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때 일이다. 외대 후문 쪽에서 알바를 했다. 집도 학교도 그쪽이 아닌데, 친구가 하던 자리를 이어받아 하다보니 장장 6개월 동안 1주에 6일은 외대에 가게 되었다. ( 여담인데, 그래서 나는 내가 1/8 외대생이라고 생각한다. 여튼 한 학기를 다녔으니까. )
지금도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데 대학생이던 그 시절은 오죽했을까. 그렇다, 오죽했다. 알바하다 쉬는 시간에 후문 쪽 분수대에서 커피 마시거나 학생 식당에서 짜장면 먹고 있으면 왜들 그리 '대시'를 해'대시'는지, 원. 취향도 독특해. (여담인데, 남자들아, 제발 입가에 짜장 묻히고 있을 때는 말 좀 걸지 말라구. )
그중 한 남자가 계속 내가 알바 출퇴근하는 길목을 얼쩡거리며 말을 걸었다. 외대역까지 쫄쫄 따라 오곤 해서 짜증이 났다. 무시하고 지나치던 어느날, 그가 길에서 내 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밥 한 번만 같이 먹어달라고. 다시는 안 따라다니겠다고.
좋다! 식당으로 안내하라, 남자여.
그는 외대 정문을 등지고 지하철역으로 향했을 때 대로 오른쪽 길로 걸어갔다. 무슨 경양식집이었다. 칸막이로 테이블이 분리되어 있었다. 인테리어는 원목과 하얀 회칠벽으로 되어 있었다. 어딘가에 하이디가 잠자는 다락방도 있을 것 같았다. 하이디네 염소같은 표정으로 메뉴판을 들여다보더니, 그는 정식인지 돈까스인지를 2인분 시켰다.
지금도 박력 넘치고 괴팍미 뿜뿜하는데, 20대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그렇다, 나는 오죽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첫 데이트에 성공한 기쁨을 천천히 누리려는 대시남은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맹렬하게 청룡언월도를 휘둘러 고기를 썰고, 삼지창을 이용해 입으로 날랐다. 마지막 고기 한 점을 삼키는 즉시 얼른 후식 커피를 달라고 소리쳤다. 뜨거운 커피를 원샷!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됐지? 나 간다. 앞으로 귀찮게 굴지 마!"
대시남이 화를 내며 말했다. "먹고, 그냥 튀게?"
파바박, 머리가 돌아갔다. 이 남자가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 이 새끼가, 나를 돈 주고 산 것으로 여기고 있구나. 지가 밥을 샀으니 여자인 나는 얻어먹고 웃어주고 애교떨며 자기 즐겁게 해 주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너에게 쓴 돈값을 하라니, 감히 내게?
나는 군말 안 하고 카운터로 가서 2인 밥값을 계산했다. 반도 안 먹은 돈까스 접시를 앞에 두고 당황해하는 돈까스남을 버려두고 뒤도 안 돌아보고 지하철역으로 갔다.
다음날, 돈까스남은 또 나타났다. 약속과 다르다, 왜 나타났냐고 물었다. 그가 뇌맑게 웃으며 말했다. "대개 여자들은 얻어 먹는데, 너는 내 밥값까지 내 준 것으로 보아 내게 호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또 왔다. "
그 이후 오랫동안, 돈까스만 보면 그 남자 생각이 나서 화가 났다. 그러나 후진 남자의 상처는 새 남자로 치유하는 법. 내게 돈까스만 보면 생각나는 다른 남자가 생겼으니,
바로 17세기 루이 13세 시절 프랑스 총리이던 리슐리외 추기경. 뒤마의 소설 <삼총사>를 보면, 결투를 하려드는 달타냥과 총사들이 리슐리외의 근위병에게 체포당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리슐리외는 1626년 결투 금지령을 내렸다.
결투금지령 외에도 리슐리외가 결투를 막는데 기여한 사실이 더 있다. 리슐리외는 식사용 나이프의 끝을 둥글게 깎으라는 명령도 내렸다. 이전에는 식탁용 나이프와 일반 나이프의 구분이 없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며 식사하다가 다툼이 생기면 바로 식탁에 있던 나이프를 들고 칼부림을 하곤 했다. 이런 문제를 줄인 리슐리외형 나이프는 곧 프랑스 귀족 집안에, 오랜 시간이 지나서는 프랑스 전체와 유럽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칼싸움 방지 목적도 있지만, 식사 도중에 나이프를 들고 이를 쑤시는 손님을 보고 경악해서, 라고도 한다.
여튼, 나는 자라서 역덕이 되었기에, 이제 돈까스를 먹을 때는 그때 그 대시남이 아니라 리슐리외 추기경을 생각한다.
아, 리슐리외 당신, 식사용 나이프의 끝을 둥글게 만든 것, 정말 잘 한 일이었어요. 만약 여전히 나이프가 뾰족했더라면, 아마 저는 그때 그 돈까스남을 ,,,, 그랬더라면 역사 에세이 작가가 된 지금의 저는 없었겠죠. 그리고 이렇게 제 책 광고도 못 했겠죠.
삼총사와 리슐리외의 갈등, 결투 금지와 식사용 나이프 등등, 흥미진진한 서양 명작과 역사 배경 이야기가 담긴 책,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가 개정 증보판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초판 원고에서 역사부분을 보강하고 전체적으로 손 봤습니다. 여기에 쓴 리슐리외형 나이프 이야기는 삼총사 편에 새로 들어갑니다. 기존 박스 기사에서 좌측통행 우측통행 이야기를 빼고 넣었습니다. 돈까스남 대신 제게 많은 사랑을 주시길 기대합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쓴 책 신간 광고입니다.
알라딘에 근래 글을 자주 안 썼는데, 오랫만에 와서 대놓고 광고하기 죄송스러워서 수다부터 떨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