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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독 ㅣ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먼저 제목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책 제목도 첫 인상이 중요한 것 같다. 그리고 한번 각인된 선입견은 쉽사리 수정되지 않는다.
나는 최근까지 에드거 앨런 포의 대표작인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모르그라는 집안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으로
여겨왔더랬다. 얼마전 작품을 읽고 나서 모르그가의 가는 집 '家'가 아니라 거리 '街'라는 걸 알고는 소그라치게 놀랬었다.
무식함이 탄로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 스스로 주입(?)시킨 선입견이 무려 수십 년동안 확고부동하게 이어져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착각은 아모도 포의 또 다른 작품인 <어셔가의 몰락>에서 받은 영향이 컸을 것으리라.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명만 확인하고 골라잡은(?) <이름 없는 독> 역시 나에게 섣부른 선입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제목이었다. '독' 자를 독극물의 '毒'이 아닌 장독대의 '독' 자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평온한 일상을 찾아온 연쇄살인사건들...
그리고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힌 사람들...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나는 서서히 '독'이란 인간의 선한 모습 이면에 담겨 있는 악한 면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집에 오염은 없다. 집안은 청결하다. 계속 청결할 거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사람이 사는 한 거기에는 반드시 독이 스며든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이 바로 독이기 때문에.
그 독의 이름은 무얼까.
옛날 정글의 어둠 속을 누비고 다니던 짐승의 송곳니 앞에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은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 짐승이 잡혀, 사자란 이름이 붙혀지면서부터 인간은 그 짐승을 퇴치하는 법을 짜냈다.
이름이 붙여지자 모습도 없던 공포에는 형체가 생겼다.
형체가 있는 것이라면 잡을 수도 있다. 없앨 수도 있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독의 이름을 알고 싶다.
-미야베 미유키 <이름 없는 독> 中 p526 -
사실, <이름 없는 독>은 추리소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재미있는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살인사건 그것도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범인과 범행동기 및 범행방식에 석연찮은 점이 많다.
범행 동기로 보면, 후루야 야키토시의 딸과 내연녀가 모두 용의 선상에 오른다.
그런데 딸과 내연녀는 범행방법과 알리바이에 있어서 범죄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
피해자 후루야의 외손녀 미치카는 엄마를 의심하여 사설탐정을 찾아가고...
한편, 얼떨결(?)에 재벌가 사위가 된 스기무라...
토양오염 등 환경에 예민한 아내와 어린 딸 때문에 노심초사하지만 선택받은 중산층이다.
스기무라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 여사원으로 채용된 겐다 이즈미는 전형적인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다.
겐다 이즈미의 협박으로 그녀의 뒷조사를 하러간 스기무라는 그녀의 전고용주로부터 전직 형사출신의 사설탐정을 소개받게 되는데...
이처럼 작품은 크게 두 줄기를 이루어 흐르다가 사설탐정을 정점으로 미치카와 스기무라가 조우하면서 하나의 물줄기로 합쳐지면서 예상밖으로 흘러간다.
언뜻 보면 종횡무진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마침내, 자백의 형식으로 진범이 밝혀지고 범행동기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것'이었음을 알고는 허탈감마저 느껴졌다.
마지막 책장을 다 넘기고 나서 '기껏, 이 따위 소설을 읽으려고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더란 말인가'라는 자괴감이 밀려올거라 예상했는데...
'어라...?'
그게 아니었다.
가슴 깊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이 불편한 감정이라니...
이 작품은 결코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니다.
토양오염, 천식, 인질극, 근친상간, 독극물, 인격장애 등등...
놀랍도록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세계와 닮아 있었다.
고작 그 따위의 사소한(?) 이유로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청산가리 독극물 범행을 저지를 수 있을까?
'있다!'
자신이 당한 고통만큼 타인도 고통스럽고 불행해져야한다고 믿고, 이를 계획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범죄나 있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끔찍한 사건들은 일견 이처럼 사소하고 작은 이유들로부터 시작된다.
'아, 무섭다!'
독서의 재미가 사라진 그 자리에 서서히 소름이 차오른다.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파 추리소설들은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마치 요즘 방송사들이 경쟁하듯 방영하고 있는 리얼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다 보고나면 어이가 없으면서도 가슴 한켠이 답답해진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리얼이고 어디까지가 연출인 걸까?
나 또한 우리 안에 있는 독의 이름을 알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