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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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만난 건 작년 봄의 일이었고, 나에게 남겨진 그의 첫인상은 '불친절'이었다. 

'어머나, 이렇게 불친절한 작가도 다 있구나....'싶었다.

이야기가 풍부한 것도 결말이 깔끔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작품마다 주제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도 독특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식빵을 우유나 커피도 없이 씹는 맛이랄까...

달지도 쓰지도 않은 그런 심심한 맛이 별 것 아닌 우리네 일상과 엇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올봄,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 방송에서 그를 두번째로 만났다.


『대성당』에 실려 있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작품이었고, 예전에 읽었던 터라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 울컥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젊은 부부에게 자신이 방금 구운 빵을 대접하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위로하는 초로의 빵집주인 모습에 기어이 눈물이 차올랐다. 

누구나 살다보면 '실수'라는 걸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실수에 악의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누군가에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 점이다. 상처입은 이들 앞에서 나는 그저 오해했거나 조금 부주의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일이 아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아이를 살짝 친 운전자 역시 악의는 조금도 없었다. 백미러로 바로 일어서는 아이를 보고는 그저 '별일 아니려니...'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의사 역시 검사 결과 이상소견이 없었기에 그저 가벼운 뇌진탕으로 며칠 지나면 아이가 의식을 회복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빵집주인 역시 어린 아들의 생일케익을 주문해놓고는 찾아가지 않는 젊은 엄마가 조금 괘씸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이는 살아나지 못했고 30대 젊은 부부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그가 떠올랐다.
일년 전, 나에게 '불친절'이라는 첫인상을 남기고 사라졌던 레이먼드 카버...
그리고 그제서야 그날이 세월호 참사 1주년이라는 거... 그 누구도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는  거... 그래서 뜻밖의 사고로 자식을 잃을 수 밖에 없었던 부모를 위로하기 위해서 정규방송 대신 특별방송의 형식으로 카버의 이 작품 전편을 낭독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추가로 알게 된 사실들도 있다.
카버의 작품들은 한번 읽으면 안 된다는 거... 두번 세번 네번... 거듭 거듭 읽어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 순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

​1938년생인 레이먼드 카버는 제재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다. 좋은 교육이나 문화적 혜택은 커녕, 화장실이 없는 집에서 유년을 보낸다.
그리고 19살에 예상치 못한 결혼을 하고...  
20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생계를 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한다. 안톤 체홉을 좋아했으며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에겐 작품을 쓸 장소도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는 좁고 시끄러운 집을 떠나 자신의 픽업트럭에 앉아 운전대를 책상 삼아 글을 썼다. 
원고료를 빨리 받기위해 짧은 단편만을 쓸 수 밖에 없었고, 이 짧은 작품마저도 편집자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편집되고 가위질당하기 일수였다. 

원문의 반 이상이 잘려나간 상태로 출간된 자신의 작품들을 보면서 카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흔 아홉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가 죽음을 앞두고 매달린 일이 다름 아닌 자신의 작품들을 원상복구시키는 일이었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그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카버의 작품들이 원작 그대로 복구되어 재출간되었다.

그 유명한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원제목인「Beginners(풋내기들)」를 표제로 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카버와는 분명 다르지만 훨씬 더 카버다운 카버를 만날 수 있다.  

카버의 3대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만큼은 영어 원문으로 읽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또 들었지만, 영어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한국어 번역본을 읽었다.




'헉....'

사랑에 대해서 이처럼 신랄하고도 적확하게 표현하다니...
(그것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리가 사랑이 뭔지 얼마나 알겠어?" 허브가 말했다. "뭐 그건 내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이런 얘기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내가 보기에 우린 사랑에 순전히 풋내기들이야.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사랑하지, 그건 의심하지 않아. 난 테리를 사랑하고 테리도 날 사랑해, 또 두 사람도 서로 사랑하고.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랑이 어떤 건지는 알 거야. 성적인 사랑, 파트너가 되는 상대를 향한 끌림 같은 거, 그리고 아주 평범한 일상적인 사랑, 상대라는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 상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 일상적인 사랑을 구성하는 사소한 것들도 있지. 말하자면 육체적인 사랑이랄까, 그런 거랑 음, 정서적인 사랑이랄까, 날마다 서로 아껴주는 사랑 말이지. 그런데 가끔은 내가 분명히 전처도 사랑했을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사랑했어, 그건 확실해. (...)


 "여하간 난 한때 전처를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여겼고 아이도 낳았어. 근데 이젠 꼴도 보기 싫거든. 정말로.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랑은 어떻게 된 걸까? 그냥 지워지기라도 한 걸까,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처럼? 그 사랑이 어떻게 된 건지 난 그게 궁금해. 누가 얘기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


 "우리 중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ㅡ이런 얘기 해서 미안ㅡ하지만 우리 중 누군가에게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상대는, 남은 배우자는 얼마 동안은 애도하겠지만 결국 다시 사랑하게 되고 조만간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고, 그럼 이 사랑이라는 것도ㅡ맙소사, 이걸 어떻게 이해하겠어?ㅡ 그것도 다 그저 추억으로 남는다는 거야. 추억조차 안 될지도 몰라. 어쩌면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말이 틀려? 내가 아주 헛소리를 하는 건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내가 틀렸으면 좀 알려줘. 나도 알고 싶어, 난 도저히 모르겠어,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풋내기들」 中-


마치 진공상태로 빨려 들어간 듯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두군거리는 내 심장의 움직임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듯, 대형서점의 외서 코너로 향했고...

그 다음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대성당​」속의 집주인 남자처럼 장님의 손을 맞잡고 연필로 대성당을 그려나가듯,  그렇게 영어 원문을 따라갈 수 있었고...

(...) and it ought to make us feel ashamed when we talk like we know what we're talking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난 카버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마치 사랑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해. '



카버를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바로 이거다.


부.끄.러.움.



카버의 작품들은 말할 수 없이 불친절하지만 그 불친절함을 견뎌낸다면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신의 문학적 스승으로 카버를 꼽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하루키가 들었던 바로 그 소리...

 




"진이 다 떨어졌어." 멜이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테리가 물었다.

"나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모두의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방이 어두워졌는데도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내고 있는, 그 인간적인 소음을 나는 들을 수 있었다."

-by 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정영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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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윈터 리미티드 에디션) 세계문학의 천재들 1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들녘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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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서점 안이었다. 

서가와 서가 사이의 좁은 통로에 반백의 젊은(?)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편안한 복장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서가에 등을 기대고 두 무릎을 가지런히 모은 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흰머리가 그대로 들어난 긴 커트머리와 군살없는 날씬한 몸 그리고 코끝에 걸려 있는 작은 돋보기...


아직 할머니라고 하기엔 이르고 아줌마라고 하기엔 더이상 어울리지 않는, 이와 같은 연령대에 속하는 여성들은 주로 자녀의 결혼이나 결혼생활에 당당히(?) 개입하고 자신과 가족의 건강에 관심이 많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TV시청이나 종교생활 혹은 친목도모로 채운다. 그래서 병원이 아니라면 주로 평일 한낮의 지하철안이나 음식점 혹은 종교적인 장소나 스포츠센터 등에서 마주친다. 그리고 대개는 무리지어 있고 소란스러우며 거침없이 행동한다.(고 줄곧 생각해왔더랬다.)



이런 선입관을 깨는, 다소 낯선 풍경에 묘한 감동이 일었다.


가볍게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향하는 낯선 시선을 확인하는, 무심한 듯 여유있는 태도까지...


그녀에게 다가가 잠시만 그옆에 머물고 싶어졌다. 왠지 그녀라면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줄 것만 같았다.


그 짧은 순간, 어쩌면 나는 '이탈'을 감행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가 어느날 갑자기 모든 일상을 뒤로 하고 홀연히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탔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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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익숙한 삶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스위스 베른의 한 대학에서 라틴어을 가르치는 교수가 수업 도중 그냥 나가버린다. 그리고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언어의 연금술사')의 저자를 찾아 나선다. 저자는 이미 30년전 리스본에서 죽은, 아마데우 프라두라고 불리웠던 사람이다.




자기 삶과는 완전히 달랐고 자기와는 다른 논리를 지녔던 어떤 한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일까. 이게 가능할까. 자기 시간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자각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호기심은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 -p154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면서 선택되어질 뻔했으나 그렇지 못한 저 길에 대한 꿈을 언제나 품고 살아간다. 그러나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수도 있다는 상상은 쉽게 하지 못한다. 영화나 소설을 대할 때에도 '내가 극중 주인공이 된다면...?' 과 같은 가정을 할 뿐, 나를 버리고 철저히 극중 주인공이 되어보는 경험은 섣불리 하지 못한다. 우리의 사고는 스스로 인식하는 테두리안에서만 작동하고 수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식되지 않는 부분들, 소위 무의식의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냥 사라져 버리는 걸까? 의식의 세계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을 뿐만 아니라 의식의 세계를 규정하고 심지어 조정한다고까지 알려진, 바로 그 세계말이다.   



 

_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p32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바로 이 '나머지' 부분들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라 하겠다. 내가 삶속에서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제대로 표현되어지지 못한 것들이 어쩌면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메세지는 강렬하다 못해 현기증마저 일으킨다.  



물론 작가가 인터뷰에서 밝혔듯 모든 사람들이 일탈을 꿈꾸고 감행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자기 내면과 현실 사이에서 '주춤'거리는 사람일수록 자신에 대해 많이 알고 있거나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익숙한 일상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탈출한 그곳 역시 익숙해지면 또 다시 탈출을 시도한다. 익숙함에서 낯섦으로의 탈출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삶은 그렇지 않은 삶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다채로울 수밖에 없다.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흑과 백의 세계만 경험한다면 이들은 총천연 컬러의 세계를 경험한다.



_영혼의 그림자.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그러나 내가 고민하는 진짜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정말 고민스러운 문제는 이런 이야기에 도대체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있기나 할까라는 것. 외모에 관한 이야기에는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는? 이 여행이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p222~223


현실이 딱히 불만족스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연듯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이제 때가 온 것일지도 모른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야 하는 바로 그 때...

나 아닌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서야 할 바로 그 때...





3주전에 읽었고 그 이후 몇 권의 책들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잔상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죽기전에 꼭 한번 다시 읽고 싶은 책 중에 한권이 될 것만 같다.



끝으로,

얼마전 대형서점에서 내 시야에 포착(?)되었던 그 젊은 할머니가 읽고 있던 책이 어쩌면 파스칼 메르시어의『리스본행 야간열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쳤던 그 순간, 할머니의 눈빛은 분명 이 곳이 아닌 저 곳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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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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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물질과 부딪치면 반사/굴절되거나 흡수된다. 그런데 어떤 빛이 어떤 방향으로 반사/굴절되고, 어떻게 흡수되는지 그 구체적인 매커니즘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누구도 삶이 어떤 방식,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만약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계가 이처럼 비전형적이고 무작위적인 빛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우리 삶은 무수한 기억의 조각들로 모자이크되어 있는 건 아닐까.



앤드루 포터의「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우리 삶 속을 떠다니는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 중, 어느 특별한 한 조각에 관한 열편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가 멘홀에 빠져 죽던 순간이거나, 서서히 사이가 벌어져가는 부모님의 모습이거나, 형이 저질렀을지도 모를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한여름 밤의 열기거나, 혹은 사랑했지만 아니 사랑했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상실감이다.



그 구멍은 탈 워커네 집 차고로 이어지는 진입로 끄트머리에 있었다. 지금은 포장이 되어있지만, 12년 전 여름, 탈은 그 구멍 속으로 들어가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다.구멍



나는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그해 여름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때는 아버지의 정신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우리와 '떨어져'있던 내내 사실은 아버지가 시내의 한 모텔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어머니가 여전히 아버지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는 것이나 일이 끝나고 저녁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 삶의 뭔가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코요테



내 형에게 일어났던 그 모든 일은 이제 지나갔고, 나는 지금은 형을 미워하지 않았다고 편히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형을 둘러싼 소문들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떠돌았을 때 내가 얼마나 굴욕적이었는지, 그 기억만은 여전히 그대로다. 「강가의 개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 왜 내가 강의실을 나가지 않았는지, 그러기는커녕 왜 강의실 앞쪽으로 곧장 걸어가 로버트에게 시험지를 내밀었고, 그가 내 풀이를 살펴보는 동안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는지 설명하기가 힘들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그 저녁이 자꾸만 떠오른다. 나는 어머니가 이윽고 자신을 추스르던 모습,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하던 모습, 방에서 내려온 누나에게 미소를 짓던 모습, 그리고 그 후 개수대 앞에 서서 마치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주리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마치 저 멀리 있는 그림자가 뜰 가장자리에서 걸어 나와 자기를 되찾아갈 것이라고 아직도 믿는 듯이, 그렇게 간절하게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코네티컷」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절대 지워지지 않을 기억들...

지워버릴수도 간직할수도 없는 기억들...


미워할수도 용서할수도 없고, 떠날수도 머물수도 없는 사람들...

 

이들은 좀체 마음을 떠날 줄 모르는 한 마디를 듣고, 상대방을 안심시키지 못할 게 분명한 한 마디를 하며, 나보다 나를 더 잘 이해했던 사람의 부고 소식에 통곡하는가 하면, 슬픔을 온몸으로 견디며 설거지 하는 엄마의 간절한 뒷모습을 떠올린다.



십여년 넘게 꼭꼭 잠겨있던 누군가의 마음속을 걸어들어갔다가 나온 것만 같다. 

잠겨있던 그 세월만큼,

컴컴하고... 축축하고... 따뜻하며... 아릿하다...




앤드루 포터, 난 당신이 마음에 든다.

과거가 아니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재와 현재의 삶 속에 미치는 영향과 그 과정을 포착한 당신의 '관점'이 마음에 든다.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스스로도 설명하지 못하는 자기 인식 너머의 세계에 대해 말하는 당신의 '화법' 또한 마음에 든다.  

뒷통수를 치는 반전도 극적인 전환도 그 어떤 인위적 장치도 하지 않는 당신의 '작법' 역시 마음에 든다. 

하여,

나의 우연한 이번 방문이 다음번 당신의 초대로 이어진다면 나는 기꺼이 그 초대에 응하리라...

.

.

.

.

.

.

 

나는, 지금 '비정상'이라는 걸 안다.

10여년이 흐른 뒤, 나는 지금을 어떻게 기억할까?

다른 모든 기억들과 뒤엉켜 특별한 인상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그런 평범한 생의 어느 한 조각으로 홀연히 망각되어질까...


아니면, 아니면,

지극히 '정상'이었던 내 삶이 기억과 부딪혀 반사/굴절되거나 흡수되어 스스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인식 너머의 어떤 세계로 접어든 순간으로 영원히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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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2
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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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이 세상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선한 사람,

다른 하나는 악한 사람,

나머지 하나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셋 중 어느 한 부류에 속할 테지만, 자기 자신만큼은 선하거나 아니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부류라고 여기지, 어느 누구도 스스로를 악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악한 사람은 언제나 타인이다. 설령 내가 때때로 악해지는 것도 언제나 악한 타인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모두가 선하거나 아니면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굳게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굳이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이가 있다.

 


 

노예제가 폐지된지 수십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흑백차별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태어나 살았고...

주민의 대다수가 열렬한 신교도인 곳에서 유일하다시피한 아일랜드계 가톨릭교도였으며...

촉망받는 젊은 작가의 길로 접어든지 얼마 안되 불치병에 걸려 서른 아홉 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고... 

단 두 편의 장편과 서른 한편의 단편으로 사후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남긴 여성.... 


바로, 플래너리 오코너다. 



그녀는 우리 마음속 어두운 골짜기를 비춘다.

그곳은 허위나 위선보다 더 깊고 까마득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그곳은 마치 보고도 보지 못하는 맹점(盲占)이나 사각지대(Blind spot)와 같다.



주인공들은 독실한 신앙인이거나 교양있는 교외의 중산층 아니면 운명을 따르는 순박한 (시골)사람들이다.

부모 대신 어린 손자를 돌보거나('검둥이 인형'), 오갈데없는 추방자를 일꾼으로 고용하는가 하면('추방자'), 불량 청소년을 친자식만큼 사랑한 상담사('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와 집단의 희생양 편에 서고자 한 젊은이들('파트리지 축제')이다. 이들은 모두 스스로를 선하다고 여겼으나 어느 순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거나 오히려 악한 사람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계시와 통찰은 거칠게 찾아온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평온한 일상에 침입한 불청객처럼...


충격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영상은 반복적으로 떠올라 독자를 괴롭힌다. 이쯤되면 불쾌감을 넘어 불안해진다. 등장인물들에게서 언뜻언뜻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일은 고통스럽다. 내 안의 맹점과 사각지대를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장 뽈레가 말했던가.

예술이란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끔 하는 거라고...


그렇다면 플래너리 오코너야말로 가장 효과적으로 문학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라 하겠다. 아니, 그녀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걸 보이게끔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계시와 통찰 그리고 용서(회개)와 사랑(구원)이라는 일반적인 노선을 따르길 거부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에드가 앨런 포와 도스토옙스키 역시 집요하게 '악'을 탐구했던 작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지향점은 언제나 깨달음을 통한 회개와 구원이었고 용서와 사랑이었다. 반면, 플래너리 오코너는 추락과 파멸이다. 계시와 통찰 이후, 그녀는 용서와 구원이 아닌 추락과 파멸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독자로 하여금 정신적인 충격과 불쾌감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녀의 작품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자, 그녀를 존 치버와 레이먼드 카버 그리고 제임스 설터와 애니 프루까지 쟁쟁한 영미현대 단편소설 작가들 가운데서도 'Best of best'로 손꼽는 이유이리라.     




플래너리 오코너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들었으나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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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 - 수의사 헤리엇이 만난 사람과 동물 이야기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제임스 헤리엇의 『사랑의 선물』과『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읽었다.


1916년에 태어난 저자(본명: 제임스 앨프레드 와이트)는 55세부터 1995년 사망할때까지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평생을 수의사로 일한 경험담을 책으로 엮어냈다.


 

그가 남긴 책들 중, 『사랑의 선물』이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면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는 성인을 위한 에세이로 부족함이 없다. 나 역시『사랑의 선물』을 읽을때는 사건 위주로 전개되어 흥미롭긴 했지만 깊은 사색이나 진한 감동을 받진 못했더랬다.

그런데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제임스 헤리엇을 수필 작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낮 구분없이 동물들과 시름해야하는 힘든 일상 속에서도 일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 그리고 자연과 동물에 대한 저자의 사랑은 마치 쉼없이 샘솟는 온천수마냥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준다.


 

사실, 수의사라는 직업은 과로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3D직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체구의 말이나 소의 바로 옆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새끼를 받아내는가 하면, 차도가 없는 동물 환자를 직접 안락사시켜야 하는 상황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동물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와 수시로 마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의사의 노고에 고마워하기는 커녕 탓만 하는 농부들의 무례함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육척 장신인 농장 일꾼 하나가 말 머리에 쒸운 마구를 단단히 움켜잡고 머리를 구유에 눌러대고 있는 동안, 나는 상처에 재빨리 요오드포름을 뿌렸다. 다행히 말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거대한 체구에서 발산되는 생명력과 힘이 손에 잡힐 듯했기 때문에, 말이 얌전한 것은 다행이었다. 나는 비단 봉합사를 바늘에 꿰고, 상처 가장자리를 들어올려 거기에 바늘을 꿰었다. 이어서 반대쪽 가장자리에 바늘을 꿰면서 이 일은 쉽게 끝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바늘을 잡아당기고 있을 때 말이 갑자기 껑충 뛰어올랐다. 돌풍이 휙 소리를 내면서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간 듯 한 느낌이었다.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134쪽-

 

 

내 판단은 틀렸다. 순식간에 덩치가 큰 말이 비척대기 시작했다. 거대한 말이 땅바닥에 쓰러진 순간, 내 발밑의 자갈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잠시 동안 말은 몸을 쭉 뻗고 모로 누워 있었다. 허공에 대고 발을 마구 흔들더니 곧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 잘생긴 말을 내가 죽이고야 말았다.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101쪽-

 

 

눈을 감아도 그 기괴한 얼굴과 고통에 못 이겨 내지르는 그 소름끼치는 울음소리를 기억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가장 가슴아픈 것은 두려움과 당혹감에 가득 한 눈,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이었다. 말 못하는 동물의 고통을 바라볼 때 가장 견딜 수 없는 바로 그 눈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쟁반에 놓인 넵부탈을 서둘러 집어들었다. 어쨌든 이 고통을 빨리 끝내주는 것은 그나마 수의사가 고통받는 동물에게 해줄수 있는 일이다.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187쪽-


 

기가 막혀서. 나는 차를 몰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고맙다는 말도, 잘 가라는 말도 하지 않고 불평만 늘어놓다니. 그리고 필요하면 구운 거위고기를 먹고 있는 나를 식탁에서 끌어내겠다고? 갑자기 분노의 물결이 밀려왔다. 빌어먹을 농부들! 농부들 중에는 무례하고 비열한 사람도 있었다. 브라운 씨는 내 머리에 찬물 한 양동이를 퍼부은 것처럼 효과적으로 내 축제 기분을 망쳐놓았다.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151쪽-

 

 


 

이처럼 언뜻봐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라는 건 자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저자는 수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매순간 생명의 경이로움과 삶의 기쁨을 깨닫게 해주면서 동시에 돈까지 벌게 해주는 이 일에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시골 수의사 노릇보다 쉽게 빌어먹고 살 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또 밀려왔다. 하루 24시간, 1주일 7일 내내 일은 거칠고 더럽고, 재앙에 가까운 사건이 터지고.

나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몇 분 후 눈을 떠보니,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나와 푸른 언덕을 비췄다. 햇살을 받아 눈 덮인 산등성이는 반짝반짝 생기가 돌았고, 튀어나온 바위 질벽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차창을 내리고 차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황무지의 공기는 선선하고 톡 쏘는 맛이 있었다. 평온함이 내 몸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내가 케틀웰 씨의 말에게 잘못한 게 아닐 거야. 항히스타민제가 가끔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 게지. 어쨌거나 차의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니, 오래된 느낌이 내 안에 차고 올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감정은 점점 더 강하게 흘러넘쳤고, 이런 황홀한 시골에서 동물들과 일할 수 있었서 좋았다. 요크셔 데일스에서 수의사 노릇을 하다니 난 복 많은 사내였다.

-「사랑의 선물」102쪽-


 

새끼 양을 받느라 3~4월을 정신없이 보낸 후, 5월과 6월 초순의 내 생활은 한결 느긋하고 푸근했다. 스켈데일 하우스는 등나무에 보랏빛 꽃이 만발해서 열린 창으로 꽃내음이 풍겼다. 아침에 면도를 할 때면, 거울 옆까지 뻗은 꽃송이의 진한 향기에 취했다. 목가적인 생활이었다. 때로는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아침 일찍 왕진을 나서면, 들판에는 희미한 빛이 반짝이고 높은 언덕 꼭대기는 안개가 자욱했다. 바다처럼 싱그러운 공기에는 초지에 점점이 피어난 수천 송이 야생화의 향기가 있었다. -「사랑의 선물」151쪽-

 

 

 

나는 이런 사람들이 진짜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성공이란 '궁극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근원적인 명제를 한시도 잊지 않고 실천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부와 명예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생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전기적 측면들이 여러 매체에 상당히 자세하게 소개되었습니다. 특히 강조된 것은 헤리엇의 청빈한 생활 태도였습니다.  책이 아무리 팔리고(그의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여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서 수천만 부가 팔렸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를 얻어도(그의 책을 대본으로 한 드라마가 영국 BBC방송에서 제작되어, 1978~80년과 1988~90년에 총 90회의 시리즈로 방영되었습니다), 헤리엇은 생활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와 함께 아담하고 소박한 침실 두 개짜리 단층집에서 계속 살았고, 마지막까지 온화하고 겸손한 시골 수의사였습니다.


<타임>의 인터뷰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토로가 실려 있습니다.

"나에게 성공이 가져다준 유일한 혜택은 생활 기반이 다소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나는 전에 하지 않은 일은 지금도 하지 않는다. 전에 사지 않은 물건은 지금도 사지 않는다.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다. 일을 하고 개들을 산책에 데려가고 친구들과 맥주 한잔하고...... 이런 생활이 좋다. 호화로운 생활이나 상류 사회나 값비싼 물건을 나는 천성적으로 싫어한다."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옮긴이의 말 中-

 

 

 

우리는 흔히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곤 한다. 나도 그랬다. 2,30대까지는 특별한 내일을 꿈꾸면서 평범한 오늘을 견뎌내곤 했다. 지금 이 순간은 아름다운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로만 여겼을 뿐, 내 삶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지 못했더랬다.

 

그러나 지금은, 평범한 일상의 위대함을 안다.

 

평범한 일상을 구축하고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힘겨운 싸움의 결과인지... 평범함을 견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이 인내해야 하며...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크고 작은 유혹들에 저항해야 하는지...

이제는 잘 안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시골 수의사라는 지극히 고생스럽고 단조롭고 심지어 비루할 수도 있는 자신의 일상을 견뎌냈다. 아니, 어디 저자인 제임스 헤리엇 한명 뿐이랴. 그의 기록들 속에 등장하는 농장 사람들 역시 '평범함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특별함'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증명해 준다.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힘들다는 그 평범한 진리...

내가 기쁘고 슬프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기쁘고 슬프다는 그 평범한 진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물도 사람과 똑같이 느끼고 아프다는 그 평범한 진리 말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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