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레이몬드 카버 지음, 정영문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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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처음 만난 건 작년 봄의 일이었고, 나에게 남겨진 그의 첫인상은 '불친절'이었다. 

'어머나, 이렇게 불친절한 작가도 다 있구나....'싶었다.

이야기가 풍부한 것도 결말이 깔끔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작품마다 주제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도 독특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식빵을 우유나 커피도 없이 씹는 맛이랄까...

달지도 쓰지도 않은 그런 심심한 맛이 별 것 아닌 우리네 일상과 엇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올봄,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 방송에서 그를 두번째로 만났다.


『대성당』에 실려 있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라는 작품이었고, 예전에 읽었던 터라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 울컥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젊은 부부에게 자신이 방금 구운 빵을 대접하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위로하는 초로의 빵집주인 모습에 기어이 눈물이 차올랐다. 

누구나 살다보면 '실수'라는 걸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실수에 악의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누군가에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 점이다. 상처입은 이들 앞에서 나는 그저 오해했거나 조금 부주의했을 뿐이라고 항변할 일이 아니다.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아이를 살짝 친 운전자 역시 악의는 조금도 없었다. 백미러로 바로 일어서는 아이를 보고는 그저 '별일 아니려니...'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의사 역시 검사 결과 이상소견이 없었기에 그저 가벼운 뇌진탕으로 며칠 지나면 아이가 의식을 회복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빵집주인 역시 어린 아들의 생일케익을 주문해놓고는 찾아가지 않는 젊은 엄마가 조금 괘씸했을 뿐이다.
​그런데 아이는 살아나지 못했고 30대 젊은 부부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그가 떠올랐다.
일년 전, 나에게 '불친절'이라는 첫인상을 남기고 사라졌던 레이먼드 카버...
그리고 그제서야 그날이 세월호 참사 1주년이라는 거... 그 누구도 진심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는  거... 그래서 뜻밖의 사고로 자식을 잃을 수 밖에 없었던 부모를 위로하기 위해서 정규방송 대신 특별방송의 형식으로 카버의 이 작품 전편을 낭독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추가로 알게 된 사실들도 있다.
카버의 작품들은 한번 읽으면 안 된다는 거... 두번 세번 네번... 거듭 거듭 읽어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거... 그리고,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 순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

​1938년생인 레이먼드 카버는 제재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다. 좋은 교육이나 문화적 혜택은 커녕, 화장실이 없는 집에서 유년을 보낸다.
그리고 19살에 예상치 못한 결혼을 하고...  
20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생계를 위해 닥치는대로 일을 한다. 안톤 체홉을 좋아했으며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그에겐 작품을 쓸 장소도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는 좁고 시끄러운 집을 떠나 자신의 픽업트럭에 앉아 운전대를 책상 삼아 글을 썼다. 
원고료를 빨리 받기위해 짧은 단편만을 쓸 수 밖에 없었고, 이 짧은 작품마저도 편집자의 의도대로 이리저리 편집되고 가위질당하기 일수였다. 

원문의 반 이상이 잘려나간 상태로 출간된 자신의 작품들을 보면서 카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흔 아홉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가 죽음을 앞두고 매달린 일이 다름 아닌 자신의 작품들을 원상복구시키는 일이었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그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마침내 카버의 작품들이 원작 그대로 복구되어 재출간되었다.

그 유명한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의 원제목인「Beginners(풋내기들)」를 표제로 한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카버와는 분명 다르지만 훨씬 더 카버다운 카버를 만날 수 있다.  

카버의 3대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만큼은 영어 원문으로 읽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또 들었지만, 영어에 자신이 없었던 나는 한국어 번역본을 읽었다.




'헉....'

사랑에 대해서 이처럼 신랄하고도 적확하게 표현하다니...
(그것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리가 사랑이 뭔지 얼마나 알겠어?" 허브가 말했다. "뭐 그건 내 이야기도 마찬가지야, 이런 얘기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내가 보기에 우린 사랑에 순전히 풋내기들이야. 우린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사랑하지, 그건 의심하지 않아. 난 테리를 사랑하고 테리도 날 사랑해, 또 두 사람도 서로 사랑하고.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랑이 어떤 건지는 알 거야. 성적인 사랑, 파트너가 되는 상대를 향한 끌림 같은 거, 그리고 아주 평범한 일상적인 사랑, 상대라는 존재를 사랑하는 마음, 상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 일상적인 사랑을 구성하는 사소한 것들도 있지. 말하자면 육체적인 사랑이랄까, 그런 거랑 음, 정서적인 사랑이랄까, 날마다 서로 아껴주는 사랑 말이지. 그런데 가끔은 내가 분명히 전처도 사랑했을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사랑했어, 그건 확실해. (...)


 "여하간 난 한때 전처를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여겼고 아이도 낳았어. 근데 이젠 꼴도 보기 싫거든. 정말로.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랑은 어떻게 된 걸까? 그냥 지워지기라도 한 걸까,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은 일처럼? 그 사랑이 어떻게 된 건지 난 그게 궁금해. 누가 얘기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


 "우리 중 누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ㅡ이런 얘기 해서 미안ㅡ하지만 우리 중 누군가에게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상대는, 남은 배우자는 얼마 동안은 애도하겠지만 결국 다시 사랑하게 되고 조만간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고, 그럼 이 사랑이라는 것도ㅡ맙소사, 이걸 어떻게 이해하겠어?ㅡ 그것도 다 그저 추억으로 남는다는 거야. 추억조차 안 될지도 몰라. 어쩌면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말이 틀려? 내가 아주 헛소리를 하는 건가? 난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내가 틀렸으면 좀 알려줘. 나도 알고 싶어, 난 도저히 모르겠어,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풋내기들」 中-


마치 진공상태로 빨려 들어간 듯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두군거리는 내 심장의 움직임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듯, 대형서점의 외서 코너로 향했고...

그 다음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대성당​」속의 집주인 남자처럼 장님의 손을 맞잡고 연필로 대성당을 그려나가듯,  그렇게 영어 원문을 따라갈 수 있었고...

(...) and it ought to make us feel ashamed when we talk like we know what we're talking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난 카버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마치 사랑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해. '



카버를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건, 바로 이거다.


부.끄.러.움.



카버의 작품들은 말할 수 없이 불친절하지만 그 불친절함을 견뎌낸다면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자신의 문학적 스승으로 카버를 꼽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하루키가 들었던 바로 그 소리...

 




"진이 다 떨어졌어." 멜이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테리가 물었다.

"나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모두의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방이 어두워졌는데도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내고 있는, 그 인간적인 소음을 나는 들을 수 있었다."

-by 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정영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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