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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0
엔도 슈사쿠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읽는 동안, 도무지 책장이 넘어가질 않았다.
너무 어렵고 지루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숨을 토해내느라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전에 본 영화 <사일런스>의 장면들과 교차되면서 깊은 '침묵'속으로 빠져들곤 했다.
<사일런스> 역시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평생에 걸쳐 단 한가지 주제에 매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의 본성과 선악'을 헤밍웨이가 '전쟁과 사랑'에 천착했다면, 엔도 슈사쿠는 '신은 존재하는가? '종교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진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서양종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일본에서는 드물게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는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후, 가톨릭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가지만 건강 악화로 2년 만에 귀국하고 만다. 이런 남다른 경험들과 중국 다롄에서 보낸 어린 시절 및 폐결핵으로 생사(生死)를 오갔던 힘겨운 투병 생활의 체험등이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깊은 강>은 네 명의 일본인 관광객이 인도 갠지스강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기본축으로 삼아, 이들이 제각각 품고 있는 사연들을 엮어낸 작품이다.
아내의 환생을 믿고싶은 이소베, 전쟁의 악몽과 친구의 죽음을 치유하려는 기구치, 자기 대신 죽었다고 생각하는 구관조를 기리고싶은 누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자신이 갖고 놀았던 남자('오쓰')를 찾아가는 미쓰코...
특히, 미쓰코와 오쓰의 이야기가 매우 인상적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오쓰는 미쓰코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녀의 요구대로 신앙을 포기하지만, 그녀에게 보기좋게 버림받는다. 처음부터 미쓰코의 목적은 오쓰를 타락시키려는 것이었다. '한 남자로부터 그가 믿고 있는 걸 빼앗는 기쁨. 한 남자의 인생을 뒤틀리게 만드는 쾌감(64쪽)'만이 그당시 그녀가 권태로운 자신의 삶에서 찾은 유일한 목표이자 목적이었다.
그뒤, 미쓰코는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서 신혼여행지를 프랑스로 정하는 한편, 오쓰는 프랑스로 건너가 신부가 되려고하지만 그의 범신앙적 사유방식은 기독교라는 일신교만을 신봉하라고 요구하는 가톨릭 사제단에 의해 거센 지적을 받는다.
"신은 다양한 얼굴을 갖고 계십니다. 유럽의 교회나 채플뿐만 아니라, 유대교도에게도 불교도에게도 힌두교에게도 신은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발언했을 때였습니다. 이것은 유럽에 온 후로 조금씩 제 신념이 된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만 선생님께는 기독교회 전체의 부정인 것처럼 들렸나 봅니다. (183쪽 中)
파문당하다시피한 오쓰는 인도 바라나시로 온다.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미처 강에 이르지도 못하고 길에 쓰러져있거나 이미 숨을 거둔 이들을 등에 업어 갠지스강가로 데려다 준다.
모든 걸 다 알고 있지도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시다...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으며 비참하고 초라하시다...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도 죄와 고통을 떠안으신다...
하물며, 내가 아무리 버리려해도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오쓰가 믿는 신은 바로 이런 신이었다.
심지어 신이라 불리워지길 바라지도 않는다. 양파라 불리우면 또 어떤가.
그 무엇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 무엇도 구분짓지 않는다. 모든 죄를 씻어 주고, 모든 생명을 다 받아주는 강과 같은 존재다.
가톨릭 수사인 오쓰가 힌두교의 성지라 일컬어지는 갠지스강을 찾아간건 배교(背敎)도 이단(異端)행위도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기꺼이 걸어가야 할, 바로 그 길이었다.
"갠지스 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 강은 썩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당한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흘러갑니다."
미쓰코는 더이상 어깃장을 놓진 않았으나 자신과 오쓰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느끼고 있었다. 오쓰의 삶도 그 이야기도 문자 그대로 그녀와는 딴 세계의 것이었다. 그녀는 양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지만, 양파가 그녀한테서 오쓰를 완전히 빼앗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강은 그의 외침을 받아 내고 그대로 묵묵히 흘러간다. 그런데 그 은빛 침묵에는, 어떤 힘이 있었다. 강은 오늘까지 수많은 인간의 죽음을 보듬으면서 그것을 다음 세상으로 실어 갔듯이, 강변의 바위에 걸터앉은 남자의 인생의 목소리도 실어갔다. (280~285쪽 중)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근본으로 하지, '폭력과 파괴'를 신봉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인류는 신의 이름으로 수많은 전쟁을 해왔고, 현대문명사회가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종교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내가 믿는 신만이 유일하다는 믿음과 내가 믿는 종교만이 진리라는 확신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신을 내세워 신처럼 군림하려는 세력과 집단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들이야말로 겉으로는 신을 찬양하면서도 속으로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대로 정말 전지전능하고 위대한 신이 존재한다면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엔도의 또다른 작품 <침묵>은 17세기 기독교를 무지막지하게 탄압했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일종의 역사소설이자 종교소설이다.
당시 일본 지배층은 기독교 전파를 막기 위해 외국인 신부들에게 신도들과 함께 순교할 것인지 아니면 성화(聖化)를 밟고 신도들을 살릴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했다고 한다. 대다수 신부들이 순교를 택했고 수많은 신도들과 함께 수장(水葬)되거나 화장(火葬)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진흙발로 성화를 짓밟고 신도들을 살리는 쪽을 택했다. 물론, 이들은 파문당했고 후세에도 배교자로 낙인 찍혀 있다.
엔도 슈사쿠는 자신이 외국인 신부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스스로에게 물었을 것이다. '순교못지 않게 배교 역시 고통스럽다. 아니 어쩌면 영광조차 없는 배교가 훨씬 더 고통스러운 선택'이라는 걸 깨달았으리라. 그리고 다시 물었으리라. 만약 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밟아도 좋다.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 엔도 슈사쿠 <침묵> 293쪽-
<침묵>이라는 책을 구하려고 직접 중고서점을 찾아가고, 원래 보고자했던 영화 <재심> 대신 <사일런스>를 보고...
나는 늘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창조론 대신 진화론을 굳게 믿으면서도 왠지 자꾸만 누군가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듣고만 싶어진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훨씬 많은데, 어째서 세상은 자주 악의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이 어째서 고통과 불행은 더 많이 감내해야 하는지...
무엇보다도 내가 정말 알고 싶은건, 내 마음은 지옥이건만 어째서 세상은 늘 변함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해가 떠오르고, 새들은 노래하며, 꽃은 피어나고, 누군가는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하며, 또다른 누군가는 새롭게 태어난다. 이런 기막힌 세상을 누군가가 만들었다면 이유를 아니 최소한 변명이라도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신은 말이 없다.
신의 깊은 침묵 앞에서 '종교는 믿음이 아닌 사랑'이라는 엔도의 목소리만 길게 메아리쳤다.
비록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종교는 믿음이 아닌 사랑'이라는 메시지 하나만으로도 유신론자뿐만 아니라 나같은 무신론자에게도 큰 울림이 되어주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