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 다이어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캐롤 쉴즈 지음, 한기찬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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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끔씩 산다는 게 지겨워질 때가 있다.

이때의 지겨움이란, 단조로운 일상으로부터 새어나오는 권태감이라기보다는 '모든 생(生)은 결국 죽음(死)으로 마무리된다' 는 너무도 평범하고 단순한 진리에 직면했을 때의 허무감에서 비롯된다.  


특별한 운명과 사명을 부여받고 태어났을 거라는 믿음이나 남과 나를 명확하게 구분지어줄거라는 나만의 독특한 개성에 대한 확신따위는 새벽녘 별빛처럼 서서히 흐릿해진다. 나란 존재는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에 불과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하지만 그외의 다른 의미는 없는,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캐롤 쉴즈 아니 데이지 굿윌 역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나로서는 단 한번도 소멸된 시간을 이해해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처럼 계절이 부풀어올랐다가 사그라지는 것이나, 한 해가 끝나고 또 한 해가 시작됐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무력하다는 것과, 우리 인생의 태반이 낭비되고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어떻게 그리 많은 시간에 그렇게 아무 일도 없을 수 있을까? 어떻게 그 시간이 깨끗이 사라질 수 있을까? 잘못 놓인 채 잊히고 만 달, 주일, 나날, 시간들은 물론, 우리의 육신이 절정에 이르고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만큼 온갖 감정의 맹공격을 받도록 되어 있는 인생의 값진 시간들까지.  -53쪽



 

1905년 어느 여름. 

캐나다 위니펙 근교 매니포바라는 작은 마을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엄마(머시 스톤)는 채석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올 남편(카일러 굿윌)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다가 온몸이 땅밑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면서 거실 바닥에 쓰러진 후, 두번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유대인 방문 외판원(스쿠타리라)의 손에 이끌려 현장에 도착한 이웃 여자(클래런틴 플렛)가 아이에게 '데이지'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거두워 키운다. 데이지가 열한 살 때 플렛 부인이 자전거에 부딪쳐 갑자기 사망하자, 카일러 굿윌은 어린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한다. 


롱아일랜드 여자대학교를 졸업한 데이지는 스물한 살 때 결혼을 하지만 신혼여행 중 신랑이 추락사하고 만다. 그뒤 십여 년을 미망인으로 살다가 서른 한 살 때, 스물 두살 연상인 플렛 부인의 큰아들과 결혼을 하고 삼남매를 낳아 키운다.  이십여 년의 결혼생활 뒤, 남편이 먼저 떠나고 다시 혼자가 된 데이지는 소질인 정원가꾸기에 관한 컬럼을 잡지에 쓰면서 지내다가 잡지사 편집장과 로맨스에 빠지기도 하고 지독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지만, 그녀의 삶은 전반적으로 평탄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어느날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은 잦은 혼수상태 사이에 갑자기 찾아왔다. 그녀는 여전히 과거를 더듬으며, 마치 하등동물이 산소를 들이마시듯 자신의 삶에서 실제 있었던 일과 상상으로 그려낸 일들을 호흡하며, 긴 터널로 들어서듯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순간 일종의 탈진 상태가(또는 아마도 권태가)엄습했는데, 그 순간 색체와 윤곽선이 급속히 흐릿해지면서 옛날 일을 환기시켜주던 작동이 멈춰버렸다. 그 대신 변화무쌍한 슬라이드 영상들이 눈꺼풀에 아로새겨졌는데, 그것은 지금까지처럼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미래의 모습을, 바로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이 죽음을 몸으로 숨 쉬게 되고, 나중에는 사랑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도 있었다. -475쪽

 

500여 페이지 중 어느 한곳, 빠르지도 느리지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데이지 굿윌이라는 한 여성의 삶을 1인칭으로 기술하는가 하면, 그녀와 연관이 있는 이들의 삶이 3인칭으로 펼쳐진다.


무려 100여 년이 훨씬 넘는 시간과 유럽과 북미대륙을 잇는 공간적 배경에 4대를 아우르는 등장인물들까지 놓고 본다면, 이 소설은 분명 대하소설급에 속한다. 하지만 대하소설이라고하기엔 '사건'을 너무 등한(?)시 한다. 데이지 굿윌의 비극적인 탄생이나 첫남편의 사망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웬만한 장편소설 한편이 되고도 남을 분량이건만, 그저 몇 페이지에 걸쳐 짧게 언급될 뿐이다. 다른 사건들에 비해 더 극적이지도 더 특별하지도 않다는 듯, 그저 무덤덤하게...



 

모든 인생에는 거의 읽히지 않는, 분명코 큰 소리로 읽히지 않는 그런 페이지가 있게 마련이다. -159쪽


이 세상 모든 물줄기가 바다로 향하듯, 이 작품의 모든 문장들은 이 단 한문장으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캐롤 쉴즈는 데이지의 생애 전반에 걸쳐 아주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들만큼은 큰 소리로 읽혀지지 않도록 남겨두었다.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만큼 너무 사소하고 평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무엇으로도 표현되어질 수 없을만큼 너무 극적이고 특별하고 소중해서...

 


기록은 결과적으로 망각에 대한 저항이지만, 때론 잊혀지고 정리되기 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말과 글로써 표현되어진 순간, 더이상 얽매이지 않게 된다. 이 말은, 역으로 잊고싶지않거나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표현되어질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저, 탄생(生)과 죽음(死) 사이에 인생(人)이라는 게 있다는 거...

인생은 때때로 목격되어지고 기록되어짐으로써 잊히고 이어지고 또다시 이어지고 잊히는 과정을 반복할 뿐이라는 거...

물론, 그중 어떤 페이지들은 한번 쓰여진 후 두번 다시 펼쳐지지 않을 테지만...


인생이란 끝없는 증언의 연속이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치스러운 것이든 부끄러운 것이든 간에, 우리의 상태는 목격될 필요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남들에게 관심받기를 원한다. 우리 자신의 추억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선의 이유이다. 다른 설명 다른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럴 경우에도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의식들, 탄생과 사랑, 죽음 같은 의식들은 누구에게든 그리고 소용이 있든 없든 확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얼마나 우연하고 일시적인 일인가? -64쪽

 


읽을 때는 너무 흥미롭고 재밌는데, 다 읽은 다음에는 너무나도 빠르게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가버리는 책들이 있다.

마치 스펙터클한 상업 영화 한편을 보고 나온 것처럼 (투자한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지만, 다시 보고싶지도 애써 떠올리지도 않게 된다. 문학 작품을 읽었다기보다는 계획적으로 잘 만들어진 (문학) 상품을 소비한 기분이다.


반면, 읽는 동안에는 특별한 감정의 동요가 없다가 마지막 책장을 덮은 다음에야 층층히 차오르는 충만감에 지그시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게 되는 책들이 있다. 이런 책일수록 독자의 평가를 불허한다. 처음부터 독자를 위해 쓰여진 게 아니라 작가 자신을 위해 쓰여졌기 때문이다. 



캐롤 쉴즈의『스톤 다이어리』가 바로 이런 작품이다.

나는 독자가 아니라 '스톤 다이어리'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또다른 '스톤'일 뿐임을 절감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그녀의 과거이자 우리의 미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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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소울메이트 고전 시리즈 - 소울클래식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세나 옮김 / 소울메이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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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다난했던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통신기술의 발달로 과거에 비해 안부와 소식을 주고받기는 훨씬 편리해졌지만, 손글씨로 써내려간 편지와는 여러모로 비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뭐랄까...?'

손편지에는 상대방의 목소리며 향기와 체온까지 전해진다고나 할까요.


소박하되 초라하지 않고....

개성 넘치면서도 요란하지 않으며...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게 마음을 전하죠...


그러고보니, 손편지는 좋은 선물과 좋은 친구의 조건을 전부 다 갖추고 있는 것 같군요.



 

그 이름을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한편의 시(詩)가 된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가 시인이 되길 꿈꾸는 젊은이(프란츠 카푸스)에게 보낸 열 통의 편지들을 모아 엮은 작품집을 읽게 된 것도 순전히 손글씨로 쓰여진 엽서 한통이 전해준 영감 덕분이었지요.


생전에 릴케는 많은 이들과 편지 교류를 했었는데 그중에서도 프란츠 카푸스라는 청년과 5년여 동안 주고받은 편지들은 20세기 서간문학의 꽃으로 손꼽힐만큼 유명하죠. 


그렇지만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이제 막 스물을 눈앞에 둔 젊은이에게 역시 젊다고밖엔 할 수없는 스물 여덟의 릴케가 과연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어떤 말을 했었는지 미심쩍어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계산하지도, 햇수를 세지도 않는다는 뜻이며 나무처럼 무성해진다는 뜻입니다.

나무는 수액을 억지로 내지 않으며, 봄의 폭풍 속에서도 의연하게 서 있지요. 혹시나 폭풍 끝에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갖지도 않습니다. 여름은 오게 마련입니다.  -세번째 편지」中-


제발 당신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에 대해 부디 인내심을 가지고, 그 문제 자체를 꼭 닫힌 방이나 낯선 언어로 쓰인 책처럼 사랑하시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지금까지 그 해답을 가지고 살아보지 않으셨기에, 당신에게 그 해답이 주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네번째 편지」中-

 

당신은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찾아오는 고통에 대해 아름답게 들리는 불만으로 대신하며 참고 견디십시오. 당신과 가깝던 사람들이 멀어져 간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당신의 주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이웃이 멀어진다면 당신의 영역은 이미 성좌(星座)에까지 도달하도록 매우 넓어진 것입니다. -「네번째 편지」中-

 


고독하다는 것은 좋습니다. 고독이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지요. 무엇인가가 어렵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그것을 행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 또한 좋은 일입니다. 사랑은 어려운 것이니까요. 인간과 인간이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 즉 마지막 시련이고 시험이며 과제입니다. 그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그저 준비 과정일 뿐입니다. -「일곱번째 편지」中-


그런 점에서 볼 때 모든 것에서 초보자인 젊은이들은 아직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배워야만 하지요. 혼신을 다해, 모든 힘을 다해, 고독하고 걱정하며 위로 치닫는 마음으로 그들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배우는 시간은 언제나 길고도 폐쇄적인 기간이기에, 사랑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인생의 내부까지 깊이 파고드는 것이고, 고독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승화되고 심화된 홀로됨이지요.  -「일곱번째 편지」中-


당연히, 인내와 고독보다는 사랑과 열정을 강조할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시인이고 또한 젊디 젊었으니까요.

그런데 뜻밖에도, 릴케는 인내와 고독과 겸손과 용기를 이야기 합니다. 10대와 20대에 가장 필요하지만 또한 가장 갖추기 어려운 덕목이 바로 인내와 겸손이라는 걸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릴케가 중년이 훨씬 지난 나이에 이와 같은 글들을 썼더라도 이처럼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을까요?

아니요, 그렇진 않았을 것 같군요. 울림보다는 잔소리나 지당한 말씀 정도로 들렸을 가능성이 훨씬 컸을 테죠.


카푸스에게 릴케의 편지들이 그 어떤 현자의 충고나 가르침보다도 훨씬 더 소중하고 절절하게 다가왔던 건, 릴케가 자신과 엇비슷한 연령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육체적으로 성년과 미성년을 나누는 기준을 스물로 본다면, 정신적으로 성년과 미성년을 나누는 기준은 아마 마흔(不惑)이 아닐까 싶어요. 


마흔은,

마음이 흔들려도 결코 세상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죠.   


휘어질지언정 절대 부러지지 않는...

마흔 번의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거친 나무처럼...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 약속하지 않아도, 손꼽아 세월을 헤아리지 않아도, 홀로 기다렸다가...

스스로 싹 틔우고 무성해질 줄 아는 나이죠. 



 

저는 언제나 당신이 인내심을 충분히 발휘하여 참으시고 또 우직하게 믿고 계시길 바랄 뿐입니다. 어려운 점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당신의 고독에 대해서 더욱더 많은 신뢰감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삶이 제 길을 가도록 그냥 맡겨두십시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삶은 어떤 경우에든 옳습니다. -「아홉번째 편지」中-



 

'삶은 어떤 경우에든 옳다.'


저는, 이 아홉번째 편지에서 그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편지를 썼을 당시 릴케는 아마 삼십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을 겁니다. 푸르디 푸른 청춘이라고 할 순 없어도 역시 원숙한 중년에는 한참이나 못 미친 나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의 밑바닥까지 꿰뚫어 봅니다.


가보지 않은 곳들...

겪어보지 않은 일들...

살아보지 않은 시간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배웁니다. 그래서 신체 활동 영역을 제외하곤 언제나 연장자가 유리하지요. 젊은이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지적 수준에 압도당하기 일수죠. 이때 젊은층이 쉽게 빠지는 오류는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눈높이로 연장자를 평가하려고 하죠. 그럼, 언제나 연장자는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한편으론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非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으니까요. 젊은이가 연장자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그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카푸스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릴케의 편지 속에 담겨 있는 생(生)의 진리를 마주하게 되었을 겁니다.

가보지 않은 곳들을 직접 가보고.. 겪어보지 않은 일들을 직접 경험해보고.. 살아보지 않은 시간들을 직접 살아보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깨달았을 겁니다.

릴케가 나이를 훌쩍 뛰어넘는, 선험주의적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었다는 걸...

그와 같은 사람이 자신의 멘토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를 말이지요.



 

저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이처럼 빼어난 글들이 단 한사람을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단 한사람을 위한 글(편지)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명문장들이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대한 예술작품들 중에는 이처럼 단 한사람을 위해 만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지극히 작고 깊은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높고 멀리 비약(飛躍)할 수 있기 때문이죠.

릴케 역시 카푸스라는 젊은 시인 단 한사람을 위해 생각을 집중하고 마음이 흐르는대로 자연스럽게 펜을 움직인 결과, 젊은 시인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것도 모자라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휘젓어 놓습니다.



 

결국, 사람 마음은 모두 똑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만인을 위해 쓰인 글들이 오히려 단 한 사람도 감동시킬 수 없는가 하면, 단 한사람을 위해 쓰인 글들이 뜻밖에 만인을 울릴 수도 있는 거죠.


단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곧 만인을 위한 마음으로 확대될 때, 평범한 일상은 특별한 예술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이제, 긴 글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네요.


비록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비할 길 없고 직접 쓴 손편지를 대신할 수도 없겠지만, 미처 부치지 못한 연하장을 이 글로 대신할까 합니다.


끝으로,

올해가 어디서 흘러왔고 새해는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순 없지만, 우리 그냥 삶이 제 갈 길을 찾아가는 거라고 믿기로 해요.

삶은,

어떤 경우에든 옳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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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빛으로 난 길 - 동아시아 쪽빛을 찾아 떠난 예술 기행
신상웅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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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와 '결'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말이 많아지고 '격'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말이 줄어든다.

전자가 개인의 성격과 취향의 차이라면, 후자는 사람의 인품과 됨됨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쪽이 호감이라면 다른 한쪽은 존경이다.


책도 그런 것 같다.

나와 결이 너무 다른 책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탐독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는 호기심부터 채워야 하므로...

반면, 격이 다른 책을 접하면 머뭇거리게 된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시간과 정성이 여백마다 깊숙히 배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드물긴 하지만 '결'도 '격'도 모두 다른 경우도 있다.  신상웅의 『쪽빛으로 난 길』처럼...



 


 

   

화포란 그러니까 염색이라는 일이 일률적으로 고르게 물을 들이던 방식에서 어떤 무늬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 위에 누군가 의견을 남겼다고도 볼 수 있다. 그건 이전의 염색과는 다른 길이었다.


그런 화포가 세상 도처에 있었던 것을 나만 몰랐던 것이다. 나도 푸른 천 위에 내 의견을 남기고 싶었다.

 

화포의 시작은 방염제다. 물들일 곳과 그렇지 않을 곳을 구분하는 것, 그것이 방염제의 역할이다. 그중 하나가 밀랍이다. 밀랍은 열에 쉽게 녹고 식으면 빠르게 굳는 성질이 있다.

 

자세한 표현이 가능하고 접착력도 강하다. 그래서 정교한 무늬가 요구되는 경우에 일찍부터 사용되었다. 밀랍 덕분에 화포다운 화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밀랍을 녹인다. 녹인 밀랍 용액에 곱게 간 숯가루를 섞는다.


이제 천에 무늬를 그릴 차례다. 붓으로 밀랍을 찍는다. 천에 점을 하나 그리면 꽃잎이 될 것이고 다섯 개를 빙 둘러 찍으면 꽃송이가 된다. 그리고 푸른색을 들였다. 가장 진한 색이 될 때까지 물들이기를 반복했다.

 

밀랍은 천에서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가장자리만 조금 미세한 금이 갔다. 끓는 물에 푸른색 천을 넣었다. 잠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천을 움직이자 밀랍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드디어 흰 꽃송이가 피어났다. 화포다. 

 

- 신상웅의 『쪽빛으로 난 길』들어가며 中-





'인디고 블루'

칠흑같은 어둠이 새하얀 달빛을 받아 보라빛이 서린 푸른 밤하늘을 닮은 색이다.


처음엔 온통 검정이나 진파랑으로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때론 푸르고 때론 자줏빛이 감돈다는 인디고 블루, 순우리말로는 쪽빛.

이 '쪽빛' 단 한가지 색에 미친 사람, 아니 사람들이 있었다. 



동양화를 전공한 저자는 일찍부터 염색 그것도 쪽을 이용하여 무명천을 쪽빛으로 물들이는 일에 매혹되었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으리라. 말그대로 그냥 어떤 것에 마음이 홀려 버린 것('매혹')이다. 매혹엔 이성적인 판단도 합리적인 이유도 들어설 자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쪽빛이 좋아 쪽빛 하나만 바라보고 걸어간 길이었으리라.


중국 구이저우의 소수민족인 먀오족을 만나고, 태국과 베트남 북쪽 산악지대에 흩어져 산다는 몽족을 찾아가는가하면, 일본의 교토까지 그의 발길은 이어졌다.


타박타박 발길 닿는대로 써내려간 그의 문장들은 객창감(客窓感)이 잔뜩 묻어나 있어 여행서로도 부족함이 없지만, 다양한 현지 정보나 멋스러운 여행지의 사진들을 기대한다면 번짓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셈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아 일반 독자를 주눅들게 만드는 문사들의 우쭐거림도 없고, 제멋에 혹은 경제적인 목적으로 자신의 행적을 자랑하거나 판매하려는 전문 여행꾼들의 감각적인 사진이나 달달한 문장들도 없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짧게 머물다 떠나는 이방인이야말로 전통적인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폭력 그 자체라는 걸...

누구에게나 너무 절절해서 성스럽기까지 한 생존, 그 현장에 서있는 사람들을 향해 눌러대는 카메라 셔터는 모욕이라는 걸...



이 뿐만 아니다. 그는 전통과 혁신의 변증법적인 관계도 놓치지 않는다. 




시대는 늘 새로운 사고를 요구하고 그래서 현재는 늘 과거와 다투게 마련이다. 사람이든 문화든 마찬가지다. 게다가 미래라는 종잡을 수 없는 변수가 끼어들면 사태는 한층 복잡해진다. '전통'과 '혁신'이라는 케케묵은 질문을 피해 갈 수는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혁신은 변화에 대한 요구이며 변화는 생존과 직결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전통이라는 우물, 깊이가 얕건 깊건 수량이 많건 적건 그곳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전통이라는 이름의 거미줄은 생각보다 질기고 촘촘하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가. 루쉰 역시 그 문제에 직면했다. 루쉰이 전통의 모래밭에서 건져 올린 사금은 무엇이었을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는지 루쉰은 유언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구인들은 임종이 다가오면 남에게 용서을 구하거나 자신도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고 했다. 내게도 원한을 품은 자들이 많다. 만약 요즘 사람이 물어온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오랜 생각 끝에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들이 맘껏 원망하도록 두자. 나 역시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 신상웅의 『쪽빛으로 난 길』213쪽 中-



'전통을 위해 혁신을 포기해서도 안 되며, 혁신을 위해 전통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 둘이 치열하게 싸우도록 그냥 둬라!'


루쉰은 역시 루쉰이다.

루쉰의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나 또한 읽지 않은 것과 같고,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것과 진배없다. 정좌하고 그의 작품을 읽으면 별재미 없고 주제파악도 쉽지 않지만, 이처럼 뜻밖의 곳에서 마주치게 되고 뜨거운 공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린 때때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하고, 정의내리려하며, 선택하려고만 하는 건 아닌지...

그냥 둬도 되는 일, 그냥 둬야 되는 일도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역시 전통을 지켜야한다는 거창한 의무감도 뭣도 아닌, 그냥 자신이 좋아서 쪽빛으로 난 길을 걸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길을 걸었거나 걷고있는 사람들을 만났고, 무슨 대단한 결의나 약속도 없이 그저 눈빛만으로 서로 깊은 공감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자신과 결도 다르고 격도 달랐을 사람들....

같은 시간을 살면서도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그들에게 저자는 호기심도 존경심도 아닌, 똑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마음을 나누었으리라. 




(..........)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무말도 아무것도 하고 싶은 않은,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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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민음사 모던 클래식 41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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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늘 소설 속에 있어."

레오는 빨갛게 타오르도록 담배를 한 모금 빨고 나서 담배를 내려놓더니 더운 공기 속으로 연기를 내뿜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는 아무도 몰라! 현실에서는 모든 게 뒤섞이지. 책에서만 말끔하게 분리되는 거야. 


소설은 현실을 전제로 한, 허구의 세계다.

이 둘 사이의 경계는 생각보다 굳건해서, 작가라고 불리우는 문지기일지라도 함부로 오고가지 못한다.

오히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훌륭한 문지기로 평가받곤 한다.


한편, 우리는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수시로 넘나들면서 생활한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은 현실과는 다른 '나'를 존재케 한다. 이제 문명의 발달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또다른 '나'를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뚫지는 못한다. 시도는 해볼지언정....


이처럼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전복시키려고 시도한 작가 중 단연 돋보이는 이는 다니엘 켈만이 아닐까 싶다. 

켈만은 스스로를 '기교는 부족하지만 예기치 못한 술수와 풍부한 영상을 그려 내는 교활한 단편소설 작가'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정말 교활하게도(?) 이와 같은 자의식을 자신의 단편소설집 『명예』의 레오 리히터에게 투영시킨다.



 

레오 리히터는 켈만이 창조한 등장인물로 직업은 전업 작가다.

작가로서 그의 특징은 현실의 주변 인물들 속에서 캐릭터를 만들어낸다는 데에 있다. 그에게는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일하는 여자친구('엘리자베스')가 있는데, 엘리자베스는 레오에 의해 '라라 가스파드'라는 등장인물로 창조된다. 라라 가스파드는 안락사를 받기 위해 스위스로 향하는 병든 노파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로잘리에가 죽으러 가다」) 에서 로잘리에의 조카딸로 나온다.  


 

또 레오 리히터는 여자친구와 함께 분쟁지역을 방문하기 위해 원래는 자기가 참석하기로 되어 있던 동양의 어느 한 나라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마리아라는 또다른 여류작가를 대신 보낸다. 그런데 마리아는 여행 가방에 휴대폰 밧데리를 챙겨넣는 걸 잊어버린 사소한 실수가 단초가 되어 그만 해당 국가에서 행방불명되고 만다.


우리는 종종 낯선 세계로의 일상 탈출을 꿈꾼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를 탐험하는가 하면, 전혀 다른 이의 신분으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인터넷 사이버 세계에 몰입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마리아'(「동양」)나 '랄프'(「목소리」와「탈출구」) 혹은 '몰비치'(「토론에 글 올리기」) 처럼, 언어가 통하지 않거나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거나, 혹은 현실의 나보다는 가상의 내가 중심이 되는 세계에서 자신의 현실 속 신분을 증명할 길이 막혀 버린 순간, 개인의 정체성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존재(存在)하지만 부재(不在)하며, 부재(不在)하면서 동시에 존재(存在)한다.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다니엘 켈만의 이야기를 읽는다고 생각한 순간, 레오 리히터의 작품 속으로 들어와 있다. 아홉 편의 이야기들은 모두 제각기 독립적인 작품이면서 동시에 다른 여덟 편의 작품들과 직간접적으로 이어져 있다.


​마치 입체파 작품처럼, 조각조각 분해되고... 잃어버리고... 잊혀지고... 또다시 이어진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무너진 빈틈 사이로 스며든, 이 느낌...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느낌...

분명, 과거에 엇비슷한 내용과 형식을 접했음에도 오늘 처음 접한 것 같은, 이 느낌...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이 공허감을 어찌해야 할지...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고 나온 것 같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노인들이여 저무는 하루에 소리치고 저항하시오

분노하고 분노하시오 죽어가는 빛에 대해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선한 자는 마지막 파도가 지난 후에야

덧없는 행적이 푸른 바닷가 위에 빛났음을 한탄하니

분노하고 분노하시오 죽어가는 빛에 대해


-by 딜런 토마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中

 



 

다니엘 켈만은 피카소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처럼 기성 작가나 감독에게는 질투심과 위기감을, 젊은 작가나 지망생들에게는 좌절감과 경외감을,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현대문명과 실존에 대한 덧없는 저항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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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생활 풍경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모스 오즈 지음, 최정수 옮김 / 비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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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간벽지나 농촌이라기보다는 대도시에서 차로 한 두시간 거리에 있는 소도시나 그 인근에 자리한 전원 마을...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지역에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곳...


초기 유대인 정착자들이 세운 마을 중 하나인 텔일란은 비록 이제는 쇠락의 길로 들어섰지만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기품으로 가득 차 있다. 비록 아름다운 풍광 덕분에 속속 들어서는 호화별장과 세련된 빌딩들이 마을의 옛모습을 조금씩 바꾸어 놓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마을 사람들 역시 개발붐을 타고 뛰어오른 땅값에 남몰래 기뻐할지언정 이를 겉으로 들어내는 건 부끄럽게 여길만큼의 교양 정도는 갖추었다.  



 

이곳에는 한때 국회의원이었던 페사크 케뎀이 생의 말년을 맞아 고등학교 문학 교사인 딸 라헬과 함께 살아간다. 미망인인 라헬은 사십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인 여성으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랍인 청년을 고용하여 집안일을 맡긴다. 그녀는  안정된 생활과 고루한 아버지때문에 종종 답답해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땅파기>-



 

한편, 라헬의 친구이자 마을의 유일한 여자 의사인 길리 스타이너는 버스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조카를 기다린다.  길리는 바쁜 친언니의 부탁으로 어린 조카를 돌봐주곤 했지만, 이제는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난 조카가 여전히 이모인 자신을 신뢰하고 좋아하는지 불안해하면서도 나중에 재산을 조카에게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친척>-



 

베니 아브니는 텔일란 마을의 면장이다.

구부정한 어깨에 단정치 못한 옷차림이지만 정직한 일처리로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다. 게다가 그는 대학시절에 만나 결혼한 아내와 쌍둥이 딸을 둔, 모범적인 가장이다. 마을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는 아내 나바는 매일 점심시간이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베니의 점심식사를 준비해준다. 한마디로 그는 남부러울 게 없는 남자였다. 도자기를 만드는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는 아내가 어느날 쪽지 한 장만을 남기고 사라지기 전까지는...-<기다리기>- 



 

올해 열일곱살인 코비 에즈는 식료품 가게 아들로 연상의 이혼녀인 아다를 남몰래 사랑한다. 코비는 자신보다 십 여년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뚱뚱한 트레일러 기사가 아다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순수하다. 그러나 그만큼 치명적이고 취약하다. -<낯선 사람들>-



 

이혼한 아내와 딸로부터 '홀로서기'를 요구받은 젤리크...

그는 퇴직과 동시에 고향 마을로 내려와 노모를 모시고 살지만, 병든 어머니가 어서 빨리 돌아가셔서 자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길 남몰래 고대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을 역겨워한다.

그러던 어느날, 집안의 먼 친척이라고 주장하면서 어머니를 복지시설에 보내고 함께 유산을 물려받자는 법률회사 직원이 나타난다. -<상속자>-



 

달리아와 아브라함 부부는 금요일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노래부르기를 한다. 소박한 연주와 합창은 종종 자정까지 이어지며 부부는 휴식시간에 근사한 저녁식사를 대접한다. 단순한 취미생활이라고 하기엔 '노래부르기'에 너무 열심히 매달리는 부부... -<노래하기>




말 그대로, '시골 생활 풍경'이다.


아모스 오즈의 『시골 생활 풍경』은 모두 여덟편의 단편들이 담겨 있으며, 이중 일곱 편이 텔일란이라는 가상의 전원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이야기 전개상 작품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한 작품의 주인공이 다른 작품에 조연으로 등장해서 마치 한편의 장편소설처럼 읽힌다. 


꾸며낸 소설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고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등장인물들에겐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도 않고, 어느날 갑자기 삶이 산산조각 나지도 않는다. 최소한 겉으로 보기엔 말이다.



삶이란, 이런 게 아니던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무 일도 없는 거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아무일도 없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닌...



 

나는 이 작품집을 읽는 동안에는 특별한 인상을 받지 못했더랬다.

오히려 다 읽고 난 후, 며칠이 지나서 발췌한 내용을 옮겨 적다가 소름이 돋을 만큼 깜짝 놀라고 말았다.



노년의 불안과 체념...

중년의 고독과 상실...

그리고, 십대의 욕망과 두려움까지...


아모스 오즈는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일상 속에 스며든 미세한 정신적 균열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는 게 아닌가.


 

'명불허전'이다.

아모스 오즈를 두고, 해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일순위로 거론되는 작가라는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다만, 소설읽기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이 작품은, 현명한 선택이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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