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약속 때문에 옆 옆 동네를 방문했다. 저녁식사를 함께 나눴던 이들은 각자 스위트 홈으로 돌아갔고 나도 집으로 돌아오면 되는데, 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자석에 끌리듯 들어간다. "신간도서" 서가에서 2~30분 머무른다.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은데 어찌 신간도서 서가에서 쉬고 있지? 다들 앞다투어 대출해 가야 했지 않을까? 책을 향한 예의의 마음이 달아오른 애서가는 남의 동네에서 책 빌릴 수단을 고한다.




문상철의 [몰락의 시간]을 대출했다. 이 생소한 이름은 前충남도지사 안희정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의 재판에서 증언했던 "김상훈"의 실명이다. 최근 JTBC에서 문상철의 출간 인터뷰를 보았다.


화면으로 받은 그의 인상은,


1. 말을 참 잘 한다. 입술 밖으로 발음하는 말에 군더더기 하나 없어서 바로 기사로 옮겨도 교정 필요 없을 정도라는 김훈 작가님 떠올리게 할 만큼 언어 능력이 뛰어나다.

2.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음성과 화법을 지녔다. 정치인을 꿈꾸며 정치판에서 오래 수련하고 기다렸던 사람답게 나직한데 웅변력 있는 음성과 화법을 지녔다.


[몰락의 시간] 첫 장을 펴자마자 한 숨에 읽어버렸다. "정치계" 근처도 가본적 없는 "평민"에게 안희정 前도지사의 부침浮沈 및 권력형 불나비들의 생태계는 sci-fi 영화보다 흥미진진했다. 문상철은 말만 잘하는 게 아니라 글까지 잘 썼다. 안희정이 측근의 첫 요건으로 "페이퍼를 만들 수 있는" 언어능력을 중시했다던데 정치 "빽"이 일절 없던 문상철이 나중에 안희정의 이너서클에 들어간 이유를 알겠다.


문상철은 가까이서 수행했던 전前 상사의 치부를 까발리고자 책을 쓰지 않았다. 그는 그 어떤 정치인도 잠재적 '안희정'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려 글을 썼다고 밝힌다.


사람들의 기대와 욕망 앞에서 안희정은 스스로를 잃어갔다. 환호와 호응, 그리고 공격과 상처는 단어만 다를 뿐 결국은 한낱 인간인 정치인을 환각에 빠지게 했다...정치인 안희정과 그의 곁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지만 부디 그들만의 이야기로 읽지 않기를 바란다.


 [몰락의 시간] 15쪽



[김지은입니다]와 [몰락의 시간]을 읽은 독자로서 판결 난 사건에 사견을 더하고 싶지 않다. 내가 [몰락의 시간]을 흥미롭게 읽은 지점은 다른 궁금증에서 나왔다.


예를 들어,

  1. 한국형 그림자 정부?있어?

  • 일루미나이트 혹은 프리메이슨까지 들먹이기엔 너무 나아가는 상상이지만, [몰락의 시간]을 읽다 보면 장기말을 움직이는 세력에 대한 암시가 등장한다. 그 세력의 형성과정, 구성과 목적, 작동방식 등이 무척 궁금하다. 문상철의 눈에 그들은 "공부하는 모임이라고 했지만 이 모임의 구성원을 가지고 바로 정부를 운영해도 될 정도로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조직된 엘리트 모임.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만들어놓은 거대한 로비의 장."(105) 으로 그려진다.


2. 팬덤정치와 짝패인 정치인의 나르시시즘


  • "그중 안지사가 가장 선호하던 모임은 단연 여성 기자들과의 저녁 자리였다...스스로 '운동을 마치고 땀 냄새를 내며 들어가는 콘셉트'로 잡아 운동복 차림에 목에 수건을 건 채 (여성 기자들과의 모임 장소에) 들어가기도 했다." (115)

  • "(안지사는) 재선 이후 스스로 다른 정치인들과 외모로 승부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외모 가꾸기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몸에 딱 붙는 슈트핏을 유지하기 위해 안경닦이조차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았고, 수시로 사용하는 담배와 라이터 등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물건은 자신의 옷이 아닌 수행비서의 주머니 속에 있어야 했기에 수행비서의 주머니는 항상 여러 잡동사니들로 넘쳐났다."(76)

  • "선거를 하다 보면 '뽕 맞았다'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현장에 지지자들만 잔뜩 진을 치고 와 있는 걸 알면서도 "와~~~"하는 현장의 함성 소리와 쏟아지는 기운은 강한 중독력이 있다. 환각력이 높은 이 팬덤의 기운을 안 지사는 힘들 때마다 찾았다." (88)


3. "정치 입문," "정치를 배우다" "정치 초보" "정치 구단"

평소 나는 "정치 초보" "노련한(?) 정치 구단"의 등급을 과연 어떤 기준으로 나누는지 궁금했다. "정치를 (잘못) 배웠다"라는 문구가 기사에 등장할 때마다 더 궁금했다. 과연 여기서 말하는 '정치'는 무엇이고, 누구 혹은 무엇을 통해 정치를 배운다는 것인가? [몰락의 시간]을 읽으니 그 나름의 답을 알 것 같다.

자신 역시 정치가가 되고 싶은 마음에 PD 및 연구원 일을 그만두고 도청 비서로 정치를 시작한 문상철이 관찰한 바, 대다수 젊은 정치지망생은 낡은 관계중심의 정치를 답습한다고 한다.

    • 청년팔이 정치_"캠프 내 청년 정치인들 대부분이 이미지로 소진되었다...좋은 뜻으로 청년 정치를 시작했지만, 아무런 배움과 지도 없이 오로지 유세에 동원되어 율동만 하다 돌아가거나 젊은 배경이 필요한 일정에 소모되는 식으로 불려다녔다...이러한 현실에 부딪힌 정치 지망생들은 소모적인 일만 하다가 돌아갔다. 잔류한 지망생들은 모든 일을 관계로 풀어가는 얕은 정치만을 배워나가기 시작했다...정치권 선배들과 저녁 술자리를 하며 친밀도를 올리고, 이를 기반으로 지역의 기초의원 자리나 추후 청년 비례에 공천받기를 원하는 식이었다." (121)

    • "나이와 직급을 떠나 모두가 '안희정'이라는 아버지를 필두로 형, 동생으로 구성된 가족 공동체 같았다. 안지사는 평소에도 '가문'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안희정 집안을 일궈야 한다"는 표현을 빈번하게 썼다." (29)

    • "조직 외부에서는 안희정의 최측근, 안희정 키즈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붙이며 자신의 체급을 올리는 사례도 많았다...이름팔이 정치의 가장 큰 폐해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모두가 자신의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항상 후보의 눈에 띄기만 바랐다는 것이다." (126)

    • "대한민국에는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정말 많은 기관의 자리가 있음을 이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경력과는 무관하게 잠시 캠프를 거쳐갔던 사람들조차 다양한 자리에 임명되었다. 우리(안희정) 캠프를 통해 문재인 캠프로 우회 상장을 하려던 많은 사람이 전략적 성공을 거두며 사회 곳곳의 높은 자리에 앉았다." (145)

    • "피고인(안희정) 측 증인으로 공개 증언을 한 사람 중에는...안희정 사건 재판 기간 전후로 한 번에 다섯 단계를 뛰어넘어 5급 비서관으로 임용되었다....재판 과정을 거치며 다들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191)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내부자로서, 이제는 기업체 직장인이자 외부자로서 정치권을 비판하는 문상철 전 수행비서 자신이야말로 안희정 前충남도지사가 선호하는 "티 안 나는" 의전을 매끄럽게 수행하도록 메뉴얼을 만든 사람이다. 이 메뉴얼은 후에 수행비서 김지은에게 인수인계되어 '안희정 특화 의전'의 토대가 된다.


 

" 나는 복잡한 의전은 싫어. 하지만 내가 싫다는 말은 티 나는 의전이 싫다는 거지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의전을 해줘야 해...나는 충남을 대표하는 도지사이고, 국민에게 사랑받는 정치인이네...의전을 하고 있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물 흐르는 의전이어야 해!"(65) 이런 까탈스러운 의전을 기대하는 상사를 만족시키기 위해 심지어 샤워할 때까지 방수팩에 핸드폰을 넣어 24시간 대기하며 자칭 도지사의 "외장하드"가 되어야만 정치실세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건지...씁쓸했다.

정치인을 고발하고 권력의 부패가능성을 경고하는 에세이를 쓴 사람에게서 권력을 향한 욕구를 보았기 때문에 씁쓸하다. 어쩌면 문상철이 서문에서 썼듯, 어떤 정치인도 '안희정'이 될 수 있듯 나 역시 상황에 처하면 '의전 메뉴얼'을 자발적으로 작성했을지도 모르기에 이는 비판이 아니라 반성에 가깝다. [몰락의 시간]을 통해 '반성의 시간'을 유도해준 문상철 저자에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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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12-30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지사가 이렇게까지 수준높은(수행하는 사람들 피말렸을듯..) 의전을 요구한다는점이 권력의 신격화와 나르시시즘을 잘 보여주었죠. 그런 상황에서 문제가 안생기면 오히려 미스터리일지도..얄라님 잘 읽었습니다. ^^

얄라알라 2023-12-31 01:24   좋아요 1 | URL
미미님 서재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치인들의 선거유세 몸짓 언어가, (적어도 제게는) 맨정신으로 보기 힘들만큼 과장 흥분되어 보였던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문상철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좀 알 것 같았어요. ‘지지 받는자, 나의 지지자, 나의 찐팬‘이라는 환상에 중독되면 도취감에 그런 기괴한 몸짓이 나오나봐요....

이 책에 의전의 까탈스러움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벌거벗은 임금님은 혼자 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사실
임금님 흉만 보기도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동시에 제가 맨 마지막 문장에 썼듯 임금님을 떠받들지 않으면 잘려나갈테네, 어려운 문제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