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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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마루야마 겐지의 또 다른 수필집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을 읽었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가 이십대 청춘을 위한 책이라면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는 4,50대 그중에서도 퇴직한 이들을 위한 책이라 하겠다. 단순히 귀농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라고만 생각하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가 한방 제대로 먹었다. 

 

마루야마 겐지는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고... 또 누구에게는 구체적인 미래이자... 암담한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마약과 같은 '귀농(歸農) 혹은 귀촌(歸村)'의 이유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가 싶더니만, 처음부터 오금이 저릴 정도로 핵심을 파고든다. 역시, 이름만으로도 관록이 느껴지는 작가는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  

 

 

'당신은 홀로서기를 한 사람입니까?'

당신은 그동안 부모에 의존하고, 학력에 의존하고, 직장에 의존하고, 사회에 의존하고, 국가에 의존하고, 가정에 의존하고, 술에 의존하고, 경제적 번영의 시대에 의존하면서 이럭저럭 수십 년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홀로 설 기회를 그때마다 잃고, 그저 공부나 일을 하면서 겪은 혹독함 정도를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당신은 자신에게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또 도피해 온 것은 아닐까요.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몸으로 익혀 두지 않으면 안 될 조건을 그저 지식으로만 머릿속에 채워 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직장이라는 후원자를 빼앗긴 당신은 자신의 판단만을 강요받는 진정한 어른의 처지로 내몰리자 그런 어린애 같은, 너무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발상에 휘둘리고 만 것은 아닐까요.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7~18 中-

 

 

 

'당신은 홀로서기를 한 사람입니까?'

이 얼마나 무섭도록 정확한 질문이란 말인가.


老작가는 육십 평생을 살아온 기껏해야 자신보다 10살 정도 더 젊을 뿐인 노익장들을 대상으로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문체도 존칭체이고 활자도 큼지막한, 고작 200여 페이지 남짓한 수필집일 뿐이거늘...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시작부터 숨통이 조여온다.

 

 

아름답던 자연은 얼마든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돌변할 수 있고, 순박하던 마을 주민들은 예의가 없고 고집스러울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주민을 괴롭힌다.


 

시골에서는 서민기질을 실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 노골적인 모습에 기겁을 하고 문화적 충격도 받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강하고 힘있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매달리고, 때론 신과 부처 같은 것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밖에 모릅니다. 당신은 이상하리만큼 보수적이고 윗사람게에 굽실거리는 이들에 둘러싸였을 때 놀라 심지어 버럭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떤 사람들을 구성하는 특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연해질 것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50 中-

 


이처럼 시골사람들이 도시인과는 사뭇 다른 근성을 갖게 된 배경을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오랜 세월 혹독한 자연 환경과 싸우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협동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강자에게 복종해야한다는 농경민족 특유의 속성이 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라고....

특히, 시골사람들을 정의할 때 곧잘 동원되곤 하는 '순박하다'거나 '소박하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더 나아가 본능의 힘에 따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거라고...

그리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도시에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만 농촌에 남았기 때문일 거라고...

 

 

한편, 일본이나 한국이나 농촌은 주로 고령자들만 남아 있다. 즉, 젊은 사람들이 농촌에 남지 않으려 한다. 인생의 후반부를 농촌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왜 이들은 농촌에 남지 않는걸까? 설령 젊어서 도회지로 나갔더라도 은퇴 이후엔 그 좋은(?) 고향으로 되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 귀촌이나 귀농을 하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골 출신이 아니거나 시골에서 태어났더라도 농촌에서의 삶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걸까?


그건, 그만큼 농촌 생활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사를 짓지 않고 삶의 터전만 농촌으로 옮기는 귀촌(歸村) 역시 생각만큼 쉽지 않다.

솔직히 도회인들이 그리는 귀촌생활이란 도시의 편리함과 생활 습관이 보장되는 별장 생활이지 않을까.

물론, 별장을 소유하고 관리할 만큼 건강과 재산을 갖고 있다면 문제 될 건 없다마는...


 

 

작가는 이 밖에도 현지인들만 이주자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같은 이주자들 중에도 흑심을 품고 시골로 흘러들어온 사람들도 있으니 주의를 당부한다. 이들은 주로 퇴직금 등 목돈을 갖고 있는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려는 사기꾼 아니면 사이비 교주를 사칭하며 돈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피폐하게 만드는 범죄자일 확률이 크다고 한다.


 

마루야마 겐지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그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몇가지 특징들까지 짚어준다.


 

자연이 너무 좋아서,

자연 속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멸종 직전에 있는 야생 동식물을 지켜 주고 싶어서,

원시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지방의 토착 문화나 예술을 세계로 알리고 싶어서,

사랑의 상처를 입고 말아서,

질문한 것도 아닌데 상대편에서 이런 이유를 늘어놓는다면 일단 그 사람은 상대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

또한 이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아주 많습니다.

청산유수 같은 어조, 풍부한 표정, 한없이 밝고 그늘이 없는 웃음 띤 얼굴, 아무리 시시껄렁한 자랑이더라도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이따금 맞장구도 쳐주는 등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자세, 너무나 드라마틱한 경력, 강한 자기 도취,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36~137 中-

 


도시와 달리 시골은 문단속 등 방범과 치안 의식 및 시스템이 부족하거나 열악한데다가 생활비가 저렴하다는 등의 이유로 경제범들이 흘러들어 숨을 공산이 크다. 뿐만 아니라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와는 달리 집과 집 사이가 멀어서 강력 범죄가 의외로 손쉽게 일어날 가능성 또한 크다. 그리고 목가적인 한낮의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해만 지면 펼쳐지는 칠흑같은 어둠이 주는 공포감은 작가의 표현대로 수십년이 지나도 적응되지 않는, 그런 근원적이고도 원초적인 두려움일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다 극복해내고 시골에 터를 잡은 은퇴자일지라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서서히 나이를 먹게 되면서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일이 늘어나고... 간단한 일조차 할 수 없을만큼 기력이 쇠약해질 것이며... 부부 중 어느 한명이 먼저 타계하면서 반드시 홀로 남겨지는 노인네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에 대한 대책은 커녕 당연한 이와 같은 기본적인 사실조차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시골로 내려오려한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참으로 좋은 지적이라 하겠다.


 

이밖에도 작가는 노화와 죽음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다. 가장 가까운 자연인 자신의 몸부터 먼저 돌봄으로써 말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연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감정이 행하는 대로, 본능이 행하는 대로 사는 것이라고 오해하거나 자신의 형편에 맞는 해석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자연이라는 말을 남발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빠져든 자신을 변호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자연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홀로서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


 

자연과 자연속에 사는 동식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완벽한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어 아름다운 것입니다. 가장 친근하고 중요한 자연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 자연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자연을 지키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


 

사회적 지위를 만족시켰는지 아닌지로 승리자와 패배자를 가르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진정한 패배자란 자신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거나 다스릴 방향을 잡지 못한 사람을 이를 때 써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지성과 이성에 부합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결코 그 반대는 아닙니다. 동물로 태어나 동물인 채로 일생을 보낸 인간이야말로 진짜 패배자입니다. 패배자인 당신을 자연이 환영해 줄 리는 절대 없습니다. 오만한 신념에 젖어 자연에 깊숙이 헤치고 들어온 당신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릴 것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45~148 中 부분 발췌-

 


그저 단순히 귀농이나 귀촌에 대한 환상을 통해 위안이나 받고, 구체적인 정보나 얻을 요량이었는데...  책은 어느 순간 삶의 의미를 되묻는 진지한 철학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변해버렸다.

 

한참이나 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음과 같은 문장이 펼쳐져 있었다.


 

당신은 인간입니다. 본능을 거스르려면 그럴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을 겸비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분명 원숭이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날, 상식의 끈이 뚝 끊어져 버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버린 것일까요. 일 자체나 대인관계에서 오는 긴장을 느낄 필요가 없어지고 시간에 구속당하지 않게 되어 마음이 완전히 풀어졌기 때문일까요. 분명히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원인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홀로서기를 한 성인(남성)이 되지 못했고 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어린애의 혼을 가진 채 60년을 지내왔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받아야만 움직이고 자신의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목각 인형, 타율적인 빈껍데기 인생밖에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당신은 다시금 어린애 시절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47~156 中 발췌 -

 


'뭐, 이 정도 가지고....'

살짝 오기가 솟구쳤다.

그러나 '나도 인생 살만큼 살았는데.... 뭘...' 하는 자만심은, 작가가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자기 자신에게 수십번 속삭였을 다음 문장들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을 진정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지, 결코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도는 달라도 그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미더워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을 약한사람으로 단정해 자기 외의 사람에게 의지하려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혹 신과 부처 같은 존재가 실제로 있더라도 그것은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닐 것이다. 신이나 악마가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당신 자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요컨대 어느 쪽을 택할지는 당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정에 흔들리지 않고 본능에 빠지지 않으며 의지력을 성실히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신이며 부처이고, 그 반대의 힘은 악마이며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이견을 내놓는다면 그것이 그가 사기꾼이나 악당의 무리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90~191 中-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두 눈이 나도 모르게 감겼다.

시골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던 마루야마 겐지...

그가 진심으로 해주고 싶었던 말은, 다름 아닌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였다...


 

 

진정한 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빛납니다.

진정한 감동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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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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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난 이 남자에 빠져 있다.

이름하여 마루야마 겐지...

칠순을 훌쩍 넘긴, 일본의 老작가다.


 

이 작가에 대해서 나는 이십대 시절 그의 첫번째 소설작품이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여름의 흐름>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작품은 감옥에서 사형을 집형하는 사형집행자 이야기였던 것 같고... 


그의 적잖은 작품들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어느 시인(故 이문구시인이 아닌가 싶지만 정확하진 않다.)은 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겐지에 울다'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는 풍문도 꽤 널리 퍼져 있다.


 

소설을 시(詩)처럼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그의 작품은 읽기가 참 어렵다.

그런 그가 요즘 이웃나라 한국에서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얼마전 TV의 심야 책소개 프로그램에서 그의 수필집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작품이 소개될 정도로...


이와 더불어서 책 제목만큼이나 저돌적인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라는 그의 또 다른 수필집이 시선을 끌었다. 사실은, 작년 가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었지만 평소 이용하는 도서관에는 소장되어 있지 않아 살짝 포기하고 있던 차에 이번엔 구입해서라도 읽겠다는 각오(?)로 수소문을 했고 마침내 읽고 말았다. 역시, 발품을 조금만 더 팔면 안되는 게 없거늘.... 늘, 그놈의 게으름과 자포자기에 발목이 붙잡혀 주저앉고 마는 게 문제다. 



 

 

한마디로 이 책은 청춘들에게 '천기누설'과도 같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가 한국 사회에 눈높이를 맞춘 '청춘을 향한 고함'이라고 한다면, 마루야마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는 일본 상황에 맞춘 일본 '젊은이를 위한 외침'이라 하겠다. 


 

동물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자식에게 부양을 받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부모의 자식 사랑은 사실 노후 보장을 위한 겉포장에 불과하다는 일갈은 내 몸과 마음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부모란 이렇듯 애매모호한 존재다.

부모의 사랑에 거짓이 없다고 믿는 것은 부모 자신뿐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이 새끼에게 보이는 대가성 없는 사랑의 정반대 지점에 있는 이기적인 사랑. 안타깝게도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부모가 보이는 사랑의 진실이다. 오로지 자식을 어엿한 성인으로 키우는 것만이 목적인 부모는 너무도 적다. 더 나아가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네 힘으로 살아가라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자신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테니 네 인생에만 집중하라고 충고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부모는 더욱 적다. 부모의 희생물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자식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다 못해 자기 부모와 똑같은 부모가 되고 마는 자식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p20-

 

 


이 땅의 부모라면...? 특히, 자식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라면... ? 깊은 밤 홀로 깨어있을 때, 한번쯤은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왜 자식을 낳았는가?'

'자식에게 바라는 건 정말 자식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인가?'



 

겐지는 인생의 성인식은 '가출'로 시작해야 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둥, 너 하나만 보고 살아왔다는 둥.... 하는 부모의 만류와 땡전 한푼 없는 자신의 현실적 상황에 발목이 붙잡힌다면 이런 청춘은 영원히 독립적인 자유인이 될 수 없음을 명심하라는 준엄한 가르침과 함께 말이다. 아니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집 나가면 개고생'하기 때문에 집을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다 큰 자식을 집에 붙잡아 두려는 건, 부모 뜻대로 조정하기 위함이고...

다 큰 자식이 스스로 부모집에 눌러앉으려는 건, 집 나가 개고생하지 않기 위함이고...

서로 이와 같은 계산이 맞아 떨어져 불필요한 동거가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다. 



 

 

한편, 국가와 회사에 대한 겐지의 관점 역시 두 무릎을 치게 만든다.


 

국민에게 이 세상이 사랑과 친절로 가득하다는 착각과 솜사탕 같은 가치관을 심은 장본인은 결국 탐욕스러운 자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는, 국가라는 이름의 한 조직이다. 애당초 국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국가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할 고매한 정신과 능력의 소유자는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쩌면 존재할지 모른다는 환상조차 단 한순간도 품지 마라.  나라를 통치하는 자들은 국민이 국가의 정체를 단박에 꿰뚫어볼 만큼 현명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것이 본심이다. 그런가 하면, 너무 어리석어 평범한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인간이어도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어리석음과 노동의 정신에 반하지 않을 만큼의 현명함을 지닌 어중간한 국민을 이상적으로 여긴다. 또 그렇게 되기를 획책하면서 그 방침에 따라 세금을 쓴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p60~71-


 

고용주의 목적은 고용인을 만족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에 있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 사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한다는 인사의 당연한 철칙이 올바르게 지켜지고 있는 직장은 극히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의 잠재 능력을 간파하는 안목을 지닌 상사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능력 있는 부하에게 두려움을 느껴, 즉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까 봐 겁을 먹고 질겁해 부하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을 확률이 훨씬 크다. 그런 세계다. 직장상사에게 부하란, 출세의 도구일 뿐이다. 노동자라는 호칭에 속아서는 안된다. 그 실질적인 처지는 바로 '노예'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p99~104 中-

 

 


국가와 회사가 이렇다면 종교는 또 어떨까...?

상처입은 마음의 피난처가 되어주고... 상처를 치료해 준 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줄... 그런 자비심 가득한 신을 만날 수 있을까?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신이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 역시 이 점을 거듭 역설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나약함과 교활함에서 신이라는 환상이 태어났노라'고...



 

어이가 없고... 억울하고... 심지어 화가 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자꾸 고개 돌려 외면해봤자 자신의 모습만 더 초라해질 뿐이다.

인간 역시 자연계의 다른 생명체처럼 우연에 의해 이 땅에 왔고 정해진 운명에 따라 죽는 것 뿐이다. 애당초 거창한 신의 부름이나 의지 따위는 없었다. 

사실, 우린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째서 나라에 애국하고 회사에 충성을 바치며 신을 찾아 나서는 걸까?


 

인간은 왜 영웅과 지배자와 강자를 원하는가.

인간은 모두 지배받고 싶어하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자신의 판단과 결단과 실천으로 살아가기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 고통을 누군가 대신 없애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p61-

 

 


신을 모르는 철없는 어린 시절엔 부모에게 의지한다. 아이에겐 부모야말로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급적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최대한 늦춘다. 적당한 복종과 반항 그리고 부모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이게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집(부모)을 떠나 세상밖으로 나와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부모를 대신하여 의지할 대상을 물색한다. 독재자라도 사이비 종교인이라도 상관없다. 나의 본질을 직시할 필요없이 삶의 안락함만 제공해준다면 기꺼이 영혼을 내어준다. 자유라는 이름의 영혼을....


 

일찌기 나는 독재자와 사이비 종교를 이끄는 리더가 아닌, 그들 주위에 모여있는 일련의 사람들의 정신 세계가 참으로 궁금했다. 그들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걸까? 그들은 자신들이 떠받들고 있는 존재가 어리석고 무능하다는 걸 진짜 모르는 걸까? 아니다. 그들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구호와 몸짓으로 또 다른 선량한 사람들을 선동하는 까닭은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쁜 지도자 못지 않게 소위 추종하고 옹호하는 세력과 가담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나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들때문에 악이 유지, 확대된다는 점에 비춰볼 때 더 악랄하다고도 볼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만 할까?


 

인간다움이란 지성쪽에 몸을 두는 것이다. 이는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삶과는 정반대의 삶을 의미한다. 감정과 본능에 따라 사는 것은, 요컨대 동물적인 삶의 방식이다. 동물다운 것을 인간답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p80~81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는 한 그런 것들에서 헤어날 수 없고, 헤어나려 몸부림 칠 필요도 없다. 살아있으면서 절대적인 안녕을 얻으려 한다면, 살아 있되 삶을 내던진 것이나 다름 없다. -p127


 

직관(감각)에만 의지할 뿐 생각하기를 포기한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셈이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아주 당연한 자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또 세상과 떨어져 있고, 진심이 변치 않는 성실하고 훌륭한 인물과 만날 수 없다. 따라서 경청할 가치가 있고, 생각하며 살도록 도와주며, 유익하고 위엄에 찬 말과도 조우할 일이 없다. -p196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한 마루야마 겐지의 생각은 '애절한 사랑 따윈 없다.'라는 단 한마디로 귀결된다.

국물도 건더기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다...


 

솔직히 말해서, 연애가 연애답게 느껴지는 것은 고작해야 서른살까지다. 그 이상이 되면 이미 연애와는 다른 것이 되고 만다. 물론 당사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어른의 사랑이라고 확신하고 자부심까지 느끼기도 하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저 추잡하기만 한,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리고 싶어질 만큼 끔찍한 교미에 불과하다고 냉소할 뿐이다. 본인은 그런 상황에 만족하니 제삼자가 뭐라 말한들 소용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작 그런 일이 아니면 인생에 변화를 줄 수 없는 것인가.

그 나이쯤 되면 그게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사람이 그렇게까지 추락하다니...

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일자리를 잃어 가면서까지 해야 할 일인가.

그러려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아도 좋지 않았는가.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p165~166 中-

 

 


이제, 알겠는가...?


 

인생이 무엇인지...?

또, 인간이란 무엇인지...?


 

 

이 책에는 마루야마 겐지 선생만큼 나이를 먹지 않아도 불혹만 되면 누구나 깨닫게 되는 진실이 담겨 있다. 

다만, 선생과 우리의 차이점이라면 그는 진실을 선택한 반면 우리는 침묵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왜냐고...?

그게 나의 안위에 편리하니까... 그래야 젊은 시절의 나처럼 어리석은 젊은이들이 더 이상 젊지 않은 나를,  떠받들고... 보필하면서... 자각도 하지 못한 채, 젊음을... 인생을... 탕진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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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의 인형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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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아이>에 이어서 장용민의 두번째 장편소설을 읽었다.

개인적으로 첫번째보단 두번째가 더 좋았다. 물론, 작가의 글쓰기 스타일에 적응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편보다 이야기 구조가 훨씬 더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집중이 잘 됐다.

 

이 느낌, 뭐랄까...?

아, 맞다! 퓨전 음식을 먹은 그런 기분이다. 그만큼 장용민의 작품들은 서구의 하드보일드계 문학과 중국의 무협소설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인상이다.

 

목각 인형이라는 단순한 소재를 둘러싸고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힘이 굉장하다. 특히, 중국 고대에서 조선말을 거쳐 현재에 이르는 시간적 배경과 한중일 세 나라를 넘나드는 공간적 배치가 돋보인다. 뿐만 아니라 널리 알려진 유방-항우의 대결과 불로초를 찾아나선 진시황 이야기 및 갑신정변 등을 '괴뢰희'의 창시자 창애와 여섯개의 인형으로 묶어낸 솜씨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뛰어난 요리사가 흔한 재료와 잘 알려진 요리법을 활용하여 전혀 새로운 퓨전 음식을 만들어내듯, 역사적 사실과 허구(전설/설화) 및 작가적 상상력을 결합시켜 재밌으면서도 가볍지 않고.... 진중하면서도 어렵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낸 것 같다.

 

물론, <별에서 온 그대>와 같은 드라마의 대유행에서 알 수 있듯이 요즘 한국 드라마 분위기가 이쪽으로 기울어서 작품의 신선함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이야기는 소더비 경매장에서 괴상망측하게 생긴 목각 인형이 2천만 유로(약 300억원)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낙찰되면서 시작된다.

 

한편, 일백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주인공 정가온은 췌장암 진단을 받은 그날 자신과 엄마를 버린 남사당패 꼭두쇠인 아버지 정영후의 부고 소식을 받는다. 그리고 사라진 아버지 대신, 어딘가 모자라 보이는 여동생인 설아와 5일 뒤에 있을 삼우회에 참석하라는 초대장 한장이 그에게 남겨진다.

 

결국, 이야기는 불로 즉 영생의 비밀을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 여섯 개의 인형을 차지하기 위한 일본의 천황파와 홍콩 삼합회, 그리고 한국 재벌가의 충돌을 기둥으로 삼아 펼쳐진다.  특히, 꼽추로 태어나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초를 찾아나선 서복을 따라가 그를 도와 일본에서 나라를 세운 창애에 관한 이야기는 한편의 아름다운 전설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책을 읽을 때는 줄거리 쫓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이렇게 독후감을 쓰면서 반추해 보니,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참 의미심장하다.

 

불로장생...

살아 생전 무소불위의 권력도 모자라 영생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

작품의 결말은 이에 대한 신(神)의 답변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반전에 제대로 주저앉은 나, 그래서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했다.

 

참고로,

그는 나처럼 중국어를 잘 할 것 같다.

그리고 나처럼 중국, 특히 서안에서 머문 경험이 있을 것 같다.

 

그냥, 작품을 쓰기 위한 단순한 자료조사라고 하기에는 중국 대륙과 중국어에 대한 작가의 식견이 너무 넓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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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아이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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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다.

한국 작가가 쓴 SF추리소설은...

 

일단 이 작품은 영화시나리오를 방불케 한다. 그만큼 작품 구상부터 영화화를 감안하고 쓰여졌다는 걸 알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배경과 등장인물들 그리고 사건 등을 모두 해외로 설정하다보니 마치 외국 작품을 한국어로 옮긴 번역서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국소설의 세계화(?)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허리우드식 모방이라고 해야할지... .? 판단은 유보하기로 한다. 작품의 '옳고/그름'과 '좋고/나쁨'을 따지는 건 내 몫이 아니므로...

 

소위, '궁극의 아이'란 미래를 '기억'해내는 아이를 말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한다는 건, 미래에 살던 인물이 과거에 태어나 머리 속에 남아 있던 '기억'을 되살린다는 뜻이리라. 어딘지 모르게 불교의 '환생론'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일까? 작품의 주요 스토리 라인인 '악마 개구리'일당의 이야기와 함께 곁가지(?)격으로 달라이 라마 으뜬 가쵸가 등장한다. 

  

2001년도에 있었던 9.11테러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를 미리 알고 있는 주인공이자 궁극의 아이인 신가야는 사람들에게 테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역부족이다. 다만, 이때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신가야의 외침에 귀 기울여 살아남은 생존자 두명은 나중에 신가야를 위해 봉사하게 된다. 그러니까 신가야는 죽으면서 10년 뒤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맞춰 계획을 세워놓는다. 

 

끙...

과거인 중세로 건너간다는 코니윌리스의 <둠즈데이 북>에서는 인간은 설령 과거-현재-미래로 시간여행을 할 순 있지만 사실 자체를 바꿀 힘은 없다는 것으로 나오는데...

어쩌면 이게 더 과학적이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만약 이미 예정되어 있던 미래를 예측하고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취한다면, 미래는 더 이상 일어났던 그대로 되풀이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신가야의 계획이 미래에 영향을 미쳤고 미래가 바뀌었으므로 더 이상 신가야가 살았던 그 미래 그대로 똑같이 미래가 펼쳐질 수는 없는 것!  

 

암튼, 각설하고...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면,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난 직후 주인공 신가야는 앨리스라는 한 여성을 만나 닷새간의 사랑을 나누고 더 이상 악의 세력에 봉사(?)하지 않기 위해서 자살을 택한다. 홀로 남겨진 앨리스는 딸 미셀을 낳아 키우고... 미셀이 열살이 되자 신가야가 십년 전에 계획해 놓은 일들이 차례로 일어난다. 

 

그의 딸 미셀은 일곱번째 궁극의 아이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악마개구리 일당의 마지막 생존자 벨몽은 또 다시 미래를 엿보기 위해서 미셀을 납치한다....

 

여기에 여성 저널리스트가 등장하고.... 악의 비밀에 접근한 댓가로 9.11테러의 희생자가 되며.... 그녀의 남편이자 FBI 요원인 사이먼이 신가야의 편지를 받으면서 십년 전에 죽은 아내의 죽음에 쌓여 있던 베일을 벗겨낸다....

 

 

전체적으로 굵직한 이야기 구조는 이렇다.

스놉시스만으로도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으며 2011년 대한민국 스토리 공고전에서 최우수상을 탔다는데...

글쎄, 뭐가 특별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 

TV만 켜면 나오는 미드와 잊을만 하면 개봉하는 허리우드 영화와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원.... 

물론, '한국 작가도 이 정도는 쓸 수 있다'라는 의미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작품이 나온지 3년이나 지나서 읽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3년이라는 시간차가 식상함을 불러왔다는 얘기인데.... 전혀 근거없다 할 순 없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작이란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역시나 실망스럽다.

 

아, 호불호를 언급하지 않기로 했건만....

결국, 이렇게 마음을 또 다시 드러내고 말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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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괴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이규원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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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반세기 전(1961년도)에 쓰여진 이 작품은 그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걸작'일수도 있겠으나,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졸작'이라는 평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일단 작가부터 소개하자면 다카기 아키미쓰는 우리에겐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요코미조 세이시와 더불어 일본 고전 본격 미스터리 작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무려 200여편이 넘는 작품수도 그렇지만 6,70년대를 풍미했던 사회파 추리소설과 전통 미스터리 및 하드보일드 등 다양한 장르를 추구했다고 한다.

 

특히, <유괴>라는 작품은 실제 일어났던 유괴사건를 바탕으로 한 법정실화소설이라고 한다.

 

작품의 구조 또한 독특해서...

유괴사건을 계획하고 있는 범인 '그'는 앞서 일어난 유괴사건인 기무라 시게후사의 공판을 방청하면서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심지어 범죄를 저지른 후에도 기무라 시게후사의 사형이 구형되는 재판까지 방청하는 대담함을 보인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모두 두 건의 유괴사건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재판 과정을 통해 이미 일어났고 범인이 붙잡힌 유괴사건과 범인인 '그'가 계획하고 시도한 또 다른 유괴 사건이다.

첫번째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당시 일본 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유는 범인이 전도유망한 치과의사였기 때문이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일어나는 가상의 유괴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사채업자인 이노우에 라이조의 아들 세쓰오가 등교길에 사라진다. 범인은 전화로 삼천만엔이라는 거금을 요구하지만, 공개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을 따돌리고 라이조는 범인과 직접 접촉을 시도한다. 그러나 결과는 현금 삼천만엔만 줬을 뿐 아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범인과의 전화 접촉 과정에서 아내인 이노우에 다에코의 불륜행각이 들어나고.... 라이조와 다에코는 이혼소송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돈가방을 받고 사라진 오카 다미코는 돈가방의 정체를 몰랐으며 애인인 오카야마 도시오와 만날 수 있다는 점만 믿은 채 심부름을 한다. 그런데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킨 자가 과연 누구였을까? 그가 바로 범인인데....

다미코를 쫒던 경찰은 범인을 그녀의 애인인 오카야마 도시오라고 생각하지만, 다미코의 집에서 마주한 두 사람이 싸우고 그 와중에 다미코가 죽자, 오카야마 도시오마저 행방을 감춘다. 그러자 경찰의 의심은 확신으로 점점 굳어진다.

 

물론, 이렇게 쉽게 범인이 추리되선 곤란하다.

 

범인은 뜻밖에도 형의 재산을 노린 이복동생 이노우에 다쿠지로 판명난다. 그는 조카를 죽이고 형 부부를 이혼시켜 재산을 상속받고자 하지만.... 조카의 시체를 먼 바다에 내다버림으로써 조카를 영원히 행방불명 상태에 빠트리는 우를 범한다. 행불 상태에서는 사망이 아니므로 만약 형이 죽을 경우 재산은 조카에게 상속되고 이혼하더라도 조카의 양육권은 모친에게 있으므로 다에코에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음...

날카로운 두뇌 싸움도, 반전도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전통 미스터리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시의 사회현상을 반영한 사회파 미스터리물에 가깝게 읽힌다. 

 

어찌됐던,

진범을 쫒는 과정에서 마루네 긴지와 오카야마 도시오 등을 등장시켜 이유없이 이야기를 질질 끌어간 점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독자를 너무 질리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물론, 작품이 쓰여지고 발표되던 시대상황에 비춰보면 당시엔 충분히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을 것도 같지만 말이다.

 

 

이 밖에도 작품 속에서는 외국의 유명한(?) 유괴사건들이 언급되는데, 예를 들면 프랑스 자동차왕 푸조의 아들 유괴사건이라던지... 미국 린드버그의 20개월된 아들이 유괴된 사건이라든지....

 

이 작품을 통해 작품 속 실제 사건인 시게히사 사건이 외국의 유괴사건을 모방하여 일어났을 개연성이 커지면서 당시 일본 사회에서 '유괴사건'이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음을 알 수 있었다.

 

 

음...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힌 작품이었다.

물론, 읽는 도중 집중력을 흐트릴 만한 일들도 있었지만 일단 스토리 전개가  너무 지지부진하다. 물론, 법정 추리소설을 쓰기 위해서 법원의 실제 상황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려 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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