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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길 - 상 ㅣ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2월
평점 :
요즘 처럼 일본이라는 나라를 가깝게 느낀 적도 없는 듯싶다. 그동안 우리에게 일본이란 식민지배의 아픔을 안겨준 '공공의 적'
이자 동시에 '예의바르고 잘사는 나라 ' 혹은 좋게 표현해서 '넓이와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문화적 다양성'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잊을만 하면 불거지곤 하던 소위 '역사적 망발'은 '또야!' 식의 식상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런 일본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일본이 심상찮다. 그 어느때보다 반한 감정이 격앙되어 있고 드러내놓고 관련 시위집회를 갖고
있다. 이웃국가와는 의도적으로 영토 분쟁을 불러 일으키려는 '혐의'가 다분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우익'이 있다. 일본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익'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우익이란 식민지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지지하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부와 권력을 획득한 일본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건만 일본은
여전히 우익에 의해 움직이고 다스려지는 나라인 것 같다. 아직도 태평양 전쟁 시대에서 단 한 걸음도 떼어 놓지 못한 형국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우익 세력은 마치 검은 안개처럼 여전히 일본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다. 일본에서
우익에게 대항한다는 건 사회적 테러를 감수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본의 '어둠'에 정면으로 불빛을 들이댄
작가가 있었다. 그것도 지금보다 우익이 훨씬 더 창궐하던 지난 1960년대에...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일본의 국민작가로 불리우는 마쓰모토 세이초가 바로 주인공이다.
엄
청난 다작(多作)으로 널리 알려진 마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은 그의 작품 중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베스트10 에
오른 작품이라고 한다.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면서 일본의
'어둠=우익'에 정면으로 불빛을 들이댄 작가가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에서 위로와 위안을 삼아 본다.
마
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은 '가서는 안 되는 길'을 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언뜻 보면 부귀영화에 눈이 먼 한
여인(다미코)의 타락과 몰락을 그리고 있지만 세이초는 '기토 고타' 라는 만주낭인(만주에서 활동하던 무리배를 일컬음) 출신 노인을
통해 일본의 검은 안개 즉 우익의 모습을 포착하여 보여준다.
작품의 초반부는 마치 추리소설을 방불케
한다. 병든 남편을 부양하다가 지친 여관여급이 결국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완전 범죄를 꿈꾸는 범인을 끝까지 추적하는
형사가 등장한다... 여기까지는 추리소설의 공식 그대로다. 이제 독자와 작가의 두뇌 싸움만 남았다.
'어, 어라...?'
그
런데 어째 이상하다. 어느 순간 방화사건은 부패 형사의 치정으로 흘러가는가 싶더니, '뉴로얄호텔'에서 생뚱맞게도 조연급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간다. 작품속에서 뉴로얄호텔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의 축소판이자 인간 욕망의 집합소와 같은
곳이다.
문학평론가 조영일은 '뉴로얄호텔'을 '짐승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 즉 '파우스트적 계약'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럼, 여기에서 '짐승의 길'이라는 표제에 대해 살펴보자.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목의
귀재'라고 할만큼 자신의 작품에 빼어난 제목을 부여하는 작가로도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짐승의 길>이 최고(?)의
타이틀로 손꼽히고 있다. 나 역시 상하 두권으로 이루어진 장장 800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제목의 탁월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더랬다.
짐승길: 산양이나 멧돼지 등이 지나다녀서 산중에 생긴 좁은 길을 말한다. 산을 걷는 사람이 길로 착각할 때가 있다.
세
이초 작품이 널리 사랑받는 이유 중에 하나는 '범죄의 일반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범죄의 유혹에 빠진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잘못된 길일지도 모르지만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남은 길은 뻔하다. 지리멸렬하고 심지어는 비참하기까지 한 '인간의
길'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짐승의 길>에는 하나같이 잘못된 길을 선택하여 걸어간 사람들이 등장한다.
팔자를 바꿔볼 요량으로 병든 남편을 죽인 아내...
권력의 끄트머리에서 소소한 편의를 즐기면서 범죄를 저지른 여인을 협박하는 형사...
젊은 여자의 기를 얻어 회춘을 시도하는 노인...
우익 거물의 수족이 되어 온갖 부정을 다 저지르는 사람들...
출세와 보신을 위해 '어둠'앞에 고개를 숙이는 권력자들...
이들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지기에 앞서 이들 앞에 놓인 선택지들을 우리 각자의 앞에 펼쳐놓아보자.
당당하게 거부하고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절대로 안 해!'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못 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기야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참으로 부럽다.
세상을 한참이나 모르는 천진무구한 철부지거나,
아니면 욕망하는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므로......
세이초의 뒤를 잇는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로 미야베 미유키가 있다. 영화 <화차>의 원작가로도 유명한 그녀의 작품은 '장르소설의 무덤'이라고 하는 한국에서 상당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나 역시 세이초의 작품도 좋아하지만 미야베의 작품을 훨씬 더 재밌어한다는 걸 부인하지 못한다.
'
미야베의 작품은 재미있지만 세이초의 작품은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나만 한 것은 아닌듯 싶은데, 이에 대해
조영일 문학평론가는 '어중간한 거리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100여년 전의 고전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 사회를 그려낸 현대물도
아닌 그 '어중간함'이 바로 세이초 작품에 대한 한국독자들의 낯설음을 불러오며 이런 낯섦이 재미없음으로 해석되어 질 수
있단다. 탁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책을 출판하려는 출판사의 의도와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읽고 난 후 본전 생각나지 않는 책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