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_ 이모

p172 [언제였을까. 그의 자취방에서 과도로 참외를 깎아 쪽을 내고 참외 씨를 미세하게 바르며 그의 등허리를 바라보았던 그 봄은. 그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병아리 빛깔의 수채화 같던 그 봄날의 오후는 그리고..... (...) 병아리 빛깔의 수채화는 대게 그렇게 붉고 어두워져 석양처럼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p173

[시간은 묽은 죽처럼 흘러갔다.] p178

[그는 젊은 나이와 혀 짧은 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사무적인 말투를 썼고 안경 낀 얼굴에는 뭔가 책임을 회피하려는 마음을 업무의 분주함 탓으로 돌리려는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십대 내내 거울을 통해 보아왔던 항상 목이 마른 듯 칼칼한 비정규직의 표정이었다.] p179

이런 글맛을 좋아한다.
맛깔난다.
-그치 수채화는 병아리 빛깔이다!
-분주함으로 위장한 책임회피와 정규직에게서 보기드문 늘 목마른 비정규직만의 강퍅한 표정 !!

캬~ 요걸 써 먹는다. 멋지다!


때로 그는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여보셔흐, 여보셔흐,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소리쳐 부르기도 했는데, 말끝은 담배연기처럼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에 묻혔다. 누구도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고 그의 속을 훑고나온 독가스 같은 입김이 공기 중에 떠돌다 제 몸에 들러붙기라도 할 듯 바삐 멀어졌다. (...)
군데군데 살갗이 터진 그의 오므린 손바닥에 잘못 태운숯가루처럼 얼룩덜룩한 무채색의 어둠이 고여 있었다. 지폐를 놓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추위로 눈물이 고인 그의 탁한 눈빛을 보자마자 그녀는 기이한 섬뜩함을 느끼고 허둥지둥 그 자리를 떴다. 금방이라도 그가 여보셔흐, 여보셔흐, 소리쳐 부를 것만 같았다. - P170

여자는 다소 놀란 듯한 맹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눈이 물고기처럼 크고 튀어나와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럼 아무 물도 안나오겠네요, 하고 물고기 눈의 여자가 물었다.  (...) 우리 집 계량기는 멀쩡해요! 여자는 좋은 정보라도 주듯 눈을 깜빡거리며, 냉수가 단수인거죠 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 그 집도 언 거라고, 우리 집 계량기도 겉으로는 멀쩡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젊은 여자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계량기함을 들여다보았다. 여자의 삐친 머리칼이 그녀의 볼을 간질였고 비닐봉지에서 닭튀김 냄새가 풍겼다. 이게 언거예요?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어 여자의 숨이 그녀의 얼굴에 끼얹어졌고, 금세라도 여자의 튀어나온 눈알이 구슬처럼 굴러 떨어질 것 같았다.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 있어본 게 영겁처럼 오래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71

그의 죽음을 알고 나서 그녀는 지인의 싸이월드를 통해 알게 된 그의 아내의 싸이월드에 들어가 그 여자가 쓴 글들을 모두 읽었다. 글을 잘 쓰지는 못했지만 많이 올리는 편이었고 여행을 자주 다니는지 사진도 많이 올렸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 여자가 페이스북으로 옮겨 갔고, 그녀도 덩달아 페이스북에 가입해 그들은 패친이 되기까지 했다. (...) 그 여자가 재외국민 투표를 했고 한국인인게 자랑스럽다는 글을 올려놓았는데, 그때에도 그녀는 깊은 혐오를 느끼면서 그 여자가 쓴 글과 그 밑에 달린158개의 의미 없는 댓글을 모조리 읽었다. 그걸 끝으로 그녀는 다시는 페이스북을 하지 않았다. - P175

내가 이모 나이에 싸이월드와 페북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나타내자 이모는 다소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태우랑 동갑이라니 하는 말인데, 나는 태우가 네 살 때 컴퓨터를 산 사람이다. 그땐 아래아한글이 없어서 보석글을 썼다. 
(...) 한때는 통신중독에 게임중독이기까지 했다. 블로그는 귀찮아서 하다 말았고, 싸이월드 좀 하다가 트위터와 페북으로 갈아탔지. 사실 나는 가족들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온라인 관계를끊는게 더 힘들 정도였다. 그건 주어진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거였고, 오로지 내가 쓴 글, 내가 보여준 이름이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우주였으니까." - P176

어느 순간 시간이 흐름을 멈추고 서서히 엉기기 시작했다. 3장의 중간 부분을 읽고 있을 때 그녀는 응고된 시간이 점도를 높이면서 온몸을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느낌은 오래전의 일들을 생각나게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과거에서 불려 나온 투명한 유충 떼의 습격을 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 P178

그녀가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이었다. "특히 파렴치한 주체에게서 잘드러난다"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를 뻔했다. 뭔가 행위를 해야 한다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조급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무슨 행위를 해야 할지알 수 없었다. 그녀는 꼼짝도 못하고 진땀을 흘리다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려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여보셔흐.....여보셔흐..... 그것은 뭔가를 달래는 주문과도 같았고 주문은 효과를 발휘했고 어느새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여보셔흐.....여보셔흐.....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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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되지 않은 미래들은 과거의 가지들을 뿐이다. 마른 가지들.] p40

도시는 기억으로 넘쳐흐르는 이러한 파도에 스펀지처럼 흠뻑 젖었다가 팽창합니다. 자이라의 현재를 묘사할 때는 그 속에 과거를 모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과거는 마치 손에 그어진 손금들처럼 거리 모퉁이에, 창살에, 계단 난간에, 피뢰침 안테나에, 깃대에 쓰여 있으며 그 자체로 긁히고 잘리고 조각나고 소용돌이치는 모든 단편들에 담겨있습니다. - P18

"다른 곳은 현실과 반대의 모습이 보이는 거울입니다. 여행자는 자신이 갖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발견함으로써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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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든 씨앗은 그 속에 하나씩 태양을 간직하고 있다]

삶에 안정된 것이란 없다. 우리가 아무리 안정을 찾는다고 해도 그것은 불확실한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정해진 삶을 사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 누군가 나에게 일깨워 주었으니, 나는 그것을 최고의 진리로 알았다. - P81

불안정하고 약속되지 않은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 삶이 나에게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용기를 갖는 것,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을 붙잡지 않으며 다가오는 것을 물리치지 않는 것이 내 추구의 길이었다. - P82

목청껏 외치는 선동가들과 장사꾼들은 많아도 우리의 영혼을 바쳐 길의 안내자로 삼을 스승은 없었다. 더불어 그럴싸한 철학과 논리가 판을 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수작일 뿐 진정한 삶의 이해에 도달한 자의 설법이 아니었다. - P125

자신의 삶에 충실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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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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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어머니가 장티푸스를 앓으며 약을 많이 먹어. 혹시 모른다는 조바심에 낳지 않으려고 했던 아이였다. 기껏해야 2.5kg정도였을 거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넌 정말 쬐그맣고 가무잡잡하고 못생긴 아기였어˝] 현재 그녀는 수많은 시람들에게 사랑과 존경받는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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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그러지는, 거대한 유리알 같이 매끄러워지는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난다 해도
결국 만질 수 없는 차가움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웃음이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어린 시절,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을 내다보며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저녁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우산이 없어. 강당 처마 아래 서서 잦아들지 않는 빗발을 바라보던 오후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도 인아다. 그런 순간 막연히 만나고 싶었던, 모르는 누군가의 희끗한 얼굴과 무심코 겹쳐지는 사람도 인아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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