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그러지는, 거대한 유리알 같이 매끄러워지는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난다 해도
결국 만질 수 없는 차가움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웃음이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어린 시절, 점점 어두워지는 골목을 내다보며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저녁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 우산이 없어. 강당 처마 아래 서서 잦아들지 않는 빗발을 바라보던 오후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도 인아다. 그런 순간 막연히 만나고 싶었던, 모르는 누군가의 희끗한 얼굴과 무심코 겹쳐지는 사람도 인아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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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HAKUNAMATATA >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축복》 Q. ...

얻어도, 얻지 못해도 집착하지 않으면 괴로울 것이 없다!

캉쎄르;
˝책은 반드시 내돈주고 사라˝

하쿠나마타타;
˝소장할 만한 책만 돈 주고 사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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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_ 눈 한송이가 녹는 동안

자선작_ 에우로파

무엇인가 들큼한 것이 벽 뒤에서 썩어가는 것 같던, 사람들의 미소와 목소리와 속마음이 모두 다른 말을 하는 것 같던 이물감이, 단순히 처음 진입한 사회생활에서 누구나 느낄 법한 주관적인 인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 - P26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까다롭고 유난하고 피곤한 선택들로, 그러나 자신으로선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던 유일한 선택들로 이루어진 것이 그녀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새벽에 부고를 듣고 내려가며 생각했었다. 그녀의 말처럼 우릴 내려다보는 존재 같은 건 없다고, 우리를 혐오하거나 연민하거나 무관심한 존재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고. 밤의고속도로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 찌르고 찔리며 꿈틀거린다고.  그러다 죽으면 사라진다고. 그 모든 번민, 선의와 후회가 남김없이 무로 돌아간다고. - P41

거기서 멈췄다. 더 쓸 수 없었다.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 무섭도록 생생했기 때문이다. 더 쓸 수 없다고 메일을 보낸 며칠 뒤 새벽, 아직 잠들기 전이었는지 친구가즉각 전화를 걸어왔다.
그럼 더 쓰지 않아도 돼. 대사는 필요 없어. 말로 못하는 걸 몸으로는 할 수 있어. 몸을 비틀고 관절을 꺾을 수 있어. 무너지고 으스러질 수 있어. 그렇게 어떻게든 다다를 수 있어.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더 쓰지 않아도 돼. 원고만 넘겨.
하지만 나는 원고를 넘기지 못했다. 오직 그 모습, 머리에 눈을 인 소녀가 관절을 꺾고 몸을 비틀고, 무너지고 으스러지는 모습만 남았다. 친구가 무대에 올릴 그것과 같을 수 없을, 내 상상 속 그녀의고통만이.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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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는 사형제도 존속 문제로 크게 뒤흔들리는 일본 사회의 현재와 사춘기 인간 존재의 위태로움 등을 짚어가며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슬픔과, 하지만 그 너머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구원을 그려보고자 했습니다.] _나카무라 호미노리 작가의 말.

너무 어둡고 진짜 우울하네
신년 첫소설 선택으로 부적절 했다
Bach cantata의 <눈 뜨라 부르는 소리 있도다>를 반복재생하며 새해 첫날 첫밤이 흐르게 ing

"자신의 취향이나 좁은 선입견으로 작품을 간단히 판단하지 마라." 그 사람은 곧잘 내게 말했다. "자신의 선입견에 따라 이야기를 묶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선입견을 이야기를 활용해 넓혀가려고 노력하는 게 좋아. 그러지 않으면 너의 틀은 넓어지지 않아." - P160

"현재라는 건 어떤 과거도 다 이겨버리는 거야. 그 아메바와 너를 잇는 무수한 생물의 연속은, 그 수십억 년의 끈이라는 엄청난 기적의 연속은, 알겠냐, 모조리 바로 지금의 너를 위해 있었단 말이야" - P157

나는 사람을 죽인 사람인데 이런 인간이 책을 읽어도 괜찮은가 하고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밤에 책을 읽으며 지내도 되는가 하고 생각하면 지금 바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어떤 인간이라도 예술을 접할 권리는 있다고 주임이 말했습니다. 예술 작품은 아무리 지독한 악인이라도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다고... - P184

바흐라는 사람의 <눈을 뜨라고 부르는 소리가 있어>. 이 세상에는 훌륭한 것이 많다고 했던 당신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다양한 인간의 인생 뒷편에서 이 곡은 항상 흐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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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밤에
왜 이런 제목의 책에 끌려 펼쳤을까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

그때 뱀의 표정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만족한 웃음,
이라는 것도 아니고, 슬프다, 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마치 이런 현실을 모조리 받아들인다는 듯한,
이렇게 될 줄 일찌감치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뱀이라는 자신의 존재 모두를 자각하고 있다는 듯한, 체념이라고도 각오라고도 할 수 있는 움직임이 없는 표정이었다. - P7

"자살과 범죄는 이 세상에 지는 거라고!" - P12

"사람들이 와글와글 떠들어대면 사형이고, 그냥 조용하면 사형이 아니다, 라고 할까….. 어째서 그놈은 사형이 아닌데 이놈은 사형인가, 미심쩍은 사건이 하나둘이 아니었잖아? (...) 결과적으로 말해서, 죽여도 울어줄 유족이 없는 사람, 그냥 혼자 살아온 사람을 죽였을 때는 형량이 달라져야 하는 거야⋯. 그건 역시 이상하잖아? 혼자 살아온 사람은 여론에서 별로 떠들지를 않는다는 얘기야. 똑같은 목숨인데. - P59

사형을 좀더 확실한 것으로 해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매스컴이나 세상 사람들이 떠드느냐 마느냐에 영향을 받는 식이어서야 이건 뭔가 크게 잘못됐지......나이만 해도 그래.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범인이 열일곱 살이건 열여덟 살이건 무슨 상관이 있겠어? 근데 열여덟 살을 하루라도 지났으면 사형이고 하루라도 모자라면 사형은 안 된다니, 대체 그 열여덟 살이란게 뭐냐고."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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