 여성 혐오의 역사와 현실(일본 현실)을 풀어낸다. 주로 일본 문학이나 사건, 인물 역사를 예로 들기 때문에 좀 이질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 게다가 이 분 서술이 좀 과격하다. 뭐 나야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다(65쪽)'같은 서술이 유쾌 상쾌 통쾌했지만. 사실 내가 혼자 대강 생각하던 이야기를 이 분이 알아서 명확하게 해 주시니 뭐 그저 고맙기만 하다. ( 이제 내게 시비거는 아저씨들 만나면 걍 이 책을 권해주고 난 그 자리를 피해야겠다.)

 

아래는 목차이다. 목차만 봐도 대강 내용이 짐작될 것이다. 요약한다는 건 의미가 없고, 걍 남성이든 여성이든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2015년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여성 혐오가 현실의 본질적 문제를 은폐하는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다들 이야기나눴으면 좋겠다.  


제1장 호색한과 여성 혐오
제2장 호모소셜, 호모포비아, 여성 혐오

제3장 성의 이중 기준과 여성의 분단 지배 ―'성녀'와 '창녀'의 타자화
제4장 비인기남과 여성 혐오
제5장 아동 성학대자와 여성 혐오

제6장 일본 황실과 여성 혐오

제7장 춘화와 여성 혐오
제8장 근대와 여성 혐오
제9장 어머니와 딸의 여성 혐오
제 10장 '아버지의 딸'과 여성 혐오
제11장 여학교 문화와 여성 혐오
제12장 도쿄 전력 OL과 여성 혐오 part 1
제13장 도쿄 전력 OL과 여성 혐오 part 2
제14장 여성의 '여성 혐오' / '여성 혐오'의 여성
제15장 권력의 에로스화
제16장 여성 혐오는 극복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여성인 내 입장에서 여성 혐오가 자기 혐오가 된다는 부분을 설명한 부분이 인상깊다. 내가 느끼는 자아 분열, 자기 기만, 모순적 감정의 뿌리를 알고 나자 해방감이 든다. 어머니와 딸 부분도 지금 내 입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아, 좀더 빨리 나 자신과 화해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남성의 여성 혐오는 타자에 대한 차별인 동시에 모멸이다. 남성은 여성이 될 걱정이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여성을 타자화하고 차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성에게 있어 여성 혐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된다. 자기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회적 약자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비슷한 '범주 폭력'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범주는 지배적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156쪽에서 인용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있어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었다. 남성에게도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여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 혐오'와 싸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제시하는 것은 더 이상 여성의 역할이 아니다.

- 본문 304쪽에서 인용. 인용한 마지막 문장은, 문맥상 '여성의 역할이 아니다'이다.

 

몇 달전에 거다 러너의 <가부장제의 창조>를 읽었으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책에서 설명하는 가부장제의 기원이 너무 잔혹했고, 내 감성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막혔던 부분이 뚫렸다. 최근 읽은 알베르토 안젤라 책에서 로마 남성들의 성의식 부분도 '호모 소셜, 호모 포비아, 여성 혐오'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튼, 잡스럽게 읽어두면 어느 순간 점잇기 게임이 되어 순식간에 그림이 완성되기는 하는구나. 이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아담 이브 뱀>으로 넘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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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제국 - 결혼이 지배하는 사회 여자들의 성과 사랑
노부타 사요코 외 지음, 정선철 옮김 / 이매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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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담집이다. 일본의 여성주의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와 임상심리 상담가 노부타 사요코가 2000년대 초반 일본 현실을 기준으로 결혼 제도, 연애, 성, 가정 폭력, 세대 갈등, 경제와 관련한 사회문제에 대해 대담한 내용이다.

 

결혼이 여성을 억압한다,,, 같은 기본적이고 독자가 상상할 수 있을만한 이야기도 있고 '사랑 없이도 섹스할 수 있다'라는 낚시성 제목이 달린 장도 있다. 하지만 책은 더 깊다. 둘의 대화는 더 폭넓게 문제의 근원, 미래에 대한 우려까지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결혼 제국'이라는 제목과 출판사의 책 소개글은 책 내용을 다 담지 못하고 있는듯하다.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의 대담은 여성에게 결혼이 필수냐 선택이냐,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비혼 여성의 증가와 노령화가 앞으로 사회에 어떤 변화를 줄 것인가가 핵심인데.  특히 우에노 치즈코의 주전공은 사회학 중에서도 개호(care, 돌봄노동) 쪽이라는 점을 생각하며 이 대담을 파악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주로 논하는 세대는 당시 30대 여성이다. 대담자들은 일본 경제의 혜택을 받아 남녀평등 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하여 30대가 된 2000년대 일본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과 변화를 그린다. 그 이전 세대 여성들이 결혼제도에 의지하여 노후를 보내던 것과 달리, 이들 비혼 여성들이 나이가 들면 '복지의 하위계급'이 될 수도 있다는 부분에 눈이 번쩍 뜨인다. 안타깝게도, 일본의 사회문제는 늘 10년후 우리나라의 문제가 되지 않았던가. 미국이나 유럽처럼 인종이나 이민자와의 갈등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공격의 대상이 내부의 적, 즉 복지 하위계급(250쪽)'이 될 수도 있겠구나. (사실 우리나라 보수언론은 지금도 그런 쪽으로 여론을 돌리고 있기는 한데. 왜 내가 낸 세금을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에게 쓰냐! 이런 식의 반응을 유도하면서. )

 

부모를 부양하는 것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부모의 재산을 가지고 먹고 사는 거예요. 요컨대 여자는 남편의 경제력이나 부모의 재정적 여유, 둘 중 어느 쪽에 매달려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의 시중을 들거나 부모의 대소변 시중을 들거나 하면서. 그런데 재산도 없고 자식도 없는 독신도 등장하겠죠. 정규직으로 계속 근무하면 연금이 있습니다만, 비정규직으로 파트타임이나 아르바이트, 파견 근무일 경우에는 노후에 복지의 하위계급으로 전락될 가능성이 있어요.

- 251쪽에서 인용

 

30대 독신 여성들은 신자유주의 세대입니다. 이 신자유주의는 '자기 결정, 자기 책임'이 키워드입니다. 페미니즘에서 내세우는 '여성의 자립'도 신자유주의 맥락에서 파악하면 '자기 결정, 자기 책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페미니즘도 신자유주의 사상, 즉 '경쟁에서 이긴 쪽' 여성들의 사상으로 재해석되어버리고 맙니다.

- 253쪽

 

우리 세대에서는 선택지가 없었어요. 여자는 모두 한 덩어리로 차별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 쪽에서도 한 덩어리가 돼 연대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해를 공유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어설픈 선택지가 존재하는 탓에, 지혜와 능력을 가진 여자가 그런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다른 여자들과 연대하는 데가 아니라, 다른 여자들을 따돌리는 데 사용해요. 이런 세상에서 페미니즘이 성립할 리가 없는 거죠.

- 254쪽

 

한 대담자는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즉 이론가이고 한 대담자는 현장에서 직접 많은 사례를 접하며 상담한 현장 활동가이다. 전문가 두 분의 이론과 경험, 관록을 이렇게 쉽게 내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되어 기쁘다. 특히 우에노 치즈코(일본에서 열정적인 싸움닭 논객으로 소문난)를 처음 접하는 분들께 강추한다. 대담이어서 부드럽고 유머러스하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보다 편히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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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 (Hardcover, 1st)
Jaspers, Karl / Routledge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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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역사의 기원과 목표> 

 칼 아스퍼스 지음, 백승균 역 /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86.

 

 

 

우선 밝힌다. 나는 이 책을 영어 원서로 읽지 않았다. 리뷰 올리려니 1986년도 번역본이 검색되지 않아 할 수 없이 영어번역본에 올린 것이다. Karl Jaspers(1883-1969)의 원저는 1949년도 독일어판 <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이다. 

 

 

이 책도 참 재미있는게, 여기저기서 언급은 많이 되는데 절판되어 구해 읽을 수가 없다. 도서관에도 거의 없다. (나는 남산 도서관에까지 땀 흘리며 올라 가서 대출해 읽었다.) 그런데도 '축의 시대'관련해서 언급하는 글에 이 책이 꼭 등장한다. (그들은 이 책까지 다 찾아 읽고 그 글을 쓴 것일까? 끝까지 다 읽어보면 이 책 그렇게 위대하지는 않은데? )

 

그렇다, 이 책이 중요한 것은 바로 '축의 시대( die Achsenzeit, 이 책은  '차축시대'라고 번역하고 있다)라는 개념때문이다.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 이전, 그 시대를 언급한 원조가 야스퍼스 선생인 셈이므로.

 

 

이 책은 야스퍼스의 역사철학을 담았다. 주로 서양을 기준으로 삼아 세계사의 도식을 구상해 보고 있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 헤겔, 베버 등 선대 학자들을 종횡무진 언급해서 지금 내 수준에서 읽기가 버겁다.

 

 

이러한 역사관들을 우리는 여기서 이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전체 역사관을 위한 도식을 구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구상은 인류란 하나의 유일한 기원과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신앙적 명제에 기원한다. 우리는 역사의 기원과 목표를 알지 못한다.

- 본문 18쪽에서 인용

 

야스퍼스는 일단 차축시대를 정의 내린다. 차축시대는 인류의 정신적 비상이 응축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는 공자와 노자가 생존했으며 묵자, 장자, 열자 등 중국 철학이 완성되었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가 성립되고 석가모니 부처가 생존했다. 이란에서는 짜라투스트라가 등장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예언자 엘리아, 이사야, 예레미야가 활약했고 그리스에는 시인 호머와 철학자 에라크레이토스, 플라톤 등이 활약했다.  

 

이러한 세계사의 차축은 기원전 약 500년경으로 BC 800년과 200년 사이에 이루어진 정신적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시기가 우리에게는 가장 심오한 역사의 기점으로 되었다. 오늘날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이 바로 그 때부터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를 우리는 요약해서 차축시대(車軸시대, die Achsenzeit)라고 부른다.

- 본문 21쪽에서 인용

 

이 시기, 이 지역의 사람들은(저자는 중국 인도 유럽 사람들을 놓고 말하고 있다) 처음으로 자신을 전체 속의 존재로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참모습을 궁금해 했으며 세계의 공포를 대면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경험하자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전쟁과 가혹한 현실 속에서 해방과 구원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이때 인류에게 다른 사람을 이끄는 정신적 스승이 등장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인류 사유의 근본 범주를 형성했으며 세계 종교를 창조했다. 인류는 아직도 이 시대에 이들 스승이 창조한 틀 안쪽에서 살고 있다. 차축시대는 뛰어난 개개인이 이룩한 업적이 전체 인류에게 영향을 미쳐서 인간 존재를 비약시키는 놀라운 경험을 처음으로 이룩한 시기였다. 현재까지 인류에게 새로운 위기가 나타날 때마다 인류는 차축시대로 회기하여 돌파구를 찾았다. 르네상스나 종교개혁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차축시대의 사실을 실제로 본다는 것과 그러한 것을 우리들의 보편사로서 역사상의 지반으로 획득한다는 것 등은 신앙의 모든 차이성을 초월하여 전인류에게 공통되는 그 어떤 것을 획득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 본문 49쪽에서 인용

 

인간은 4번이나 새로운 근거에서 동시에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1기가 선사시대로서 우리들이 거의 접근하지 못하는 프로메테우스 시기이다. (이 시기에 언어와 도구 그리고 불의 사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시기로 인해서 사람이 비로소 사람으로 되었던 것이다.

2기는 고대 고도문화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3시기는 차축시대로 시작한다. 차축시대로 인해서 사람은 전적인 개방적 가능성에서 정신적으로 참다운 사람으로 되었다.

4기는 과학적 기술적 시대로 시작한다. 이 시기에 접어 들면서 우리는 우리의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 본문 55 ~  56쪽에서 인용

 

 

- 본문 59쪽. 야스퍼스가 설명한 세계사의 도식.

 

이 정도, 이부분까지, 나는 저자의 견해를 거의 수긍하며 읽었다. 그런데 읽어나갈수록 조금씩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차축시대 이후에 전개되는, 위의 도안에 제자리를 차지 못한 민족은 '무(無)역사적 삶'을 사는 '자연 민족 (Naturvolk)'이라 칭한다.  차축 시대를 이끈 중국, 인도, 그리스, 유태, 이란인이거나 아니면 이들의 영향을 받아 발전해간 민족들, 즉 마케도니아, 로마, 게르만, 일본 등등의 민족은 '역사 민족'이라고 한다.

 

모든 민족은 정신적 발현을 경험하는 세계에 기반을 둔 민족과 그런 정신적 발현을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에 기반을 두 민족으로 구별된다. 전자가 역사민족이고, 후자가 자연민족이다.

- 본문 100쪽에 인용

 

이런 견해, 의아하다. 그런데 역사 민족 내에서도 저자는 동양에서 서구를 분리해낸다. 17세기 이후 인도와 중국의 후퇴는 전 인류의 가능성을 위한 위대한 상징과 같은 것(99쪽)이라며 서양에서는 차축시대 이후에도 많은 극적인 새로운 시작이 있었지만 중국과 인도에는 없었다(101쪽) 단언한다. 이후, 이와 같은 견해가 주욱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런 서술이 세계사를 보는 역사 철학인가? 단순 무식한 나는 잘 모르겠다.

 

정신적 발현의 대변혁은 인간 존재를 신성화하는 것과 같다 그 이후의 모든 정신적 발현에 관계하는 것은 그러므로 일종의 새로운 신성화의 작업인 것이다. 정신적 발현 이후 오직 신성을 전수받은 인간과 민족들만이 참다운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였다.

- 본문 102쪽에서 인용

 

수천년을 통해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서 서양은 결단성 있는 전진을 해왔고 단절과 비약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철저한 사고방식을 세계에다 적용시켜 왔으나 동양에서는 중국은 물론이고 인도에서도 그러한 정도의 사실들은 전연 일어나지 않았다.

- 본문 106쪽에서 인용

  

저자는 책의 후반부로 가서, 과학과 기술이 새로운 차축시대를 열었다고 말한다. 그 과학과 기술의 기원은 로마, 게르만 로마 민족에게 유래했으며 이들이 보편적 인류사, 세계사 기틀을 마련했다고 서술한다. 이어 서양 과학 기술에 동화된 민족들만이 오로지 인류사의 결정적인 현실적 역할에 동참하게 되었고 동양은 유럽에서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아아, 지겹도록 많이 들은 이야기다. 왜 근대 이후 서양이 세계사를 주도했는가에 대한 서양 입장의 써머리와 자화자찬.

 

결국, 저자 야스퍼스 선생은 축의 시대 이후 오랜 세기에 걸친 정신적 대립속에서 서구인들은 자기 인식과 투쟁의 과정을 거쳐 자기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것이 역사적 발전이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내가 무식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지금 내 지적 수준에서 보기에, 이 책에서 야스퍼스 선생은 서구인 철학자 입장에서 딱 그 시대에 맞는 수준의 역사 철학을 논한 것 같다. 나처럼 궁금증 대마왕인 독자는 카렌 암스트롱의 <축의 시대>에 언급된 야스퍼스의 견해가 궁금해서 찾아 볼 수 있겠지만, 일반 독자라면 굳이 절판되고 시중 도서관에 있지도 않은 이 책까지 찾아 읽을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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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범우희곡선 35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신정옥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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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이다. 1947년 초연되었으며 1951년 말론 브랜도, 비비안 리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스탠리와 블랑쉬(이 책에는 '블랭취'로 표기되었지만 난 내게 익숙한대로 블랑쉬로 표기함), 두 인물을 생생하게 그려낸 저자의 필력이 대단하다.

 

남부 몰락한 대농장주의 딸인 블랑쉬가 뉴올리언즈에 사는 여동생 스텔라의 집에 찾아온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묘지'라고 적힌 전차로 갈아탄 다음 '극락'에서 내려 찾아온다. 스텔라의 남편 스탠리는 블랑쉬를 달갑잖게 여긴다. 이후 극은 두 남녀 주연 배우의 팽팽한 연기 대결로 이어진다. 농장을 판 돈을 탕진한데다가 자신을 천하게 여기는 것에 분개한 스탠리는 미치와 결혼해 새출발하려는 블랑쉬를 방해한다. 그 과정 줄거리는 이 책 읽으실 분을 위해 생략. 끝내 블랑쉬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황폐하게 만든다. 블랑쉬는 정신 병원으로 가며 마지막으로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연극이나 영화 대사에 종종 인용되는 유명한 대사이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 저는 언제나 낯선 분의 친절에 의지하여 살아왔어요."

 - 본문 216쪽에서 인용 

 

희곡에는 등장인물 각자의 욕망이 득실득실 거린다. 활자로만 봐도 배우들의 땀내가 느껴지는 듯하다. 전등갓, 블랑쉬의 옷과 장신구들, 포커 판, 스탠리의 폭로와 병행되는 블랑쉬의 "나를 믿으면 거짓말도 진실이야"라는 노래 가사,,,, 정교한 장치들이 배치된, 잘 짜인 희곡이다. 대가가 쓴 명작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단번에 든다.

 

역시나, 내가 관심갖은 부분은 시대 배경. 나쁜 방향으로 단점만 극대화된 스카렛 오하라같은 캐릭터를 가진 블랑쉬.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문학이나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남부 출신 여자들 중에는 이런 인물들이 꽤 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있지만 이곳은 원래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의식에 쩔어있는 인물. 과거의 영화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면서 상실감에 젖어 현재는 허영, 환상에 빠져 있는 인물. 가진 것은 자존심밖에 없기에 오히려 자아 도취를 스스로 조장하는 인물. 이는 남북 전쟁 이후 재건법에 의해 반세기 동안 북군의 군정 치하에 놓인 남부의 현실를 반영하는 것일까. 산업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북부에서 내려온 사기꾼 투자꾼에게 농장 처분한 돈까지 날리곤 했던 농장귀족들의 모습이 이랬을까. 반면에 무기력하게 현실적인 힘에 순종하여 생존한 남부인은 스텔라였을까. 남부인들이 보기에 무식하고 천한 노동자로 여겨지던 북부인의 모습을 대표하는 인물이 스탠리였을까. 스탠리는 폴란드 이민자의 후손이고 성은 코발스키(대장장이, 말하자면 스미스 씨)이다. 지구 전체에서 코발스키 성씨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는 폴란드에 있지 않다. 미국 디트로이트이다,,, 란 폴리쉬 유머가 있다. 그 이유는 가난한 폴란드 이민들이 오대호 부근 자동차 공장에 대거 취직했기 때문이다. (영화 <그랜토리노>의 주인공 할아버지를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스탠리는 북부 상징? ,,, 시대 배경, 역사 쪽으로 내게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희곡이다.

 

대학 다니던 시절에 해적판으로 읽은 희곡을 오랫만에 다시 찾아 읽었다. 최근에 어떤 책에서 블랑쉬의 마지막 대사를 친절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랐다. 예전의 내 기억이 잘못 되었던가 아니면 예전의 내가 무식해서 이 희곡을 오해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원전 희곡을 찾아 통독해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희곡 전체의 주제는 물론이거니와, 그 마지막 장면만 떼어 놓고 봐도 전혀 그 대사는 순수하게 친절을 받고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감사하는 대사가 아니다. 본문에 이런 대사도 있다.

 

저는 낯선 사람들하고 수많은 정사를 가졌지요. 앨런이 죽은 후에는 - 낯선 사람들의 애무를 받는 것 말고는 공허한 마음을 메울 수 없었으니까,,,,,, 난 공포에 질렸던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도 날 몰아넣고 보호를 구했던 거예요.

- 본문 177쪽, 블랑쉬의 대사.

 

위 대사만 보아도 마지막 대사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그 마지막 대사가 나오는 상황은, 간호사가 힘으로 끌어내여 병원에 데려가려 하자 안 가려고 버티는 블랑쉬를 의사가 모자를 벗어들고 신사처럼 행동하여 블랑쉬가 스스로 나서게 만드는 장면이다.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블랑쉬는 의사의 팔에 안기며 친절하다고 아양을 떤다. 미치와의 결혼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새로운 타겟을 만난듯.

 

그런데 그 마지막 대사만 떼어 놓고 보면 너무도 훈훈하고 교훈적이어서, 연극을 보거나 희곡을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맥락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함부로 자신의 말이나 글에 사용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이번에 내가 접한 케이스는 좀 심했다. 아아, 할말은 많지만 문제의 도화선이 되고 싶지 않으니, 이만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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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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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추천하는 글은 여러번 봤다. 하지만 그동안 별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최근에 어떤 글벗님 글을 보고서야 마음이 움직여 책을 펴 들었는데, 숨 쉴 틈도 없이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후회했다. 아, 이 책을 좀더 빨리 읽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물론 갑자기 글을 잘 쓰게 되지는 않았겠지만) 좀더 마음이 편했을 텐데. 그동안의 개고생이 떠올라 억울하기까지 하다.

 

블로그에 리뷰를 쓰기 전에 검색해보니 이 책은 이미 3판이고 많은 리뷰가 달려 있었다. 10년 전 나온 책이지만 광고없이 입소문만으로 이런 쟝르의 책이 이렇게 스테디하게 사랑받다니! 블로그에서 조용히 꾸준히 글 쓰시며 몇 년 전에 비해 글쓰기 실력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친구분들은 벌써 이 책을 읽고 이런 자세로 글쓰기를 장기적으로 실천하고 계셨다니,,, 여러가지 생각하고 반성할 점이 많았다.

 

이 책은 문장 쓰기나 책 한권 쓰기 과정에 대한 실질적이고 세세한 팁을 주는 책이 아니다. 글을 쓰는 자세, 삶을 충실히 사는 자세를 말하는 책이다. 물론 별 대단한 내용은 없다. 그냥 써라, 평생 써라, 평생 살아가듯 매일매일 하루를 성실히 사는 자세로 쓰라는 것이다. 그것이 글쓰기이고 삶이라는 것. 천재작가니 뭐니하면서 짜깁기로 자기계발서 같은 글쓰기 책이 많은데, 그런 책들의 내용에 비해 소박하다. 그러나 그게 진실이다. 글쓰기이건 삶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다. 지름길을 찾느니 매일 매일 한 걸음씩 걸어나가면 내가 읽고 쓰고 살아간 삶 뒤로 길이 생긴다. 내 역사가 서서히 이뤄진다. ,,,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이런 깨달음에 이른 것이 최근이다. 그러기에 저자가 나보다 먼저 깨닫고 써 놓은 이 책의 내용이 너무도 맘에 와 닿았다. 진작 읽었더라면 큰 위로를 받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든다.

 

이하, 이 책을 읽으며 저자와 내가 대화한 대목. :

 

실천적으로 글을 쓴다는 의미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충실하게 살겠다는 뜻이다.

- 17쪽

(맞아요, 전 좋은 작가이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두 달 전에 꽤 괜찮은 글을 썼다고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쓴다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글을 써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 19쪽

(그러게요, 언제나 새롭게 새 글을 써야하고 언제나 새롭게 절망해야 하는 것이 우리 운명이죠.)

 

우리는 글이 안 써질 때도 무조건 계속해서 글을 써야만 한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죄의식과 두려움,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글을 쓸 수 있는 시간만 있다면, 어떤 글이든지 쓰겠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 55쪽

(그래요, 무조건 써야 해요. 가만 앉아서 영감아 떠올라라, 하면 기욤 영감님만 오더라고요. 일단 써야 그 내용에서 영감이 꼬리를 물고 솟아나더라고요. )

 

습작 시절부터 '자기 속의 작가'를 내면의 편집자 또는 검열관과 분리시키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래야만 작가가 자유롭게 호흡하고, 탐험하며 표현할 공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56쪽

(저는 이게 힘들어요. 제 안의 검열관 엘사가 자꾸 제 타이핑하는 손가락을 얼려 버려요. 렛 잇 고 ~ ) 

 

작가란 결국 자신의 강박관념에 대해 쓰게 되어 있다. 자주 출몰해서 괴롭히는 것, 절대 잊을 수 없는 것, 자신의 육체가 풀려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이야기로 엮는다.

- 78쪽

(헉, 자신의 육체가 풀려나기를,,,, 그래서 제가 요즘 그레이에 꽂혔나요? 부끄부끄 ~ )

 

사람들은 글쓰기가 육체적인 노동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글쓰기는 생각하는 행위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중략)

그러므로 글쓰기 훈련은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까지 중간에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써 내려가는 것, 끊임없이 글쓰기를 방해하는 생각들을 육체적으로 물리쳐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 94 쪽

 (그러게요. 글쓰기가 육체 노동이더라고요. 우린 키보드 노동자죠. 좋은 글은 몸 컨디션이 좋을 때 나오더라고요. 밤 새 커피 한 드럼 마시며 글 쓰는 작가 이미지는 다 뻥이야!  작가 생명 단축의 지름길이야!)

 

글쓰기 속에 몰입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차단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세상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한 몰입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균형을 잡는 데는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125 쪽

(아, 마님. 이 문장 참 좋아요. 저는 예술 지상주의자들보다 정당한 현실 발언을 하는 작가들을 존경해요. )

 

우리는 앞서 있었던 모든 작가들의 짐을 나르고 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역사, 이념 그리고 대중문화 모두를 끌어안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글쓰기 안에 용해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 136 쪽

(많이 읽고 보고 듣고 경험해 보면 다 내 글 안에서 큰 자산이 되더라고요. 남자는 도망가도 내가 경험한 것들은 끝까지 나와, 내 글과 함께 있죠! 그리고 나는 역사 속의 개인이죠.)

 

예술가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존재라는 생각 같은 것은 떨쳐 버려라.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고통스럽다. 자신만이 고통스럽다고 생각해서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이유는 없다.

- 138 쪽

(와우, 이거였어! 힘들 때마다  별나게 굴지 말고 징징거리지도 말자, 어차피 1인분의 인생이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요. 이 문장을 좀더 빨리 만났더라면 제 미모가 이정도로 망가지지는 않았을텐데! )

 

자신의 글쓰기를 너그럽게 받아들이라.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인내심과 유머 감각을 키우라. 의심이라는 생쥐에게 갉아먹히지 말라. 훈련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잃지 말고 저 너머에 잇는 광활한 인생을 바라보라.

- 175 쪽

(흠, 유머 감각이라면 저는 이미 대가급일걸요? ㅋㅋ) 

 

만약 하루도 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계속 글쓰기에만 매달리고 있다면, 잠시라도 완벽한 휴식을 가져야 한다. 글쓰기와는 완전히 다른 일을 시작해 보라.

- 210 쪽

(그래서 제가 폴댄스와 발레를 배웠죠. 요새는 김치도 담궈요. 글쓰기를 놓고 다른 몸쓰는 일을 하면 심신이 이완되며 아이디어가 팡팡 터지죠. ) 

 

작품을 평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간을 두고 읽어보는 것이다. 만약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잠시 미루어 두라. 그리고 6개월 후 다시 작품을 읽어 보라. 무언가 더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중략)

만약 6개월이 지난 후 다시 읽었을 때에도 작품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낙담하지 말라. 당신이 쓴 좋은 부분은 이미 당신을 위한 퇴비가 되기 위해 발효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무언가 좋은 것이 되어 밖으로 나올 것이다. 인내심을 가져라.

- 251 쪽

(그러더라고요. 퇴고는 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해야 제대로 자신 글의 장단점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몇 달이 지나 다시 봤을 때 자기 글이 쓰레기같아 보이면 절망할 필요 없어요. 그건 성공한 거죠. 그동안 내 눈이 더 높아져서 기존의 내 문제가 객관적으로 보일 정도로 내가 성장한 것이니까요. )

 

산만한 정신을 뚫고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훈련이다.

- 259 쪽

(자주 산만해 지지만, 말씀대로 지속적으로, 제 표현으로는 '걍' 글쓰는 것이 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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