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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 - 수의사 헤리엇이 만난 사람과 동물 이야기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8월
평점 :
절판
제임스 헤리엇의 『사랑의 선물』과『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읽었다.
1916년에 태어난 저자(본명: 제임스 앨프레드 와이트)는 55세부터 1995년 사망할때까지 영국 요크셔 지방에서 평생을 수의사로 일한 경험담을 책으로 엮어냈다.
그가 남긴 책들 중, 『사랑의 선물』이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책이라면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는 성인을 위한 에세이로 부족함이 없다. 나 역시『사랑의 선물』을 읽을때는 사건 위주로 전개되어 흥미롭긴 했지만 깊은 사색이나 진한 감동을 받진 못했더랬다.
그런데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제임스 헤리엇을 수필 작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낮 구분없이 동물들과 시름해야하는 힘든 일상 속에서도 일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 그리고 자연과 동물에 대한 저자의 사랑은 마치 쉼없이 샘솟는 온천수마냥 읽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준다.
사실, 수의사라는 직업은 과로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3D직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거대한 체구의 말이나 소의 바로 옆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새끼를 받아내는가 하면, 차도가 없는 동물 환자를 직접 안락사시켜야 하는 상황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동물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와 수시로 마주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의사의 노고에 고마워하기는 커녕 탓만 하는 농부들의 무례함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육척 장신인 농장 일꾼 하나가 말 머리에 쒸운 마구를 단단히 움켜잡고 머리를 구유에 눌러대고 있는 동안, 나는 상처에 재빨리 요오드포름을 뿌렸다. 다행히 말은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거대한 체구에서 발산되는 생명력과 힘이 손에 잡힐 듯했기 때문에, 말이 얌전한 것은 다행이었다. 나는 비단 봉합사를 바늘에 꿰고, 상처 가장자리를 들어올려 거기에 바늘을 꿰었다. 이어서 반대쪽 가장자리에 바늘을 꿰면서 이 일은 쉽게 끝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바늘을 잡아당기고 있을 때 말이 갑자기 껑충 뛰어올랐다. 돌풍이 휙 소리를 내면서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간 듯 한 느낌이었다.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134쪽-
내 판단은 틀렸다. 순식간에 덩치가 큰 말이 비척대기 시작했다. 거대한 말이 땅바닥에 쓰러진 순간, 내 발밑의 자갈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잠시 동안 말은 몸을 쭉 뻗고 모로 누워 있었다. 허공에 대고 발을 마구 흔들더니 곧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되고 말았다. 이 잘생긴 말을 내가 죽이고야 말았다.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101쪽-
눈을 감아도 그 기괴한 얼굴과 고통에 못 이겨 내지르는 그 소름끼치는 울음소리를 기억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가장 가슴아픈 것은 두려움과 당혹감에 가득 한 눈,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이었다. 말 못하는 동물의 고통을 바라볼 때 가장 견딜 수 없는 바로 그 눈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쟁반에 놓인 넵부탈을 서둘러 집어들었다. 어쨌든 이 고통을 빨리 끝내주는 것은 그나마 수의사가 고통받는 동물에게 해줄수 있는 일이다.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187쪽-
기가 막혀서. 나는 차를 몰고 나오면서 생각했다. 고맙다는 말도, 잘 가라는 말도 하지 않고 불평만 늘어놓다니. 그리고 필요하면 구운 거위고기를 먹고 있는 나를 식탁에서 끌어내겠다고? 갑자기 분노의 물결이 밀려왔다. 빌어먹을 농부들! 농부들 중에는 무례하고 비열한 사람도 있었다. 브라운 씨는 내 머리에 찬물 한 양동이를 퍼부은 것처럼 효과적으로 내 축제 기분을 망쳐놓았다.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151쪽-
이처럼 언뜻봐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라는 건 자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저자는 수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을 천직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매순간 생명의 경이로움과 삶의 기쁨을 깨닫게 해주면서 동시에 돈까지 벌게 해주는 이 일에 진심으로 고마워한다.
시골 수의사 노릇보다 쉽게 빌어먹고 살 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또 밀려왔다. 하루 24시간, 1주일 7일 내내 일은 거칠고 더럽고, 재앙에 가까운 사건이 터지고.
나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몇 분 후 눈을 떠보니,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나와 푸른 언덕을 비췄다. 햇살을 받아 눈 덮인 산등성이는 반짝반짝 생기가 돌았고, 튀어나온 바위 질벽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차창을 내리고 차고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황무지의 공기는 선선하고 톡 쏘는 맛이 있었다. 평온함이 내 몸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내가 케틀웰 씨의 말에게 잘못한 게 아닐 거야. 항히스타민제가 가끔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 게지. 어쨌거나 차의 시동을 걸고 출발하자니, 오래된 느낌이 내 안에 차고 올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감정은 점점 더 강하게 흘러넘쳤고, 이런 황홀한 시골에서 동물들과 일할 수 있었서 좋았다. 요크셔 데일스에서 수의사 노릇을 하다니 난 복 많은 사내였다.
-「사랑의 선물」102쪽-
새끼 양을 받느라 3~4월을 정신없이 보낸 후, 5월과 6월 초순의 내 생활은 한결 느긋하고 푸근했다. 스켈데일 하우스는 등나무에 보랏빛 꽃이 만발해서 열린 창으로 꽃내음이 풍겼다. 아침에 면도를 할 때면, 거울 옆까지 뻗은 꽃송이의 진한 향기에 취했다. 목가적인 생활이었다. 때로는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아침 일찍 왕진을 나서면, 들판에는 희미한 빛이 반짝이고 높은 언덕 꼭대기는 안개가 자욱했다. 바다처럼 싱그러운 공기에는 초지에 점점이 피어난 수천 송이 야생화의 향기가 있었다. -「사랑의 선물」151쪽-
나는 이런 사람들이 진짜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성공이란 '궁극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근원적인 명제를 한시도 잊지 않고 실천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부와 명예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생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전기적 측면들이 여러 매체에 상당히 자세하게 소개되었습니다. 특히 강조된 것은 헤리엇의 청빈한 생활 태도였습니다. 책이 아무리 팔리고(그의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여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에서 수천만 부가 팔렸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인기를 얻어도(그의 책을 대본으로 한 드라마가 영국 BBC방송에서 제작되어, 1978~80년과 1988~90년에 총 90회의 시리즈로 방영되었습니다), 헤리엇은 생활을 전혀 바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내와 함께 아담하고 소박한 침실 두 개짜리 단층집에서 계속 살았고, 마지막까지 온화하고 겸손한 시골 수의사였습니다.
<타임>의 인터뷰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토로가 실려 있습니다.
"나에게 성공이 가져다준 유일한 혜택은 생활 기반이 다소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나는 전에 하지 않은 일은 지금도 하지 않는다. 전에 사지 않은 물건은 지금도 사지 않는다.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의 의미를 모르겠다. 일을 하고 개들을 산책에 데려가고 친구들과 맥주 한잔하고...... 이런 생활이 좋다. 호화로운 생활이나 상류 사회나 값비싼 물건을 나는 천성적으로 싫어한다." -「조금씩 행복해지는 이야기」옮긴이의 말 中-
우리는 흔히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곤 한다. 나도 그랬다. 2,30대까지는 특별한 내일을 꿈꾸면서 평범한 오늘을 견뎌내곤 했다. 지금 이 순간은 아름다운 미래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로만 여겼을 뿐, 내 삶의 일부라는 걸 인정하지 못했더랬다.
그러나 지금은, 평범한 일상의 위대함을 안다.
평범한 일상을 구축하고 유지한다는 게 얼마나 힘겨운 싸움의 결과인지... 평범함을 견뎌내기 위해 얼마나 많이 인내해야 하며...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크고 작은 유혹들에 저항해야 하는지...
이제는 잘 안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시골 수의사라는 지극히 고생스럽고 단조롭고 심지어 비루할 수도 있는 자신의 일상을 견뎌냈다. 아니, 어디 저자인 제임스 헤리엇 한명 뿐이랴. 그의 기록들 속에 등장하는 농장 사람들 역시 '평범함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특별함'이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증명해 준다.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힘들다는 그 평범한 진리...
내가 기쁘고 슬프면 다른 사람도 똑같이 기쁘고 슬프다는 그 평범한 진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물도 사람과 똑같이 느끼고 아프다는 그 평범한 진리 말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