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소울메이트 고전 시리즈 - 소울클래식 3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세나 옮김 / 소울메이트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다사다난했던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통신기술의 발달로 과거에 비해 안부와 소식을 주고받기는 훨씬 편리해졌지만, 손글씨로 써내려간 편지와는 여러모로 비교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뭐랄까...?'

손편지에는 상대방의 목소리며 향기와 체온까지 전해진다고나 할까요.


소박하되 초라하지 않고....

개성 넘치면서도 요란하지 않으며... 

상대방이 부담스럽지 않게 마음을 전하죠...


그러고보니, 손편지는 좋은 선물과 좋은 친구의 조건을 전부 다 갖추고 있는 것 같군요.



 

그 이름을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한편의 시(詩)가 된다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가 시인이 되길 꿈꾸는 젊은이(프란츠 카푸스)에게 보낸 열 통의 편지들을 모아 엮은 작품집을 읽게 된 것도 순전히 손글씨로 쓰여진 엽서 한통이 전해준 영감 덕분이었지요.


생전에 릴케는 많은 이들과 편지 교류를 했었는데 그중에서도 프란츠 카푸스라는 청년과 5년여 동안 주고받은 편지들은 20세기 서간문학의 꽃으로 손꼽힐만큼 유명하죠. 


그렇지만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이제 막 스물을 눈앞에 둔 젊은이에게 역시 젊다고밖엔 할 수없는 스물 여덟의 릴케가 과연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어떤 말을 했었는지 미심쩍어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계산하지도, 햇수를 세지도 않는다는 뜻이며 나무처럼 무성해진다는 뜻입니다.

나무는 수액을 억지로 내지 않으며, 봄의 폭풍 속에서도 의연하게 서 있지요. 혹시나 폭풍 끝에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갖지도 않습니다. 여름은 오게 마련입니다.  -세번째 편지」中-


제발 당신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모든 문제에 대해 부디 인내심을 가지고, 그 문제 자체를 꼭 닫힌 방이나 낯선 언어로 쓰인 책처럼 사랑하시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지금까지 그 해답을 가지고 살아보지 않으셨기에, 당신에게 그 해답이 주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네번째 편지」中-

 

당신은 당신의 고독을 사랑하고, 당신에게 찾아오는 고통에 대해 아름답게 들리는 불만으로 대신하며 참고 견디십시오. 당신과 가깝던 사람들이 멀어져 간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당신의 주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당신의 이웃이 멀어진다면 당신의 영역은 이미 성좌(星座)에까지 도달하도록 매우 넓어진 것입니다. -「네번째 편지」中-

 


고독하다는 것은 좋습니다. 고독이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지요. 무엇인가가 어렵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그것을 행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 또한 좋은 일입니다. 사랑은 어려운 것이니까요. 인간과 인간이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 즉 마지막 시련이고 시험이며 과제입니다. 그에 비하면 다른 모든 것은 그저 준비 과정일 뿐입니다. -「일곱번째 편지」中-


그런 점에서 볼 때 모든 것에서 초보자인 젊은이들은 아직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배워야만 하지요. 혼신을 다해, 모든 힘을 다해, 고독하고 걱정하며 위로 치닫는 마음으로 그들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를 배우는 시간은 언제나 길고도 폐쇄적인 기간이기에, 사랑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인생의 내부까지 깊이 파고드는 것이고, 고독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승화되고 심화된 홀로됨이지요.  -「일곱번째 편지」中-


당연히, 인내와 고독보다는 사랑과 열정을 강조할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시인이고 또한 젊디 젊었으니까요.

그런데 뜻밖에도, 릴케는 인내와 고독과 겸손과 용기를 이야기 합니다. 10대와 20대에 가장 필요하지만 또한 가장 갖추기 어려운 덕목이 바로 인내와 겸손이라는 걸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릴케가 중년이 훨씬 지난 나이에 이와 같은 글들을 썼더라도 이처럼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을까요?

아니요, 그렇진 않았을 것 같군요. 울림보다는 잔소리나 지당한 말씀 정도로 들렸을 가능성이 훨씬 컸을 테죠.


카푸스에게 릴케의 편지들이 그 어떤 현자의 충고나 가르침보다도 훨씬 더 소중하고 절절하게 다가왔던 건, 릴케가 자신과 엇비슷한 연령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육체적으로 성년과 미성년을 나누는 기준을 스물로 본다면, 정신적으로 성년과 미성년을 나누는 기준은 아마 마흔(不惑)이 아닐까 싶어요. 


마흔은,

마음이 흔들려도 결코 세상에 미혹되지 않는 나이죠.   


휘어질지언정 절대 부러지지 않는...

마흔 번의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거친 나무처럼...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서로 약속하지 않아도, 손꼽아 세월을 헤아리지 않아도, 홀로 기다렸다가...

스스로 싹 틔우고 무성해질 줄 아는 나이죠. 



 

저는 언제나 당신이 인내심을 충분히 발휘하여 참으시고 또 우직하게 믿고 계시길 바랄 뿐입니다. 어려운 점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느껴지는 당신의 고독에 대해서 더욱더 많은 신뢰감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삶이 제 길을 가도록 그냥 맡겨두십시오. 제 말을 믿으십시오. 삶은 어떤 경우에든 옳습니다. -「아홉번째 편지」中-



 

'삶은 어떤 경우에든 옳다.'


저는, 이 아홉번째 편지에서 그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편지를 썼을 당시 릴케는 아마 삼십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을 겁니다. 푸르디 푸른 청춘이라고 할 순 없어도 역시 원숙한 중년에는 한참이나 못 미친 나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의 밑바닥까지 꿰뚫어 봅니다.


가보지 않은 곳들...

겪어보지 않은 일들...

살아보지 않은 시간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배웁니다. 그래서 신체 활동 영역을 제외하곤 언제나 연장자가 유리하지요. 젊은이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지적 수준에 압도당하기 일수죠. 이때 젊은층이 쉽게 빠지는 오류는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눈높이로 연장자를 평가하려고 하죠. 그럼, 언제나 연장자는 자신보다 한 단계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한편으론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非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라는 요소를 고려하지 않았으니까요. 젊은이가 연장자의 수준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스스로 그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카푸스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릴케의 편지 속에 담겨 있는 생(生)의 진리를 마주하게 되었을 겁니다.

가보지 않은 곳들을 직접 가보고.. 겪어보지 않은 일들을 직접 경험해보고.. 살아보지 않은 시간들을 직접 살아보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깨달았을 겁니다.

릴케가 나이를 훌쩍 뛰어넘는, 선험주의적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었다는 걸...

그와 같은 사람이 자신의 멘토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를 말이지요.



 

저는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이처럼 빼어난 글들이 단 한사람을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단 한사람을 위한 글(편지)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명문장들이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대한 예술작품들 중에는 이처럼 단 한사람을 위해 만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지극히 작고 깊은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갔을 때, 가장 높고 멀리 비약(飛躍)할 수 있기 때문이죠.

릴케 역시 카푸스라는 젊은 시인 단 한사람을 위해 생각을 집중하고 마음이 흐르는대로 자연스럽게 펜을 움직인 결과, 젊은 시인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것도 모자라 전혀 다른 시대와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휘젓어 놓습니다.



 

결국, 사람 마음은 모두 똑같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만인을 위해 쓰인 글들이 오히려 단 한 사람도 감동시킬 수 없는가 하면, 단 한사람을 위해 쓰인 글들이 뜻밖에 만인을 울릴 수도 있는 거죠.


단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곧 만인을 위한 마음으로 확대될 때, 평범한 일상은 특별한 예술로 승화될 수 있습니다. 



이제, 긴 글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네요.


비록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비할 길 없고 직접 쓴 손편지를 대신할 수도 없겠지만, 미처 부치지 못한 연하장을 이 글로 대신할까 합니다.


끝으로,

올해가 어디서 흘러왔고 새해는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순 없지만, 우리 그냥 삶이 제 갈 길을 찾아가는 거라고 믿기로 해요.

삶은,

어떤 경우에든 옳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