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에는 모든 것이 한데 섞여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과거의 여러 이미지가 가볍고 투명한 반죽으로 이겨 놓은 듯 한데 뒤엉킨다. 반죽은 늘어나고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무지갯빛 풍선 모양이 된다. - P54
어떤 사람들은 지난 사십년 동안 한 번도 자리를 옮기지 않은 채 우리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무성 영화의 배우들처럼 차를 마시고 있었다. - P55
아는 것이 너무 많고 누를 끼칠 염려가 있는 비밀을 감추려는 사람 같은 막연한 대답이었다. - P56
나는 막연하게나마 빌쿠르가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방에 밴 곰팡내처럼 결코 떨쳐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것은 살갗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었다. - P74
<회복기의 노래>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다고 했다. 어떤 슬픔은 水滴穿石의 물기로 달래면천년만년을 기다리면 쪼개지고 부서져서 산산이 흩어질지도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면지나갈 때까지
나를 보자 행상인 특유의 그의 입심은 기가 꺾이고 말았다. 그는 구경꾼들과 거리를 유지해야겠다는 듯, 그렇게 해서 이렇게 길바닥에서 장사를 벌이는 것이 본래의 자기 신분에 비해 매우 격이 떨어지는 일임을 나에게 이해시키려는 듯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 P9
그의 쓸쓸한 미소는 그가 사선으로 메고 있는 가방만큼이나 놀라웠다. - P15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봄이다. 매번 봄은 바다 밑에서 갑자기 솟구치는 큰 파도처럼 다가오고 그때마다 나는 이러다가 바다 저 아래로 곤두박질 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한다. - P42
그녀의 어조는 빌쿠르가 남들 눈에 더 품위 있어 보이려고 애쓰던 시절 ‘하층민 말투‘라고 칭하던 그런 어조였다. - P44
낙담한 표정이 그녀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 역시 느끼고 있는 낙담의 표정이. 그녀가 나에게 눈길을 던지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판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 P46
그녀의 향수 냄새가 방안의 냄새보다 더 진해졌다. 내게는 이제 없어서는 안 될 짙은 향수 냄새. 그것은 우리를 서로에게 비끄러매어 주는 고리처럼 감미롭고도 음울한 그 무엇이었다. - P48
문체가 깔끔하다. 그리고 차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들의 특징인가?˝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사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내가 누군가에게 기억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살아낸 것이 아닐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