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와 애정], 원제 [ Mother Reader: Essential Writings
on Motherhood]
한국어판 표지는 숙성된
와인의 여유로움을 환기시킨다면, 원서 표지는 수험용 참고서인양 딱딱해 보여서 의외였다. 대화 중 이 책, [분노와 애정]을
추천하던 지인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는데, 순간이었지만 눈빛에 복합적 감정이 스쳤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엄마됨의 기록이라는데 제목이 어쩌다가 [분노와 애정] 일까? "넘치는
애정"이 아니고 말야? 묻는 동시에 답이 뻔해 보였다. 분노의 대상이 무엇일지.......
표면적으로는,
밤 잠 설치게 하며
엄마 몸의 하얀 영양액을 요구하는 아가의 울음소리, 삶의 궤적을 기록할 15분을 오롯이 빼내기 어렵게 분절되는 엄마됨의 시간감각, 혹은 출산
후에도 바로 사라지지 않는 임신선이나 제왕절개수술의 꿰맨 흔적처럼 몸의 변화에 대한 분노이겠다. 엉뚱한
위장 표적이다. 분노의 표적을 정밀 분석할 여유가 없는 엄마들이 쉽게 떠올리는 표면상의 이유일 뿐, 사실 분노는 더 깊은 데, 잘 드러나지 않기에 흔들기 쉽지도 않은
저 깊은 데를 향한다. 게다가 화학성분 최소화한 비누로 씻은 아기의 피부는 얼마나 달콤한지, 분노는 순수한 애정 그리고 기쁨과 얽혀서 체로 걸러지지도, 쉽사리
분리되지도 않는다. "and 접속사"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니 [분노와 애정]이라는 제목은 합당하다.
[분노와 애정]에 수록된 16편을 마음 가는(호기심 크게 느낀) 순서대로 읽었다.
도리스 레싱 Doris Lessing, 소설가
마거릿 미드 Magaret Mead, 인류학자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 Adrienne Rich, 시인.
4편까지 읽던 중 갑자기, 흉내 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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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 Doris Lessing
[다섯째 아이 The Fifth Child]의 작가 도리스 레싱의 자서전 <Under My Skin>(1994)에서 발췌한 글이다. 그녀는 모국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남로디지아(현 짐바브웨)에서 자랐고, 마찬가지로 백인이자 파견공무원이었던 남편과 남로디지아에서 신혼살림을 꾸렸다. 도리스 레싱은 피부색이 어두운 현지인들을 '하녀, 하인'으로 부려먹으며 앙칼지게 소리 지르는 백인 부인이 되기엔 많이 깨어 있었으며, 당대(20세기 중반) 시대정신이었다는 "출산 넘어 또 출산, 즉 겹출산"을 운명으로 수용하기에는 너무도 자기중심적이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오만의 수준으로 자존감을 드높인인다.
나는 프랭크의 예쁘고 영리한 새 아내였고 프랭크는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나 또한 사람들이
나와 활기 넘치는 내 아기를 보고 감탄하는 것이 좋았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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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이 태어난 지 9개월이 되어 곧 두 발로 서려고 했을 때,
우리는 둘째를 낳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내가 이러한 삶에 머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진지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파리나 런던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꿈꿀 뿐이어싸. 난 이곳에
속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을
것이다. 나는 누가 봐도 모든 걸 잘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성은 누구였는가? 티거는, 밝고, 저돌적이고, 재미있고, 유능하고,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었다. (23)
*
나는 유모차에 존을 태우고 몇 시간이나, 몇 시간이나 걸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총명한 젊은 여성이 하루 종일 작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지루한 일은 없다. 나는 유모차를 밀면서 머릿속으로 시를 썼다. (24)
[마가렛 미드 Margaret Mead]
미국 우표로 발행되었을 만큼 명사였던 마가렛 미드는 인류학자로서의 냉철한 분석력과 시적 감수성을 사회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데도 활용했다. 특히, 20세기 초 중반 당대 학계에서는 주변부의 소재였던 아동기 및 양육법의 비교문화적 연구를 선구적으로 수행했다. 그녀의 글 "할머니가 되어"에서도 인류학자로서 습관화된 거리두기 태도가 잘 드러난다.
직접 아기를 낳았을 때 나는 내가 편견을 갖고 어린 아이들을 관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정하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대신, 나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내 아이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몸집이 더 큰지 작은지, 더 얌전한지, 똑똑한지, 능숙한지를 판단했다. 곤란했다. 아이를 낳음으로써 엄마에 대해 상당히 많이 배웠다고 느꼈지만 어떤 면에서는 덜 객관적인 관찰자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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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 자신을 아동기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아닌 그저 한 명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내 딸과 손녀가 어린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미친 영향을 상당히 달리 묘사되어야 한다. 나는 상쇄해야 할 편견이 아니라, 특별하고 아마도 언젠가는 사라질 민감함을 얻었다.(70)
뼛 속까지 인류학자인 미드는 손녀 세반 마가릿이 태어나자, '할머니됨'의 경험과 감정을 역시나 인류학적으로 해석한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생물학적 후손의 탄생에 관여하는 것이 낯설다(66)" 라는 문장에서 나는 이 할머니에게 다시 한번 존경심을 느낀다. 개인적 에피소드조차도 더 큰 맥락 속에 위치시켜 해석하려는 체화된 직업 정신! 마가렛 미드는 자신의 행위가 아닌, 딸의 출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지위가 바뀜(즉 할머니가 됨)을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한다. 익숙함 공식을 뒤틀어 새롭게 보는 인류학자의 천진함을 미드에게서 엿본다.
나머지 14편의 에세이에 대해서는.....일기장 기록을 대신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