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이산의 책 16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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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康熙帝)는 순치제에 이은 대청제국 2대 황제이다.  8세에 제위에 오른 후 1661년부터 1722년까지 61년간 최장기간 중국을 다스렸다. 그는 한족에 대한 만주족의 통치를 완성했으며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3대에 이르는 강건성세, 청의 전성기를 연 황제였다. 장수를 보내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타이완을 점령하는 한편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서북 변방지역(준가르, 갈단) 정복 전쟁에 나서 현재 중국의 강역을 성립시키기도 했다. 그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군주였으며 각 분야에 걸쳐 문화 사업을 지원하였다.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주는 한편 주접제도라는 1대1 직통 비밀통신체계를 통해 지방 관료들의 부패와 태만을 직접 감시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정조를 합친 이미지라고나 할까. 그래서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어마어마한 인물을 저자는 흥미롭게도 사학자답지 않은 새로운 방법으로 조명한다. 즉, 강희제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지난 삶과 가치관을 회술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이런 형식으로, 유르스나르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이 유명하다) 어지간한 자신감과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감히 시도조차 못할 일. 저자는 학자로서 당연히 알고 있었을 강희제의 삶을 재구성하고 그 당시 그가 가졌을법한 생각, 그가 느꼈을 법한 느낌을 그가 생전에 남긴 실제 편지와 유조를 통해 그의 어투를 복원해 독자에게 들려준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290년을 건너뛰어 정복 왕조의 수성을 꾀하는 한 왕이 사냥을 통해 선조의 기상을 어떻게 유지하려 애썼는지, 자신의 신민들을 어떻게 공정히 다스리려고 노력했는지, 세상의 지식과 인간의 도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비록 천자이지만 늙어 약해가는 일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몸을 어떻게 돌봤는지, 그리고 세상을 다 다스려도 결코 자식들은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었던 한 아비로서 아들들의 후계자 분쟁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대청제국의 늙은 황제에게 직접 듣는 호사를 누렸다. 즐거웠다. 아,,,갈수록 스펜스 교수에게 빠져들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끝 부분에서 "한 시간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한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향기와 소리와 계획과 분위기로 가득 찬 꽃병이다."라고 했고, 이어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순간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감각과 기억 사이에서 나타나는 조화로운 관계이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한 사람의 역사가인 나로 하여금 기가 질리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결코 그 꽃병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단편적이고 제멋대로 널려 있는 사료들 때문에 결코 '조화로운 관계'를 포착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가 질린다는 것은 핵심에서 빗나간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내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고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서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강희제를 다시금 찾아내는 한 그는 이 책 속에 살아 있다.

- 본문 43쪽에서 인용

 

위와 같은 매력적 문장으로 독자인 나를 질리게 만든 이 책은 강희제와 청 초기 역사에 대해 연대순으로 배경 설명은 하지 않는다. 저자는 강희제의 내면 세계를 그리는데 주력한다. 그러므로 어느정도 배경 지식이 있는 독자가 보아야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 같다. 얇팍한 지식을 가진 나로서는 이 책의 진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곧이어 강희제의 준가르 정복을 다룬 <중국의 서진>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참, 원래 중국 황제들에 대한 개인적인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한다. 강희제의 경우, 상자 안에 봉해진 편지가 자금성 안에 있다가 신해혁명 이후 발견되었기에 남아 있는데,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다. 한 왕조가 멸망하고 다음 왕조가 성립하는 식으로 역사가 진행되었다면 이런 일상적인 문서는 다음 왕조의 관찬 역사서가 출판되자마자 파기되어 없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기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혁명 후, 공화국이 된 중화민국의 사학자들은 그들의 선배 역사가들에 비해 얼마나 행운아인가! 나는 이런 점도 기본적인 이 책의 독서와 더불어 매우 흥미롭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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