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렘스 롯 - 상 스티븐 킹 걸작선 11
스티븐 킹 지음, 한기찬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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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에 이은 스티븐 킹의 두번째 작품이다.

2012년 여름의 끄트머리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어렵사리 구입한 책인데, 처음에는 아까워서 그 다음에는 게으름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서야 완독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흡혈귀'란 존재는 인간의 무의식 속에 담겨 있는 공포심을 건드리는 가장 강력한 자극제가 아닐까 싶다.


'어둠은 빛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흡혈귀는 죽음의 공포를 강력하게 체험하면서 살아있음을 절감하려는 인간의 심리 기제에 의해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뉴잉글랜드의 '살렘스 롯'이라 불리우는 작은 마을에 흡혈귀가 출현한다.

악은 선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나타나듯 흡혈귀는 다소 예민하고 맑은 영혼을 갖은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호감가는 인물로 다가온다.


마을에 이방인이 나타난 후, 공동묘지 입구에 죽은 개의 사체가 내걸리는가 하면 어린 형제가 사라지고 심지어 죽은 시체가 없어지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한다.

마을과 함께 늙어간 노인들은 어렴풋이 과거의 불행이 재현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함에 휩싸이고...


작품의 기본 줄거리는 19세기 브람 스토커의 <흡혈귀>를 필두로 그려진 여타 '흡혈귀 문학'의 궤를 잇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마을이 죽음에 이르는 불행만큼은 막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기회를 모두 놓쳐버렸다는 점이다. 서로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마을과 마을 사람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오래된 '믿음'과 '타성'때문이다.


역사가 깊은 마을일수록 비밀 역시 많은 법이다.

그리고 그런 비밀일수록 그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사이에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서로에게 전해지며, 그 누구도 입밖으로 발설하려 하지 않는 일종의 '불문율'이 형성된다.

비밀이 깊고 어두울수록 두려움도 커진다.


집단적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들이 있는 그대로 사실을 기억하고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두려울수록 두려움의 실체를 직시하기보다는 외면하려 한다.


흡혈귀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성직자와 십자가의 등장인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현상에 대해서 극도의 공포심을 갖는 인간 특유의 '성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무지(無知)에 대한 인간의 공포심은 무분별한 경외심을 낳고 이와 같은 경외심이 세월과 함께 쌓이면 맹목적인 '믿음'과 함께 '복종'을 불러온다.

신에 대한 복종이나 종교에 대한 믿음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처럼 경외심이 불러온 공포심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흡혈귀의 출현'이라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살렘스 롯'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 세계의 축소판이다.


스티븐 킹은 자신의 작품 <살렘스 롯>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우리는 흡혈귀의 출현을 믿지 않을 만큼 충분히 문명화된 세상을 이룩했지만, 흡혈귀를 불러일으키는 원시적인 심리적 기제만큼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기술 문명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인류의 진화 속도야말로 현실 사회의 부조리를 만드는 '원흉'이 아닐까.


스티븐 킹과 그의 두번째 작품 <살렘스 롯>은 공포 호러 문학이 현실 세계의 부조리를 반증해주는 또 하나의 '열쇠'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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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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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사람들은 혹독하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한 방편으로 책읽기가 생활화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TV교양프로그램에서 본 것 같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신비로운 오로라...

그리고 백야...


북극의 나라들은 이런 것들만으로도 사람을 한껏 달뜨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는 것같다. 여기에 끝없이 펼쳐진 설원 속 깊숙히 파묻혀 있는 수많은 전설과 신화 그리고 숱한 이야기들이 더해져 신비로움은 더한층 극화된다. 


<소노우맨>은 이와 같은 북극의 나라 노르웨이를 배경으로한 추리소설로, 밴드 '디 데레(DiDerre)'의 보컬이자 작곡가이기도 한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제7편이다. 전작과의 연관성이 적어 요 네스뵈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도 무난한 작품이라고 한다. 


기둥줄거리는 연쇄살인마를 쫒는 강력반 형사의 활약상으로 헐리우드식 범죄수사극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신적 상처를 안고 있는 어린 아이가 성장하여 연쇄살인마가 된다는 설정은 신선함이 다소 떨어지지만 현실 속 연쇄살인마의 탄생(?)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또 다른 서늘함을 느끼게 한다.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15퍼센트에서 20퍼센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아버지가 친부가 아니다'라는 스웨덴의 연구 결과가 바로 사건의 발단이 된다.


첫눈이 내리는 날.

마당에 눈사람이 나타나면 사람이 없어진다. 

피해자는 독특한 유전병을 앓고 있는 아이를 둔 유부녀들이다. 


이제 '누가? 어째서?'라는 범인과 동기를 찾아나서는 두뇌 게임이 펼쳐된다. 

작가는 해리 홀레라는 매력적인 인물을 창조해냈다. 일중독, 알콜중독에 신경질적이고 고독한 사나이로 형사가 안 되었다면 범죄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캐릭터다.


에거사크리스티의 포와로나 형사 콜롬보 등이 날카로운 추리와 질문으로 범죄를 해결한다면 해리 홀레는 영화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과(科)에 속한다. 합동작전으로 범인을 체포하기보다는 1인 플레이에 의존한다는 점 등도 다분히 헐리우드적이다.  


처음부터 드라마나 영화 제작을 염두해 둔 작품인 것처럼 비주얼적인 면이 강하다. 하드코어적인 색깔도 갖추고 있어 재미를 위한 독서로는 제격일 듯. 책을 다 읽고 나서의 느낌은 영미식 범죄영화 한편을 봤을 때의 그 느낌 그대로다. 통쾌하고 재미있고... 투자한 영화표값과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값어치'는 충분히 하지만 뭔가 허탈하다.

'뭐랄까...?'

겨울 하늘을 가르고 날아가는 겨울새의 날개짓처럼 마음 한켠을 스산하게 가르고 지나가는 '여운'이 없다고나 할까.


<스노우맨>의 가장 큰 단점은 지나치게 영화스럽다는 점이다.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만들어진 헐리우드 공식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영화말이다. 

활자로 읽는 추리소설만이 전해줄 수 있는 독특한 즐거움이 부족하다. 범인이 붙잡히고 대단원의 막이 내려진 후, 거친 숨결 뒤에 찾아오는 여운이 없다.

영웅(해리 홀레)에 집중하다보니 정작 주인공인 스노우맨(마티아스)은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의 신체적 결함이 유전에 의한 것이라는 점...

더구나 그 유전자는 지금까지 아빠라고 여겨왔던 사람이 아닌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낯선 남자로부터 왔다는 점....

결국 자기 자신의 탄생은 엄마의 외도와 거짓된 행동의 결과라는 점 등을 알아버린 어린 꼬마아이의 시선으로 이 책을 다시 바라보고 싶다. 


어린 동심을 상징하는 눈사람이 어떻게 살인의 전주곡으로 변했을까?

나는 그 과정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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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누마타 마호카루 지음, 민경욱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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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에도 성별로 취향이 구분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남성독자들이 하드코어나 SF환탄지쪽에 가깝다면, 여성독자들은 내면의 심리를 깊숙하게 파고든 작품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리고보니 요즘 들어 부쩍 추리소설에 재미를 붙인 나의 경우를 봐도 그런 것 같다. 일단, 허무맹랑한 건 딱 질색이다. '상상은 자유'라고 하지만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것에는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해서 탐정과 트릭이 반드시 등장하는 전통 추리물도 어딘지 모르게 고리타분하고...

이런 나에게 마쓰모토 세이초와 미야베 미유키로 대표되는 일본의 사회파추리소설들은 제격이라하겠다.


일본의 추리소설들을 더듬어 읽다가 누마타 마호카루의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이란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근 6개월 동안 독서목록에 올라있다가 최근에서야 읽게된 작품이다. 일단, 파란만장(?)한 과거를 가진 56세 여성의 처녀작이란 점이 눈길을 끌었다. 마쓰모토 세이초도 마흔이 넘은 나이에 전업작가로 데뷰한 흔치 않은 인물인데, 그보다도 무려 십년이나 뒤늦게 작가의 길로 들어선 작가라면 뭔가 다를 것같고 뭔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분량의 내용을 다 읽고 난 후 첫 느낌은 "찝찝함"이었다.

사랑에는 국경도 한계도 없다고 하지만 이건 도무지 정상적인 사랑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이혼한 남편의 의붓딸 남자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중년 여인...

성폭행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을 환자로 만나 재혼까지 하는 정신과 의사....

아버지는 같고 엄마가 다른 의붓오빠를 좋아하는 여고생...

아빠가 재혼한 여성를 사랑하는 남학생 등등...


오히려 실종된 아들을 애타게 찾아 해매는 주인공 사치코 주위를 맴돌며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보살펴주는 주책없는 주인공 핫토리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다가왔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연민과 호감이야말로 우리에겐 익숙해서 편안한 사랑의 원형(原型)이 아닐까 싶다.


'그로테스크'라는 말로도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이와 같은 유형의 작품을 일컬어 '이야미스'식 작품이라고 한단다.

이야미스란 '싫은' '이상한' '묘한'이란 뜻으로 일본의 3,40대 주부층을 주된 독자층으로 하는 신경향(?) 소설을 가리키는 것같다. 


워낙 별의별 다양한 작품들이 가득한 일본 문학계지만 정말 그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내심 걱정스럽다.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과 함께 '이야미스'로 분류되는 작품 중,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과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을 모두 읽었다. 이들 작품들이 그려내고 있는 분위기와 주제는 누마타 마호카루의 그것보다 훨씬 더 밝고 선명하다. 오히려 작품의 구성과 전개면에서는 기존의 방식을 뒤엎는 신선함마저 느껴졌다.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은 특히 1인칭 주인공인 '나'의 심리에 착안하여 독자로 하여금 감정이입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보면, 주인공인 사치코는 핫토리 다음으로 가장 정상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비친 등장인물들은 위법은 아닐지언정 정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심리의 소유자들임에 분명하다. 


여기 아빠가 재혼한 상대(즉 자신의 계모)와 사랑에 빠져 도피행각을 벌인 십대 아들이 있다.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 불가다. 아무리 직접 배아파 낳은 친엄마라고 해도 이건 이해 불능이다. 하여, 주인공 사치코 역시 아들 후미히코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가닿았을 뿐이다.


후미히코는 도망쳤다. 자신을 들볶는 연심으로부터, 음란한 엄마로부터, 자신을 버린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변태적인 행위로부터, 그 피를 물려받은 자신의 타는 듯한 욕망으로부터, 너무나 천진난만한 나즈나로부터, 그 나즈나를 속이는 것으로부터, 좋은 아들과 명랑한 친구를 연기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누마타 마호카루,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p264-


어찌보면 자기합리화에 불과하지만 이게 엄마인 사치코로서는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이혼한지 8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사치코의 마음에 남아 있는 전남편의 이기적 행위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일까?


유이치로는 분명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치유하는 자로서 덮쳐오는 재앙으로부터, 유이치로 자신으로부터, 무엇보다 아사미를 지키고 싶었을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누마타 마호카루,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p348-


성공한 의사인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사치코 역시 남편 유이치로에 대한 비난보다는 합리화하려는 모습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내 면의 깊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그녀는  남편의 아내가 데리고 온 딸의 남자친구와의 교재를 통해 남편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대신 채우려 한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반쪽 어른의 삐뚫어진 자화상을 엿볼 수 있다. 사치코는 이혼한지 8년이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경제적으로도 여전히 물론 양육비라는 명목이 붙긴 하지만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시 홀로 독립하지 못하고 언제나 피동적인 입장에 처해 있는 일본 중년 여성의 현실 혹은 소망을 상징하는 건 아닐까.


여기까지 적고 보니, 이 소설이 어째서 3,40대 일본 여성 독자층으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작중 주인공 사치코는 일본 중년 여성의 허세-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과 착하고 똑똑한 자녀- 로 대표되는 중산층 주부의 심리 감정선과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역시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다.

상당히 엇비슷한 모습에 정신없이 몰입되다가도 어느 지점에선가부터 확연히 다른 그 '낯섦'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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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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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미야베 미유키가 '스기무라 사부로'라는 인물을 내세워 사건을 해결하는 시리즈물 중 첫번째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바로 직전에 읽었던 <이름 없는 독>보다는 전체적인 이야기 전개도 자연스러운 것도 같고고 어쨌든 훨씬 더 재미있게 책장이 넘어갔다. 


다만, 우리네 인생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듯 몇가지 의문점에 대해서는 끝까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 


첫 번째 의문은 바로 가지타 부부가 어째서 노세 유코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냥 옆에서 간접적으로 도와준 것이 아니라 대신 시체를 처리해줬다. 이는 엄연히 범죄행위이다. 피를 나눈 한가족도 아닌, 그냥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회사 동료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 부분은 어딘가 사라진 한개의 퍼즐 조각처럼 내 상상력을 한껏 자극했다.

만약,

가지타씨와 노세 유코가 나이를 뛰어넘어 남몰래 사랑을 하는 사이라면? 가능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가지타씨 아내가 눈치 챌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가지타의 아내 입장에서 남편의 불륜녀의 범죄행위를 감춰줄 이유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이를 빌미로 두 사람을 괴롭힌다는 것이 더 이치에 맞지 않을까 싶다.

그럼,

혹시, 노세 유코가 가지타의 혈육일 가능성은? 있다! 원래부터 행실이 좋지 못한 노세 유코는 친부(親父)로부터 학대를 받다가 자기방어적 차원에서 그만 살인을 하게 된 정황을 비추어 본다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아내의 불륜으로 태어난 딸을 구박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술주정뱅이 남편과는 달리 착실한 이웃 남자와 남편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젊은 이웃 아낙네와의 연분이라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역시 이와 같은 가설에도 가지타 부인의 행동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잠깐만!

근데 만약 가지타 부부가 서로를 신뢰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미 병사한 것으로 처리되는 노세 유코의 어머니와 가지타 부인이 어린시절 친구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면 가지타 부인도 노세 유코를 안쓰러워 하며 보듬어 안으려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만약, 가지타 부인과 노세 유코가 공개할 순 없지만 자매라고 한다면 어떨까? 이 사실을 모른 채(혹은 알고서도) 가지타씨가 노세 유코의 어머니와 연애를 해서 노세 유코를 낳았다고 한다면 가지타 부인에게 노세 유코는 어찌되었던 조카인 것이다. 그것도 불쌍하게 매일 남편의 폭력과 질병에 시달리다가 일찍 세상을 뜬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 남긴 딸이라면 비록 남편의 외도로 낳은 아이라 할지다로 연민이 가지 않았을까. 노세 유코의 범죄행위를 갖추어주기에 충분한 동기다.

앗!

<누군가>의 등장 인물인 가지타씨의 남겨진 두 딸 가지타 사토미와 가지타 리코 역시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연적관계다! 

놀라운 반전이다.

그런데 저자인 미미여사는 나도 상상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이야기를 어째서 외면(?)하는 무리수를 둔 걸까? 아니면 이미 이와 같은 이야기를 대전제로 하여 '스기무라' 시리즈 중 하나로 또 한편의 작품을 구상 중인 걸까?


두번째 의문은 가지타씨의 돌발적인 죽음이 중학생에 의한 우연한 자전거 사고라는 점이다.

물론,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로도 이와 같은 어이없는 죽음이란 종종 있는 법이니 말이다. 그러나 저자가 범죄동기를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사회파추리소설의 대가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흠'이 아닐 수 없다.

작품 속에서 미성년자에 의해 저질러지는 범죄의 문제점들이 살짝 엿보이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작품의 소재일 뿐, 핵심 주제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얇고 옅다. 만약 작가가 이 점을 언급하려고 했다면 학교 상담 교사와 함께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는 가해 학생의 갈등과 고뇌가 깊이 있게 다루어졌어야만 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 세번째 의문은 제목이 어째서 <누군가>일까? 이다.

작가가 생각하고 있는 '누군가'란? 도대체 '누구'를 염두에 두고 지은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가지타씨를 자전거로 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가해자'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가하면 피해를 입기도 한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가지타씨가 노세 유코라는 사람을 평생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었듯이 대다수 사람들이 한두 명쯤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누군가>라는 작품은 이상의 세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과 함께 상상의 여지를 가져다 준 작품이다. 이렇게 보면, '인생이 정답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미야베 미유키의 <누군가>라는 작품은 인생과 가장 닮아 있다 하겠다.


과거의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무의미하듯, 인생에 '왜?라는 질문이 때론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무'의미한 것 속에 인생의 의미가 담겨 있는 건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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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독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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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제목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책 제목도 첫 인상이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한번 각인된 선입견은 쉽사리 수정되지 않는다.

나는 최근까지 에드거 앨런 포의 대표작인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모르그라는 집안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으로 여겨왔더랬다. 얼마전 작품을 읽고 나서 모르그가의 가는 집 '家'가 아니라 거리 '街'라는 걸 알고는 소그라치게 놀랬었다. 무식함이 탄로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 스스로 주입(?)시킨 선입견이 무려 수십 년동안 확고부동하게 이어져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착각은 아모도 포의 또 다른 작품인 <어셔가의 몰락>에서 받은 영향이 컸을 것으리라.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명만 확인하고 골라잡은(?) <이름 없는 독> 역시 나에게 섣부른 선입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제목이었다. '독' 자를 독극물의 '毒'이 아닌 장독대의 '독' 자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평온한 일상을 찾아온 연쇄살인사건들...

그리고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힌 사람들...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나는 서서히 '독'이란 인간의 선한 모습 이면에 담겨 있는 악한 면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집에 오염은 없다. 집안은 청결하다. 계속 청결할 거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사람이 사는 한 거기에는 반드시 독이 스며든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바로 독이기 때문에.

그 독의 이름은 무얼까.


옛날 정글의 어둠 속을 누비고 다니던 짐승의 송곳니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 짐승이 잡혀, 사자란 이름이 붙혀지면서부터 인간은 그 짐승을 퇴치하는 법을 짜냈다.


이름이 붙여지자 모습도 없던 공포에는 형체가 생겼다.

형체가 있는 것이라면 잡을 수도 있다. 없앨 수도 있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독의 이름을 알고 싶다. 


-미야베 미유키 <이름 없는 독> 中 p526 -


사실, <이름 없는 독>은 추리소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재미있는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살인사건 그것도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범인과 범행동기 및 범행방식에 석연찮은 점이 많다. 

범행 동기로 보면, 후루야 야키토시의 딸과 내연녀가 모두 용의 선상에 오른다.

그런데 딸과 내연녀는 범행방법과 알리바이에 있어서 범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

피해자 후루야의 외손녀 미치카는 엄마를 의심하여 사설탐정을 찾아가고...


한편, 얼떨결(?)에 재벌가 사위가 된 스기무라...

토양오염 등 환경에 예민한 아내와 어린 딸 때문에 노심초사하지만 선택받은 중산층이다. 

스기무라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 여사원으로 채용된 겐다 이즈미는 전형적인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다. 

겐다 이즈미의 협박으로 그녀의 뒷조사를 하러간 스기무라는 그녀의 전고용주로부터 전직 형사출신의 사설탐정을 소개받게 되는데...


이처럼 작품은 크게 두 줄기를 이루어 흐르다가 사설탐정을 정점으로 미치카와 스기무라가 조우하면서 하나의 물줄기로 합쳐지면서 예상밖으로 흘러간다.


언뜻 보면 종횡무진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마침내, 자백의 형식으로 진범이 밝혀지고 범행동기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것'이었음을 알고는 허탈감마저 느껴졌다. 


마지막 책장을 다 넘기고 나서 '기껏, 이 따위 소설을 읽으려고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더란 말인가'라는 자괴감이 밀려올거라 예상했는데...

'어라...?'

그게 아니었다.

가슴 깊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이 불편한 감정이라니...


이 작품은 결코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니다.

토양오염, 천식, 인질극, 근친상간, 독극물, 인격장애 등등...

놀랍도록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와 닮아 있었다.

고작 그 따위의 사소한(?) 이유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청산가리 독극물 범행을 저지를 수 있을까?

'있다!'

자신이 당한 고통만큼 타인도 고통스럽고 불행해져야한다고 믿고, 이를 계획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범죄나 있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끔찍한 사건들은 일견 이처럼 사소하고 작은 이유들로부터 시작된다.

'아, 무섭다!'

독서의 재미가 사라진 그 자리에 서서히 소름이 차오른다.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파 추리소설들은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마치 요즘 방송사들이 경쟁하듯 방영하고 있는 리얼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다 보고나면 어이가 없으면서도 가슴 한켠이 답답해진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리얼이고 어디까지가 연출인 걸까?

 

나 또한 우리 안에 있는 독의 이름을 알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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