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나름 분석하다가, 이게 걍 낭만적 사랑과 결혼, 결혼과 성이 일치된(일치되기를 꿈꾸었던) 빅토리아 시기 가족과 성애의
새로운 버전일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을 글로 정리하자니, 자본주의와 섹슈얼리티, 근대 가족 성립 쪽으로 더 공부해야겠다는
절박함을 느꼈다. 일단, 우에노 치즈코부터. 얊고 대중적인 책부터.
책은 300쪽이란 얇은 분량 안에 집약적으로 여성 혐오의 역사와 현실(일본 현실)을 풀어낸다. 주로 일본 문학이나 사건, 인물 역사를 예로
들기 때문에 좀 이질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다. 게다가 이 분 서술이 좀 과격하다. 뭐 나야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다(65쪽)'같은 서술이 유쾌
상쾌 통쾌했지만. 사실 내가 혼자 대강 생각하던 이야기를 이 분이 알아서 명확하게 해 주시니 뭐 그저 고맙기만 하다. ( 이제 내게 시비거는
아저씨들 만나면 걍 이 책을 권해주고 난 그 자리를 피해야겠다.)
아래는 목차이다. 목차만 봐도 대강 내용이 짐작될 것이다. 요약한다는 건 의미가 없고, 걍 남성이든 여성이든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2015년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여성 혐오가 현실의 본질적 문제를 은폐하는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다들 이야기나눴으면
좋겠다.
제1장 호색한과 여성 혐오
제2장 호모소셜, 호모포비아, 여성 혐오
제3장 성의 이중 기준과 여성의 분단 지배 ―'성녀'와 '창녀'의 타자화
제4장 비인기남과 여성 혐오
제5장 아동 성학대자와
여성 혐오
제6장 일본 황실과 여성 혐오
제7장 춘화와 여성 혐오
제8장 근대와 여성 혐오
제9장 어머니와 딸의 여성 혐오
제 10장 '아버지의 딸'과 여성
혐오
제11장 여학교 문화와 여성 혐오
제12장 도쿄 전력 OL과 여성 혐오 part 1
제13장 도쿄 전력 OL과 여성
혐오 part 2
제14장 여성의 '여성 혐오' / '여성 혐오'의 여성
제15장 권력의 에로스화
제16장 여성 혐오는
극복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여성인 내 입장에서 여성 혐오가 자기 혐오가 된다는 부분을 설명한 부분이 인상깊다. 내가 느끼는 자아 분열, 자기 기만, 모순적
감정의 뿌리를 알고 나자 해방감이 든다. 어머니와 딸 부분도 지금 내 입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아, 좀더 빨리 나 자신과 화해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남성의 여성 혐오는 타자에 대한 차별인 동시에 모멸이다. 남성은 여성이 될 걱정이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여성을 타자화하고 차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성에게 있어 여성 혐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된다. 자기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회적 약자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비슷한 '범주 폭력'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범주는 지배적인 집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156쪽에서 인용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있어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었다. 남성에게도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길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 여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기 혐오'와 싸우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제시하는 것은 더 이상 여성의 역할이 아니다.
- 본문 304쪽에서 인용. 인용한 마지막 문장은, 문맥상 '여성만의 역할이 아니다'이다.
몇 달전에 거다 러너의 <가부장제의 창조>를 읽었으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책에서 설명하는 가부장제의 기원이 너무 잔혹했고,
내 감성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막혔던 부분이 뚫렸다. 최근 읽은 알베르토 안젤라 책에서 로마 남성들의 성의식
부분도 '호모 소셜, 호모 포비아, 여성 혐오'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튼, 잡스럽게 읽어두면 어느 순간 점잇기 게임이 되어
순식간에 그림이 완성되기는 하는구나. 이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아담 이브 뱀>으로 넘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