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전 雙典 - 삼국지와 수호전은 어떻게 동양을 지배했는가
류짜이푸 지음, 임태홍.한순자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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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출간 당시에 관심을 가졌으나 사 읽을까 말까 살짝 고민했다. 책 소개글이나 블로거분들 리뷰만 읽어 봐도 뻔한 내용일 것 같아서였다. 미루고 미루다가 반 년 만에 사 읽었는데 역시나 내용은 뻔했다. <삼국지><수호전>을 '쌍전'이라 칭하며 이들이 중국인의 심성과 중국 문화에 끼친 악영향을 거품물고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수호전>은  지나친 폭력성이, <삼국지>는 권모술수의 집합체인 것이 문제란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어려서는 <수호전>을 보지말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보지 마라.'는 말도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비단 중국 뿐이겠는가. 이웃한 우리나라나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왜 <삼국지>가 중고교 논술 필독서인지 이해가 안 간다. 다양한 인물 군상을 만나는 재미가 있어서<삼국지>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나는 늘 <삼국지 연의> 자체의 가치관도 그렇고, 평역자에 따라 주입되는 가치관도 영 꺼림칙했다. 그러나 이 책의 필자처럼 이 쌍전을 '대재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독자들의 두뇌가 그렇게 단순할까? 저자의 이런 견해는 폭력 영화 때문에 살인범이 양산된다는 논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고대, 중세에 전승되어 기록된 문학의 경우 대부분이 폭력적이며 현대 우리의 가치관에 맞지 않는 내용들을 담고 있지 않은가. 그건 그 시대의 특성이다. (쌍전 저자 식으로 생각하면 기독교의 <성서> 중 창세기도 폭력음란물이게? ) 그리고 저자는 자신의 의견에 대한 근거도 명확하게 대 주지 못한다. 그저 쌍전의 본문 내용 인용 뿐이다. 정말로 쌍전이 중국인의 가치관에 그런 악영향을 미쳤다면 텍스트 인용보다 이와 직접적 관련된, 인과 관계가 드러난 사건사고의 예를 들어 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저자는 아니지만 서문을 쓴 린강이라는 사람이 든 예는 정말 웃기다. <삼국지>에서 배운 권모술수로 후금이 명 황제 숭정제로 하여금 명나라 장수 원승환을 죽이게 이간질하여 명을 멸망시키고 청나라를 세웠다는데, 그럼 그토록 <삼국지>를 읽고 많은 영향을 받아온 정통 한족 명나라 사람들은 왜 그런 권모술수에 쉽게 넘어갔을까나? )

 

책 자체 내용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이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두서없이 한 생각들.

 

이 책을 읽으면서 꽤 흥미로운 독서체험을 했다. 이 텍스트 한 권을 통해 층층이 여러 입장들이 계속 읽혔다. 저자가 한 줄로 쓴 내용 안에 한 문단의 숨은 내용이, 객관적 사실 진술로 보이는 표현 아래 저자가 서 있는 편파적 입장이 보이는 것 아닌가. 마치 영화 <인셉션> 처럼 한 꿈에서의 작은 충격이 꿈 속의 꿈에서는 더 큰 충격으로 나타나는 것 처럼 말이다.

 

일단, 나는 저자가 <홍루몽>전문가이기 때문에 <삼국지>와 <수호전>보다 <홍루몽>을 높이 평가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저자를 통해 현대 중국 지식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자가 중국 문화를 원형 문화와 위형(僞形)문화로 나누고 쌍전보다 <홍루몽>과 <서유기>를 더 높이 평가하는 근거를 중국 고전 <산해경>에서 찾는 점에 관심이 갔다. 중국 근대 지식인들은 공자 이전 고대 중국문화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시대탓인지, 양무운동 시기를 거쳐 20세기 초까지 양계초나 루쉰같은 중국 근대 지식인들은 중국 전통문화와 국민성을 흑백논리로 나누어 흑에 속하는 쪽을 엄격히 배격하는 경향이 있는데, 2000년대의 이 저자 또한 그러한 100년전의 사고를 그대로 답습하는 듯했다. 여기에서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자국 문화나 민족성의 바람직하지 못한 측면까지 인정하고 객관적으로 더 큰 틀안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저자는 왜 이런 저럼한 수준으로 자국의 고전과 자국민의 민족성을 비판하였을까? 아직까지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의 패배와 중화의식을 훼손당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만청을 비판하는 한족 지식인의 시선도 보이는데 왜 그럴까?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을 떠나 집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1980년대 지식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정체된 외부자의 시선으로 조국을 비판하게 된 것일까? 혁명과 패거리 문화를 비판하는 것은 공산당 비판일까? 등등,,, 그리고 이 저자의 서술에 기본 배경지식으로 등장하는 내용이 기본 중국독서인들의 상식이라면, 이를 보고 이해하는 나의 지식 수준은 어느 정도이며 이들 중국 지식인의 '포즈'를 파악하는 나의 시선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등등. 아놔, 머리 아파라. 이 책은 책 내용 자체보다 다른 측면에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 주는 책이었다. 그러니, 이 책은 돈 주고 사 읽은 값은 정확히 한 셈이다.

 

지금 나도 걱정이다.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이렇게 쓰는 나를 보면서, 이 리뷰를 읽는 당신은 나보다 한 단계 높은 층에서 얼마나 나의 후진 지식과 가치관을 어떻게 층층이 파헤쳐 볼지. 아놔, 창피하다. 그래도 일단 쓴다. 제발 한 반 년 후에 내가 이 리뷰를 보고 얼굴 화끈 달아오를 만큼 발전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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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중국사 5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 엮음 / 지식산업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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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좌 중국사> 시리즈는 중국사에 관심있는 독자들의 필독서이다. 기본적인 중국사 지식을 갖춘 사람이 좀더 깊이 한 주제에 대해 알기를 원할 때 읽으면 딱 좋다. 이번 제 5권은 중화제국의 동요란 제목 아래 네 편의 논문이 묶여 있다. 각 논문의 제목과 필자의 이름, 간추린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제1, 2차 중영전쟁 / 배고렬
- 제 1, 2차 중영전쟁(아편전쟁과 애로우호 사건)은 불평등 조약체제의 확립과 확대, 심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 전쟁 결과 중국은 반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며 이때부터 반제 투쟁이 중국 근대화의 주요 과제로 등장한다. 한편 전쟁 결과 중국내 개혁의 필요성을 불러 일으켜 양무운동의 시발점을 제공하기도 했다.

 

2. 태평천국과 염군 / 김성찬

- 태평천국운동은 청조뿐만 아니라 전통적 질서에 대한 저항을 보여준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소외된 한인집단이 모여 다양한 성격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종교적 혁명운동이었기에 비타협적이고 폭력적 투쟁 방식을 선택하였다. 청조의 체제 유지적 개혁을 자극했다.

 

3. 양무운동의 성격 / 박혁순

- 태평천국과 아편전쟁으로 초래된 내외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운동이었지만 붕괴되어가는 청조와 천하질서의 재건을 시도한 운동으로서 청일전쟁 패배로 이 개혁의 한계가 드러난다.

 

4. 중화제국질서의 동요 / 최희재

- 조공관계를 기본으로한 중화제국의 정치질서는 중영전쟁 패배후 도전받는다. 변경지역의 혼란을 틈타 영국 러시아 등의 열강이 중국 주변에 대한 진출에 나서게 되자 중국 주변 조공국들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된다. 대만 사건을 거쳐 청불 전쟁, 청일전쟁으로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정치질서는 붕괴한다.

 

1,2,3장에서는 관련 주제와 관련해 그동안의 연구 동향을 정리해 주고 시작하는 점이 특히 좋았다. 서구 학계와 중국 학계, 중국에서도 대륙과 대만 학계의 견해 차이, 또 우리나라나 일본 등 관련 인접국 사학계의 입장까지 간략히 정리되어 있어 나같은 초보 독학자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학생 시절 보던 책인데 정말 오랫만에 다시 읽으니 만감이 교차한다. 당시 집필자로 참가했던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의 석사 또는 박사과정 연구자들이 이제 강단에 자리잡아 왕성히 자신의 저서들을 내놓고 있는 것을 보니 시간의 흐름을 실감하겠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으니 1980년대 중반까지의 연구 성과만 정리되어 있어 좀 올드 패션드한 느낌도 있다. 그러나 기본 사건의 전개과정 정리가 잘 되어 있으니 이는 큰 흠이 되지 않는다. 중국사에 관심 있는 분들께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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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이산의 책 1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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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康熙帝)는 순치제에 이은 대청제국 2대 황제이다.  8세에 제위에 오른 후 1661년부터 1722년까지 61년간 최장기간 중국을 다스렸다. 그는 한족에 대한 만주족의 통치를 완성했으며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3대에 이르는 강건성세, 청의 전성기를 연 황제였다. 장수를 보내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타이완을 점령하는 한편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서북 변방지역(준가르, 갈단) 정복 전쟁에 나서 현재 중국의 강역을 성립시키기도 했다. 그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군주였으며 각 분야에 걸쳐 문화 사업을 지원하였다.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주는 한편 주접제도라는 1대1 직통 비밀통신체계를 통해 지방 관료들의 부패와 태만을 직접 감시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정조를 합친 이미지라고나 할까. 그래서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인물을 저자는 흥미롭게도 사학자답지 않은 새로운 방법으로 조명한다. 즉, 강희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지난 삶과 가치관을 회술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이런 형식으로,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이 유명하다) 어지간한 자신감과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감히 시도조차 못할 일. 저자는 학자로서 당연히 알고 있었을 강희제의 삶을 재구성하고 그 당시 그가 가졌을법한 생각, 그가 느꼈을 법한 느낌을 그가 생전에 남긴 실제 편지와 유조를 통해 그의 어투를 복원해 독자에게 들려준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290년을 건너뛰어 정복 왕조의 수성을 꾀하는 한 왕이 사냥을 통해 선조의 기상을 어떻게 유지하려 애썼는지, 자신의 신민들을 어떻게 공정히 다스리려고 노력했는지, 세상의 지식과 인간의 도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비록 천자이지만 늙어 약해가는 일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몸을 어떻게 돌봤는지, 그리고 세상을 다 다스려도 결코 자식들은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었던 한 아비로서 아들들의 후계자 분쟁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대청제국의 늙은 황제에게 직접 듣는 호사를 누렸다. 즐거웠다. 아,,,갈수록 스펜스 교수에게 빠져들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끝 부분에서 "한 시간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한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향기와 소리와 계획과 분위기로 가득 찬 꽃병이다."라고 했고, 이어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순간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감각과 기억 사이에서 나타나는 조화로운 관계이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한 사람의 역사가인 나로 하여금 기가 질리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그 꽃병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단편적이고 제멋대로 널려 있는 사료들 때문에 결코 '조화로운 관계'를 포착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가 질린다는 것은 핵심에서 빗나간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내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고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강희제를 다시금 찾아내는 한 그는 이 책 속에 살아 있다.

- 본문 43쪽에서 인용

 

위와 같은 매력적 문장으로 독자인 나를 질리게 만든 이 책은 강희제와 청 초기 역사에 대해 연대순으로 배경 설명은 하지 않는다. 저자는 강희제의 내면 세계를 그리는데 주력한다. 그러므로 어느정도 배경 지식이 있는 독자가 보아야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 같다. 얇팍한 지식을 가진 나로서는 이 책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곧이어 강희제의 준가르 정복을 다룬 <중국의 서진>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참, 원래 중국 황제들에 대한 개인적인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한다. 강희제의 경우, 상자 안에 봉해진 편지가 자금성 안에 있다가 신해혁명 이후 발견되었기에 남아 있는데,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한 왕조가 멸망하고 다음 왕조가 성립하는 식으로 역사가 진행되었다면 이런 일상적인 문서는 다음 왕조의 관찬 역사서가 출판되자마자 파기되어 없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기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혁명 후, 공화국이 된 중화민국의 사학자들은 그들의 선배 역사가들에 비해 얼마나 행운아인가! 나는 이런 점도 기본적인 이 책의 독서와 더불어 매우 흥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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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중국사를 말하다 - 문명과 야만으로 본 중국사 3천 년
줄리아 로벨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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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국인 아닌 서구인 저자가 중국인들이 자랑하고 세계인이 찬탄하는 만리장성의 허구성을 서술한 대중역사서이다. 절판이어서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맘에 들어 헌책방 검색해서 구입해 읽었다.

 

중국 역사 특징 중 하나는 농경정착 한족과 유목민 비한족의 갈등이다. 중국의 이러한 오랜 갈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조물이 바로 만리장성인데, 중국 측에서는 호전적인 유목민족에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리장성을 쌓았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는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두려워하다 보니 그들을 야만족으로 폄하하고 배격한 증거이다.

 

또한 장성은 오랑캐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중국인들을 외부의 영향이나 교류로부터 격리시키려든 중국 역대 지배계급의 속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장성은 진시황 시절 만리에 걸쳐 완벽하게 건설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왕조에 걸쳐 장성을 보수, 쌓은 것도 아니다. 오직 진, 한, 북위, 수, 그리고 명나라만이 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그 시기의 중국은 오히려 군사력이 약하고 국내 정세가 불안했었다. 그러나 알탄 칸, 만주족의 도르곤, 최근에는 일본군까지 외부 세력은 장성을 뚫고, 돌아, 내부 공모자가 열어주는 문으로 당당하게 장성을 돌파, 베이징으로 행군하곤 했었다.

 

하지만 명 시절 베이징에서 일하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이후의 서구인들에 의해 장성은 뭐가 위대한지 중국인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The Great Wall"이 되어 중국 외에 알려진다. 달에서 보이지 않는데도 달에서도 보인다는 장성은 신화가 되어버리고, 이를 모택동은 체제 유지를 위해 충분히 활용한다. 그는 장성이 아니라 '닫힌 중화주의'를 보수한 것이다.

 

젊은 영국 학자인 저자는 이러한 오만과 허구의 역사를 통쾌하게 파헤친다. 현대의 만리장성은 중국 당국이 검열하는 인터넷 방화벽이라는 지적이 날카롭다. 저자는 중국 뿐만 아니라 서구 제국주의도 공평하게 비판해 준다. 한번 정도 읽을만한 책이다. (내 경우에는 읽다보니 꼭 만리장성과 중국인의 배타적 중화주의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의 모든 실리를 둘러싼 거짓 선전을 포장하고 있는 신화와 명분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

 

여튼, 한 마디로 이 책의 주제는 중국의 만리장성은 오만이 쌓은 오만리 장성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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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9
임현치 지음, 김태성 옮김 / 실천문학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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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평전을 읽었다. 사후 8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중국의 학자들이 자신의 글에 루쉰의 글을 인용할 정도로 루쉰은 가치의 척도로 인정받는 작가이다. 혁명가이자 문학가로서 격동기 중국 현대사에 이 정도 거인이 없다는 것은 뭐 다들 인정하는 사실이니 루쉰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이 책에 대한 것만 간략히 적겠다.

 

이 책은 중국에서 루쉰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는 임현치 선생의 세번째 루쉰 평전을 번역한 책이다. 임현치 선생은 두번째 평전의 오류를 바로잡아 세번째로 이 책을 내었다하니, 도대체 언제까지 루쉰 평전을 내실지 알 수 없다. 평전의 주인공인 루쉰 선생도, 평전을 쓰신 임현치 선생도 존경스럽다.

 

책은 루쉰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시간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다. 평전이지만 열렬한 찬사와 의미부여는 없다. 담담하게 루쉰의 행적과 저술 내용, 논쟁을 요약해서 들려줄 뿐이다. 저자는 지나치게 개입해서 해석하지 않는다.  '루쉰은 혁명을 흉내내는 사람이 아니라 천성적인 혁명가였고 영원히 현실에 맞서는 사람이었다.(- 58쪽에서 인용)' , '권력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저술을 통해 근본적으로 권력에 대항하는 것이 그의 노선이었다. (- 136쪽에서 인용)' 이 정도의 밋밋한 평가를 내린다. 그래서 좋다.

 

1,2부에는 어느 정도 전기적 상황 서술이 보이지만 3부는 상해 정착 이후 논쟁 과정 위주로 되어 있어 좀 지루하다. 루쉰 선생의 판화 이야기도 없다. 저자는 문필 관련 활동에만 촛점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관심있는 루쉰의 두번째 부인 쉬광핑(허광평)에 대한 부분 서술이 조금밖에 없어 아쉬웠다. (그런데 쉬광핑이 루쉰 내조만 하고 외적 활동이나 집필 포기하는 대목에서 '허광평은 노신의 이런 생각에 순순히 따랐다,''이는 그녀가 원한 일이기도 했다.'라고 서술한 부분을 보니, 사악한 나는 "그건 아저씨 말이고! 허광평 마음 속 생각은 들어나 봤나?"하고 외치고 싶어진다!)

 

이 책에는 당시 중국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은 아예 없다. 저자분은 자국민 독자들은 당연히 아는 역사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쓰신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12.9 운동이다.'라고 들입다 써 버리시니,,, '허광평이 호랑이 꼬리에 간다'라고 아무 전후 설명 없이 서술해 버리시다니,,, 이 '호랑이 꼬리'가 베이징 시산티아오에 있는 루쉰의 서재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 다들 알까? 어느 정도는 좀더 친절한 역자 주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렇듯 이 책은 어느 부분은 우리나라 독자들이 읽기에는 대략 난감일 수도 있는 책이다. 루쉰 뿐만 아니라 관련 문예운동가들의 사진이 많은 점은 좋았다.

 

여튼, 생각 외로 루쉰 선생의 작품에는 소설 창작보다  외국 소설 번역 작품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끝까지 세계와 팽팽히 대결하는 혁명가의 길과 근면한 작가의 길을 동시에 치열히 걷다 가셨다는 것도 인상 깊다. 아래 유언은 정말 읽는 사람을 숙연하게 만든다.

 

물론 이 외에도 할말이 있었지만 이미 잊어버렸다. 다만 열이 몹시 날 때면 유럽인들은 임종시에 흔히 남이 너그럽게 용서해줄 것을 바라며 자신도 남을 너그럽게 용서하는 의식을 지낸다는 사실이 기억날 뿐이다. 나의 적과 원수는 적지 않은데 신식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나는 생각해보고 나서 이렇게 결심했다. 그들에게 얼마든지 증오하게 하라. 나도 하나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본문 397쪽에서.  루쉰의 유언에 해당하는 <죽음(死)>의 일부분.

 

 

 

*** 사소한 지적.

 

187쪽 단체 사진, 넷째줄 왼쪽에서 첫번째 인물이 노신이다. => 오른쪽에서 첫번째 인물임. 눈썹 보면 티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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