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으로 난 길 - 동아시아 쪽빛을 찾아 떠난 예술 기행
신상웅 지음 / 마음산책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나와 '결'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말이 많아지고 '격'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말이 줄어든다.

전자가 개인의 성격과 취향의 차이라면, 후자는 사람의 인품과 됨됨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쪽이 호감이라면 다른 한쪽은 존경이다.


책도 그런 것 같다.

나와 결이 너무 다른 책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탐독하게 된다.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는 호기심부터 채워야 하므로...

반면, 격이 다른 책을 접하면 머뭇거리게 된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시간과 정성이 여백마다 깊숙히 배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드물긴 하지만 '결'도 '격'도 모두 다른 경우도 있다.  신상웅의 『쪽빛으로 난 길』처럼...



 


 

   

화포란 그러니까 염색이라는 일이 일률적으로 고르게 물을 들이던 방식에서 어떤 무늬를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 위에 누군가 의견을 남겼다고도 볼 수 있다. 그건 이전의 염색과는 다른 길이었다.


그런 화포가 세상 도처에 있었던 것을 나만 몰랐던 것이다. 나도 푸른 천 위에 내 의견을 남기고 싶었다.

 

화포의 시작은 방염제다. 물들일 곳과 그렇지 않을 곳을 구분하는 것, 그것이 방염제의 역할이다. 그중 하나가 밀랍이다. 밀랍은 열에 쉽게 녹고 식으면 빠르게 굳는 성질이 있다.

 

자세한 표현이 가능하고 접착력도 강하다. 그래서 정교한 무늬가 요구되는 경우에 일찍부터 사용되었다. 밀랍 덕분에 화포다운 화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밀랍을 녹인다. 녹인 밀랍 용액에 곱게 간 숯가루를 섞는다.


이제 천에 무늬를 그릴 차례다. 붓으로 밀랍을 찍는다. 천에 점을 하나 그리면 꽃잎이 될 것이고 다섯 개를 빙 둘러 찍으면 꽃송이가 된다. 그리고 푸른색을 들였다. 가장 진한 색이 될 때까지 물들이기를 반복했다.

 

밀랍은 천에서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았다. 가장자리만 조금 미세한 금이 갔다. 끓는 물에 푸른색 천을 넣었다. 잠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천을 움직이자 밀랍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드디어 흰 꽃송이가 피어났다. 화포다. 

 

- 신상웅의 『쪽빛으로 난 길』들어가며 中-





'인디고 블루'

칠흑같은 어둠이 새하얀 달빛을 받아 보라빛이 서린 푸른 밤하늘을 닮은 색이다.


처음엔 온통 검정이나 진파랑으로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때론 푸르고 때론 자줏빛이 감돈다는 인디고 블루, 순우리말로는 쪽빛.

이 '쪽빛' 단 한가지 색에 미친 사람, 아니 사람들이 있었다. 



동양화를 전공한 저자는 일찍부터 염색 그것도 쪽을 이용하여 무명천을 쪽빛으로 물들이는 일에 매혹되었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으리라. 말그대로 그냥 어떤 것에 마음이 홀려 버린 것('매혹')이다. 매혹엔 이성적인 판단도 합리적인 이유도 들어설 자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쪽빛이 좋아 쪽빛 하나만 바라보고 걸어간 길이었으리라.


중국 구이저우의 소수민족인 먀오족을 만나고, 태국과 베트남 북쪽 산악지대에 흩어져 산다는 몽족을 찾아가는가하면, 일본의 교토까지 그의 발길은 이어졌다.


타박타박 발길 닿는대로 써내려간 그의 문장들은 객창감(客窓感)이 잔뜩 묻어나 있어 여행서로도 부족함이 없지만, 다양한 현지 정보나 멋스러운 여행지의 사진들을 기대한다면 번짓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셈이다.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다.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아 일반 독자를 주눅들게 만드는 문사들의 우쭐거림도 없고, 제멋에 혹은 경제적인 목적으로 자신의 행적을 자랑하거나 판매하려는 전문 여행꾼들의 감각적인 사진이나 달달한 문장들도 없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짧게 머물다 떠나는 이방인이야말로 전통적인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폭력 그 자체라는 걸...

누구에게나 너무 절절해서 성스럽기까지 한 생존, 그 현장에 서있는 사람들을 향해 눌러대는 카메라 셔터는 모욕이라는 걸...



이 뿐만 아니다. 그는 전통과 혁신의 변증법적인 관계도 놓치지 않는다. 




시대는 늘 새로운 사고를 요구하고 그래서 현재는 늘 과거와 다투게 마련이다. 사람이든 문화든 마찬가지다. 게다가 미래라는 종잡을 수 없는 변수가 끼어들면 사태는 한층 복잡해진다. '전통'과 '혁신'이라는 케케묵은 질문을 피해 갈 수는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혁신은 변화에 대한 요구이며 변화는 생존과 직결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전통이라는 우물, 깊이가 얕건 깊건 수량이 많건 적건 그곳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전통이라는 이름의 거미줄은 생각보다 질기고 촘촘하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 하는가. 루쉰 역시 그 문제에 직면했다. 루쉰이 전통의 모래밭에서 건져 올린 사금은 무엇이었을까.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는지 루쉰은 유언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구인들은 임종이 다가오면 남에게 용서을 구하거나 자신도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고 했다. 내게도 원한을 품은 자들이 많다. 만약 요즘 사람이 물어온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오랜 생각 끝에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들이 맘껏 원망하도록 두자. 나 역시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 신상웅의 『쪽빛으로 난 길』213쪽 中-



'전통을 위해 혁신을 포기해서도 안 되며, 혁신을 위해 전통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 둘이 치열하게 싸우도록 그냥 둬라!'


루쉰은 역시 루쉰이다.

루쉰의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나 또한 읽지 않은 것과 같고,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것과 진배없다. 정좌하고 그의 작품을 읽으면 별재미 없고 주제파악도 쉽지 않지만, 이처럼 뜻밖의 곳에서 마주치게 되고 뜨거운 공명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린 때때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하고, 정의내리려하며, 선택하려고만 하는 건 아닌지...

그냥 둬도 되는 일, 그냥 둬야 되는 일도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




이 책의 저자 역시 전통을 지켜야한다는 거창한 의무감도 뭣도 아닌, 그냥 자신이 좋아서 쪽빛으로 난 길을 걸었다. 

그리고 자기와 같은 길을 걸었거나 걷고있는 사람들을 만났고, 무슨 대단한 결의나 약속도 없이 그저 눈빛만으로 서로 깊은 공감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자신과 결도 다르고 격도 달랐을 사람들....

같은 시간을 살면서도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그들에게 저자는 호기심도 존경심도 아닌, 똑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마음을 나누었으리라. 




(..........)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무말도 아무것도 하고 싶은 않은,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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