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식동물의 딜레마>로 유명한 마이클 폴란이 집 뒤뜰에 혼자만의 집필실을 스스로 지어가는 이야기이다. 친한 건축가와 목수의
도움을 받지만 대부분 자신이 육체노동을 해서 짓는다. 책은 집짓기 순서를 따라 집터, 설계, 골조, 지붕, 창문, 마감,,, 순으로 구성된다.
밥을 짓다, 옷을 짓다, 집을 짓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와 관한 노동에 쓰는 동사는 '짓다'이다. 글도 '짓다'인데, 이것 참
구미가 당기구료,하면서 뭔가 수렁에 빠진 내 글쓰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싶어 가볍게 찾아 든 책이다. 그런데 펴자마자 머리말에서부터 강력한
감동의 물결이 밀려왔다. 강적을 만났다.
건축가들은 이상과 현실의 경계 지대에서 일하며 아이디어의 조각들을 실제 구현 가능한 형태의 것으로 번역해 내고, 또 목수들은 뛰어난
손재주로 현실 속에 유형의 산물을 더한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속에서만 겨우 통하는 창작물을 만드는 작가들에게 있어, 이런 물적 형태의
창출은 격한 질투심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같은 글쟁이에게 '건축'이나 '목공'이라는 단어는 그저 우리의 짧고 덧없는 창조를 치장하기 위해 쓰는
허세 가득한 비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왜 무언가를 직접 지어 볼 결심을 하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밤을 지새워 답을 해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만드는 사람'
곧 호모 파베르의 세계에 몸담아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주 잠깐만이라도 언어라는 허상의 세계를 떠나 있고 싶은 마음 말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컴퓨터 스크린 앞에 앉아 바깥 자연 세계와는 동떨어진 채 일하고 있는 나의 추상적인 삶에 말하자면 해독제가 절실했다. 또 슬슬 중년에
접어들면서 권태기가 왔던 것 같기도 하다.
- 머리말에서 인용
이렇게 책 내용은 중년의 권태에 시달리는 전업 작가로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 집 짓기와 어우러진다. 미국 역사나 중세 서양 역사와 건축 관계
서술 부분의 경우, 이런 식의 접근을 좋아하는 내게 매우 고급스런 읽는 맛을 주었다. 아래, 맛뵈기 문장을 인용한다.
실제로 초창기 식민지 시대의 창문은 유리에 비해 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높고 빛도 거의 들지 않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리고 했다. 청교도와 중세 기독교 교리에서는 실내라는 성역과 외부 세상의 불경스러움을 칼같이 구분해 왔다. 창문
너머의 세계에 그토록 많은 부정이 도사리고 있다면, 창문은 최대한 작고 잘 열리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 368쪽 제 7장 창문 중 '창문과 투명성' 꼭지
집 짓는 과정와 건축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을 건축 관련 책 이야기와 같이 풀어가가는 방식 자체도 흥미로웠다. 집짓기에 대한 서구의 유명
도서는 다 섭렵하고 언급한다. 집과 생활 환경과 삶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소로우 선생이 많이 인용된다. 그렇다고 책이 지나치게 진지한
흐름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아니다. 틈틈이 프랭크 로이드 등 유명 건축가들의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은근 웃기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클라이언트가 비 새는 것에 대해 항의했더니 이렇게 말했단다. "어휴, 예술 작품을 비 내리는 데 방치해 두니까 그런
거죠." 예술을 위해 불편함을 기꺼이 견딜 줄 아는 자세가 무슨 모던 건축의 전제처럼 되어 버렸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 353쪽 7장 창문 ' 안으로 열리는 창문'
저자 주변 사람들 이야기도 재미있다. 현장 작업을 돕는 육체 노동자 조와 책상에서 도면으로 일하는 건축가 찰리, 두 남자와 유치하게
기싸움하며 티격태격하는 에피소드를 읽다보면 막 웃음이 나온다. 그러다가도 또 저자는 진지해진다. '물을 막기 위해 설계자는 스스로가 물의 입장이
되어 생각을 해봐야 한다(349쪽 창문 '안으로 열리는 창문)'등 아, 하는 깨달음을 주는 문장도 곳곳에 있다. 도대체, 이 책의 정체가 뭔지
모를 정도로 매력만발!
다 읽고나니 무언가 쫓겨 부글거리던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이 저자처럼 스스로 몸을 움직여 무언가 실제적인 것을 짓고 경험하면서 내 사고를
확장시키고 다시 내 글을 지으며 살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