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집 - 상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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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집>은 일본을 대표하는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인 '미미여사'(미야베 미유키의 애칭?)의 대표적 시대소설이다.

상하 두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이지만 나는 1년전  <혼조 후카가와의 이상한 이야기>와 <괴이>를 시작으로 일명 '미야베 월드'에 입성했기에 그녀의 시대 추리물이라면 읽기도 전에 군침(?)부터 넘겼다. 

'그래서였을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더니 장편시대소설이라서 그런진 몰라도 단편처럼 허를 찌르는 반전이라든지 가슴을 울리는 애틋함의 깊이는 한결 얇아진 것  같아 개인적으로 아쉽다.


그러나 <외딴집>은 에도 시대의 특징과 시대적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길라잡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본의 에도 시대(1603년~1867년)는 '사무라이(무사)'가 지배하던 사회로 일반 민중들은 생존을 위해 숨죽이고 살아야만 했던 시기다. 


<외딴집> 역시 해안가 마을인 마루미라는 작은 번에서 벌어지는 지배층의 암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암투를 둘러싼 추리물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작가의 시선은 암투를 꾀하고 심지어는 전염병으로 꾸민 살인까지 일삼는 지배층이 아니라 아무것도 모른 채 지배층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는 중간계급(사지: 의원)과 일반 서민에게 향해 있기 때문이다. 


"속는다"

"응, 그래. 가가 님이 오는 바람에 마른 폭포 저택에서 깨어난 나쁜 존재가 마루미 사람들에게 원한을 갚으려고 고토에 님을 노리고 목숨을 빼았았어. 고토에 님은 정말로 착하고 좋은 분이기 때문에 노린 것인지도 모르지. 마른 폭포의 나쁜 존재는 고토에 님이 돌아가신 일을 둘러싸고 우리가 많이 고민하거나 괴로워하게 하려고, 너에게 미네 님의 환상을 보여 주어 미네 님이 고토에 님을 죽인 것처럼 보이게 했어. 나쁜 존재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해서 괴롭히기 위해 그런 짓을 하거든."

앞으로도 나쁜 존재는 더욱더 나쁜 짓을 할 것이다. 마루미 사람들을 겁먹게 하고, 곤란하게 하려고 갖은 짓을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반쯤은 스스로에게 들려주듯이, 우사는 이야기했다.

"우사 씨." 꺼질 것만 같은, 작은 목소리다.

"왜?"

"그러면 이 세상에는 나쁜 존재가 정말로 있나요?"

"응."

"마루미에는, 마른 폭포 저택에 있나요?"

"그렇지. 가가 님도 모레가 되면 거기에 들어갈 테니까."

호가 입을 다물자 바람이 울었다.

-미야베 미유키, <외딴집> p187-



소통과 교류가 차단되고 정보가 통제된 사회에서는 소문과 미신이 크나큰 위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이런 면에서 볼때, <외딴집>은 미스터리 시대물이라기보다는 사회 고발물에 더 가깝다 하겠다.

사리사욕에 가득 찬 권력층들은 정보를 통제하고 사실을 조작하여 대중을 호도하고 공포로 몰아넣으면...

진실로부터 차단된 대중은 소문과 미신에 휘둘리게 되면서 서로를 불신하고 결국엔 죽고 죽이는 살육전까지 벌이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같은 사람은 그냥 속으면 그만이고, 호와 우사처럼 진실에 근접한 사람이라면 죽거나 입을 다무는 것 둘 중 한가지 밖에는 다른 선택은 없다.

400여년 전 일본의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근현대사의 한끝과 너무도 닮아 있지 않은가.


미야베 미유키는 <외딴집> 출간 후, 갖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에도 시대의 번 단위의 세계는 매우 작아서, 어느 정도의 높은 지위에 잇는 사람은 거의 모든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서민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살짝 보이는 것에도 매우 무서워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뭐라고 해 보려고 해도 아무것도할 수 없는 채로 도중에 좌절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도망칠 곳은 점점 사라져 간다. 현대 소설에서 이러한 것들을 쓰기는 매우 힘듭니다. 지금이아면 인터넷을 무기로 하면 단 한 사람의 시민이 사회문제를 파악할 수도 있으니까요. 진실은 감춰져 있고, 호소할 수단조차 없던 시대를 살아 온 서민들은 거대한 권력 앞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겠지요.


- 미야베 미유키 <외딴집> 편집자 노트 中-

 

'진실은 감춰져 있고, 호소할 수단조차 없던 시대'가 과연 일본의 에도시대 뿐이었을까?

이제야 할 것 같다.

<외딴집>에 대한 사람들의 높은 평가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힘없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진실로부터 차단되어 자신도 모르게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인터넷이 발달된 정보화시대에는 진실왜곡과 여론조작이 불가능하다는 작가의 말은 지나치게 겸손하거나 순진함의 발로이리라.  우리는 어쩌면 모두 다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에 더욱더 교묘한 수단으로 진실이 왜곡되고 여론이 조작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바다토끼가 뛰는 것을 본 '호'와 '우사'처럼 순식간에 뜻모를 불안감이 밀려든다.


시대를 막론하고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지배와 지위를 공고히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퍼뜨리는데 열심히였다. 진실로부터 차단된 대중은 마치 안개와 같은 무지(無知) 속을 헤매다가 불안과 공포속에 내몰려 결국은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된다. 여기에서 말한 이데올로기란 거창한 이론이나 학설이라기보다는 사회적 통념과 분위기를 말한다. 더 이상 봉건제사회도 아니며 민주선거제도가 정착된 현대사회에서는 이를 일컬어 '정치'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입을 다물자, 바람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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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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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색출과 범죄 방식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는 본격추리소설과는 달리 범행 동기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어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특히, 이 분야의 원조할 수 있는 마쓰모토 세이초와 그 계보를 잇는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한편, <백야행>의 히가시노 게이고와 온다 리쿠 역시 일본의 대표적인 추리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들의 작품 세계는 사회파추리소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다. 범행 동기를 중시하는  면에서는 사회파추리소설과 같지만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색채가 짙어서 기존의 추리소설 기법에 익숙해 있는 독자라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공포와 환상은 일찍이 '괴기소설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에드가 앨런 포우와 '호러킹' 스티븐 킹의 작품 속에서 보여지듯이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면을 갖고 있다. 

 

다소 납득이 가지 않는 범행 동기...

비현실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범행 사주 과정...

진범과 공범,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경계의 모호함...

그리고 아련한 추억을 자극하는 몽롱함...

 

2006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인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 역시 이상과 같은 특징들을 전부 다 갖고 있다. 

한껏 긴장감에 빠져 정신없이 책장을 넘기다보면,

"아니 고작 이따위 이유때문에 사람을 죽였단 말이야? 그것도 가족을?" 라던가, "말도 안돼! 어떻게 암시만으로 타인에게 범죄를 사주하며 또 사람이 어떻게 손쉽게 타인의 범죄 도구가 될 수 있는거지? "  등등 수많은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리고,

허탈해하면서 아까운 시간만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 역시 하루 꼬박 이와 같은 배신감(?)에 시달렸으니까...

그런데 관점을 조금만 달리하여 <유지니아>를 추리소설로만 바로보지 않는다면, 전혀 색다른 작품임을 감지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온다 리쿠라는 작가가 구축한 (작품)세계가 아닐까 싶다.

 

'노스탤지어의 마법사'

온다 리쿠에게 헌사된 수식어다. <유지니아> 역시 독자에게 잊혀졌던 아련한 추억의 몽롱함을 선사한다.

 

작품의 기둥 줄거리는 어린 시절 이웃집 잔치에서 17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독이 든 음료수를 마시고 죽은 사건을 경험했던  소녀가 성인이 되어 다시 사건 관계자들을 인터뷰하여 기록하고 <잊혀진 축제>라는 책으로 출판한다는 내용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같은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이 조금씩 어긋나 있는데,  작가는 처음부터 이 점을 의식하고 강조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기억의 어긋남이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나 실마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나하면 이미 범인의 윤곽은 초반부에 이미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작가는 똑같은 사실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이고 기억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작품속에서 사이가 씨를 도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녹음하고 기록하는 일을 도와주었던 인물의 '고백'이다.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의 입으로 듣는 건 흥미로웠습니다.

거꾸로, 사실이란 게 뭘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저 마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본 그대로 이야기한단느 건 쉽지 않아요. 아니, 불가능합니다. 선입견이 작용한다든지, 잘못 봤다든지, 잘못 기억한다든지 하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받은 교육, 성격에 따라 보는 방식도 달라지잖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안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신문이나 교과서에 실린 역산느 극히 대략적인, 최대공약수의 정보구나 하고요.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건 사릴일지 몰라도, 그때 상황과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경위 같은 건 아마 당사자들도 모를걸요.

대체 뭐가 진실인가, 그런 건 그야말로 전능한 신밖에 모를 겁니다. 그런 존재가 있다면 말입니다만.

 

-온다 리쿠, <유지니아> p57 중-

 

 

왠지 모르게 추억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이유가 뭘까?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일까.

아무튼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마저도 세월의 두께가 얹혀지면 아련한 추억으로 재현되곤 한다.


온다 리쿠는 바로 이점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과거에 대한 회상은 인간 내면으로의 회귀 또는 원초성으로의 환원인 것이다. 

< 밤의 피크닉>도 그렇고 이번 <유지니아>라는 작품도 그렇고... 과거 회상은 온다 리쿠 작품 속에서 가장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범인과 범행 동기 따위는 어느덧 회상과 추억의 건너편 저 너머에 존재한다. 보일듯 말듯 아련하게...

 

박쥐의 기척.

히사코는 가끔씩 그런 알 수 없는 말을 썼다. 어린 나이에 시력을 잃은 탓에, 이미지와 본 적이 있는 사물이 뒤섞여 가끔씩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 반대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은 되레 히사코를 신비스럽게, 기적처럼 보이게 했다. 히사코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쪽이 이상하고 못났다는 생각이 들게 했따.

그렇기 때문에 히사코가 '백일홍'을 몰라도, 혹시 다른 것을 그렇게 불렀다 해도, 그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이 있다 해도, 착각을 지적하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쩌면 히사코가 옳을지도 모른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온다 리쿠, <유지니아> p423 중-

 

 

1964년생임에도 불구하고 다작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만에도 무려 37편의 작품이 번역 출판되었단다. 

고작 두 편의 작품만으로 그녀의 작품 세계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처럼 느껴진다. 대표작들만 찾아 읽는다해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참!

그리고 오사와가 집안 잔치날 음료수에 독극물을 탄다는 설정은 1948년 1월 26일 실제로 있었던 제국은행 사건을 모티프로 삼지 않았나 싶다.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1960년대에 이미 제국 은행 사건을 모티프로 여러편의 작품을 쓴 바 있다. 사건이 발생하고 20여년이나 뒤에 출생한 온다 리쿠가 사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고,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흔적'을 뜻밖의 곳에 발견하게 되어 신선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현대문학 특히 추리문학장르에 끼친 '세이초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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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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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의 작품은 처음이다.

그동안 일본 문학을 꽤 가깝게 접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나만의 착각이었다. 마치 벗겨도 벗겨도 계속 새로운 껍질이 나오는 양파를 벗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앗차! 또 당했지!"싶다.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깊은 일본 문학의 저력을 확인한 것 같다. 낭패스러움이 밀려들지만 가히 '월드'니 '랜드'니 하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키 월드...

미야베 월드...

세이초 월드...

온다 리쿠 랜드... 등등


온다 리쿠는 추리소설 작가로 명성이 자자한데, 첫만남에서 작가의 진가를 엿보지 못해 아쉽다. '작가의 대표적인 추리 소설 작품을 선택하는 건데...' 하는 후회도 잠깐 들었지만 <밤의 피크닉> 또한 온다 리쿠의 대표작인지라 언제 만나도 만나게 되었을 작품이리라. 


<밤의 피크닉>은 추리 소설과는 거리가 먼, 순수문학소설 그 중에서도 청춘성장소설이다.


이야기는 일본 소도시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연례적으로 행해지는 보행제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사춘기 시절 문학소녀였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해 봄직한, 그러나 현실에서는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는 '운명의 장난(?)'  혹은 '비밀(?)'들이 주인공들 앞에 펼쳐진다.


사실, 비밀은 별 것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밀이란, 그 내용 자체보다는 '공개되지 않는 것'에 특별함이 담겨 있다. 그래서 비밀의 당사자는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지만, 막상 비밀이 공개된 후에는 비밀은 그 '위력'을 잃어 버리고 모든 이들의 관심밖으로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복남매라는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도오루와 다카코...

다카코를 좋아하지만 도오루와 다카코가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시노부...

도오루를 좋아하지만 고백하지 못한 채 미국으로 전학을 간 안나...

친구의 비밀을 알고도 무려 일년 동안이나 비밀을 아니 친구를 지켜준 미와코와 사카키...


인물 묘사가 뛰어나다. 

주고 받는 짧은 대화와 간단한 상황 묘사 만으로 등장 인물들이 살아 움직인다. 

인물의 성격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책을 읽고 있으면 교복을 입고 있는 비슷비슷한 십대들이 한명 한명 구체적으로 재현된다. 


다만, 구성면에 있어서 사카키 준야의 등장은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사카키 안나의 진심을 밝히는 편지라는 복선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오랜만에 잊혀졌던 십대 학창 시절을 회상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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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길 - 상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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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처럼 일본이라는 나라를 가깝게 느낀 적도 없는 듯싶다. 그동안 우리에게 일본이란 식민지배의 아픔을 안겨준 '공공의 적' 이자 동시에 '예의바르고 잘사는 나라 ' 혹은 좋게 표현해서 '넓이와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문화적 다양성' 정도로 인식되어 왔다. 잊을만 하면 불거지곤 하던 소위 '역사적 망발'은 '또야!' 식의 식상함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런 일본이었다. 그런데 최근 이런 일본이 심상찮다. 그 어느때보다 반한 감정이 격앙되어 있고 드러내놓고 관련 시위집회를 갖고 있다. 이웃국가와는 의도적으로 영토 분쟁을 불러 일으키려는 '혐의'가 다분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우익'이 있다. 일본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익'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우익이란 식민지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지지하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부와 권력을 획득한 일본의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지 반세기가 훌쩍 지났건만 일본은 여전히 우익에 의해 움직이고 다스려지는 나라인 것 같다. 아직도 태평양 전쟁 시대에서 단 한 걸음도 떼어 놓지 못한 형국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우익 세력은 마치 검은 안개처럼 여전히 일본 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다. 일본에서 우익에게 대항한다는 건 사회적 테러를 감수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본의 '어둠'에 정면으로 불빛을 들이댄 작가가 있었다. 그것도 지금보다 우익이 훨씬 더 창궐하던 지난 1960년대에...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일본의 국민작가로 불리우는 마쓰모토 세이초가 바로 주인공이다.

 

엄 청난 다작(多作)으로 널리 알려진 마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은 그의 작품 중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베스트10 에 오른 작품이라고 한다.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면서 일본의 '어둠=우익'에 정면으로 불빛을 들이댄 작가가 국민작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에서 위로와 위안을 삼아 본다.

 

마 쓰모토 세이초의 <짐승의 길>은 '가서는 안 되는 길'을 간 사람들의 이야기다. 언뜻 보면 부귀영화에 눈이 먼 한 여인(다미코)의 타락과 몰락을 그리고 있지만 세이초는 '기토 고타' 라는 만주낭인(만주에서 활동하던 무리배를 일컬음) 출신 노인을 통해 일본의 검은 안개 즉 우익의 모습을 포착하여 보여준다. 

 

작품의 초반부는 마치 추리소설을 방불케 한다. 병든 남편을 부양하다가 지친 여관여급이 결국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완전 범죄를 꿈꾸는 범인을 끝까지 추적하는 형사가 등장한다... 여기까지는 추리소설의 공식 그대로다. 이제 독자와 작가의 두뇌 싸움만 남았다.

 

'어, 어라...?'

그 런데 어째 이상하다. 어느 순간 방화사건은 부패 형사의 치정으로 흘러가는가 싶더니, '뉴로얄호텔'에서 생뚱맞게도 조연급들이 하나둘씩 죽어나간다. 작품속에서 뉴로얄호텔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의 축소판이자 인간 욕망의 집합소와 같은 곳이다.

 

문학평론가 조영일은 '뉴로얄호텔'을 '짐승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 즉 '파우스트적 계약'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럼, 여기에서 '짐승의 길'이라는 표제에 대해 살펴보자. 마쓰모토 세이초는 '제목의 귀재'라고 할만큼 자신의 작품에 빼어난 제목을 부여하는 작가로도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짐승의 길>이 최고(?)의 타이틀로 손꼽히고 있다. 나 역시 상하 두권으로 이루어진 장장 800페이지에 달하는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제목의 탁월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더랬다. 

 

짐승길: 산양이나 멧돼지 등이 지나다녀서 산중에 생긴 좁은 길을 말한다. 산을 걷는 사람이 길로 착각할 때가 있다. 

 

세 이초 작품이 널리 사랑받는 이유 중에 하나는 '범죄의 일반성'에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범죄의 유혹에 빠진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잘못된 길일지도 모르지만 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남은 길은 뻔하다. 지리멸렬하고 심지어는 비참하기까지 한 '인간의 길'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짐승의 길>에는 하나같이 잘못된 길을 선택하여 걸어간 사람들이 등장한다.

 

팔자를 바꿔볼 요량으로 병든 남편을 죽인 아내...

권력의 끄트머리에서 소소한 편의를 즐기면서 범죄를 저지른 여인을 협박하는 형사...

젊은 여자의 기를 얻어 회춘을 시도하는 노인...

우익 거물의 수족이 되어 온갖 부정을 다 저지르는 사람들...

출세와 보신을 위해 '어둠'앞에 고개를 숙이는 권력자들...

 

이들에게 침을 뱉고 돌을 던지기에 앞서 이들 앞에 놓인 선택지들을 우리 각자의 앞에 펼쳐놓아보자. 

당당하게 거부하고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나는 절대로 안 해!'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못 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기야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참으로 부럽다.

세상을 한참이나 모르는 천진무구한 철부지거나,

아니면 욕망하는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므로......

 

 

세이초의 뒤를 잇는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로 미야베 미유키가 있다. 영화 <화차>의 원작가로도  유명한 그녀의 작품은 '장르소설의 무덤'이라고 하는 한국에서 상당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나 역시 세이초의 작품도 좋아하지만 미야베의 작품을 훨씬 더 재밌어한다는 걸 부인하지 못한다.

' 미야베의 작품은 재미있지만 세이초의 작품은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나만 한 것은 아닌듯 싶은데, 이에 대해 조영일 문학평론가는 '어중간한 거리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100여년 전의 고전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대 사회를 그려낸 현대물도 아닌 그 '어중간함'이 바로 세이초 작품에 대한 한국독자들의 낯설음을 불러오며 이런 낯섦이 재미없음으로 해석되어 질 수 있단다. 탁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책을 출판하려는 출판사의 의도와 노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읽고 난 후 본전 생각나지 않는 책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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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 상 스티븐 킹 걸작선 2
스티븐 킹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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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은 1977년 작으로 1974년 <캐리>로 데뷔한 스티븐 킹의 초기 3대 호러 작품이라고 할 만하다. 스티븐 킹은 <샤이닝>을 쓰기에 앞서 1975년 <세일럼스 롯(Salem's Lot)>을 출간한 바 있다.

 

 

<샤이닝> 역시 <캐리>와 마찬가지로 염력(혹은 초능력)을 갖고 있는 여섯살 소년 대니가 주인공이다.

대니의 아빠 잭 토런스는 유명작가를 꿈꾸면서 고등학교에서 작문을 가르쳤으나 학생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하여 해고되고 만다. 잭은 아내 웬디, 아들 대니와 함께 생계를 위해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동절기 동안 폐쇄되는 콜로라도에 위치한 오버룩 호텔의 관리를 맡게 된다.

 

 

눈 덮인 겨울 산의 유서깊은 호텔에서 잭은 서서히 미쳐간다.

그리고...

급기야는 아내와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

 

 

그를 광기로 몰아넣은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뜻대로 쓰여지지 않는 희곡작품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남편이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건 아닌지 혹은 아들을 구타하지는 않을지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하는 아내때문이었을까.

혹은,

수많은 사람들이 생을 마감한 호텔의 어두운 과거를 알아버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고 종종 의식을 잃곤 하는 어린 아들의 존재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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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을 광기로 인도한 건 다름아닌 소외와 환상이였다.

완벽하게 폐쇄된 공간인 오버룩(사회로부터의 소외를 상징)에서 잭은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두려움의 상징이었던 부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알콜중독에 실업자일뿐인 자신의 암담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고, 신뢰할 수 있는 남편이자 존경스러운 아빠의 자리를 되찾고 싶어했다. 이런 잭의 소망이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그를 둘러싼 현실은 더욱더 그를 '저 멀리' 밀어냈다.

 

 

<샤이닝>은 폐쇄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가족간 폭력을 통해 인간 소외를 그리고 있다.

격리되고 소외되는 것에 따른 불안이야말로 단체생활을 하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불안 즉 공포 그 자체이리라.

 

 

공포는 스스로 파멸한다.

처음에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것들을 공격하지만 결국에는 스스로를 공격하여 죽음에 이르고 만다. <샤이닝>의 주인공 잭 토런스 역시 공포에 휩싸여 서서히 미쳐하면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을 해치고 나중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오버룩을 증기 폭발로 날려버리는 것처럼.

 

 

 

찰스 브록든 브라운과 에드거 앨런 포의 뒤를 잇는 미국 고딕 소설의 계승자로 불리우는 스티븐 킹답게 그는 자신의 두번째 장편 소설(<샤이닝>)에서 에드가 앨런 포우에 대한 '오마주'를 마음껏 선보이고 있다. <샤이닝>에서는 포우의 단편 중 구성과 작품성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붉은 죽음의 가면>의 한 장면이 마치 주문처럼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붉은 사신이 모두를 덮쳤다!'

'가면을 벗으십시오! 가면을 벗으십시오!'

그러자 반짝이는 아름다운 가면 뒤에 어두운 복도를 따라 시뻘건 눈을 크게 뜨고 죽일 듯이 대니를 쫗아왔던 그 형체의 여태까지 보지 못한 얼굴이.

오, 대니는 가면을 벗을 시간이 되면 어떤 얼굴이 드러날지 두려웠다.

 

 

-스티븐 킹, <샤이닝> 中-

 

 

 

 

스티븐 킹의 또 다른 초기 호러 작품인 <세일럼스 롯> 역시 인간 소외와 그에 따른 공포를 다루고 있다.

 

 

1975년에 출간한 <세일럼스 롯>은 일견 뉴잉글랜드의 한 마을에 출몰하는 흔한 흡혈귀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 또한 인간 교류가 단절된 현대 사회에 대한 저자의 심오한 성찰과 강력한 사회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앞으로 스티븐 킹이 즐겨 소설의 배경으로 사용하게 될 주요 모티브가 등장한다. 즉, 사람들이 서로 단절된 채 살고 있는, 그래서 악의 힘이 파고 들어갈 여지가 있는 뉴잉글랜드 시골의 어느 조그만 마을, 그리고 드디어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악에 대항해 싸우며 다시 한번 인간 교류의 회복을 시도하는 이성적이고 선량한 사람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각기 다른 문제점들과 감추어진 비밀과 드러나지 않은 악을 가슴에 품은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마을 전체의 분위기 또한 그러한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홀연 이 마을에 나타나 사람들의 피를 빨고 파멸시키는 흡혈귀는 그런 상황이 만들어 낸 필연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 속의 흡혈귀는 이미 신앙을 잃어버린 신부의 십자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흡혈귀의 흡혈은 왜곡된 인간 교류의 상징이다. 진정한 교류는 남의 피를 빨아먹음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를 남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남을 살리는 것일 것이다.

1983년에 저자 스티븐 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일럼스 롯>에서 진짜 무서운 것은 흡혈귀들이 아니라 대낮의 텅 빈 마을입니다. 옷장에 뭔가가 숨어 있고, 침대 밑이나 트레일러들의 콘크리트 더미 속에 시체들이 들어 있는 마을 말입니다. 내가 그 소설을 쓰고 있는 동안, 텔레비전에서는 워터게이트 사건 청문회가 계속되고 있었지요. 하워드 베이커는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이 무엇을 알고 있었고, 언제 알았느냐는 것이오.' 그 말은 강박관념처럼 나를 사로잡았고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저는 내내 감추어진 비밀과 백일하에 드러난 비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일럼스 롯>은 텔레비전 영화(토비 후퍼 감독, 1979년)로도 제작되었는데, 원작의 음산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 시청자들로 하여금 뼛속 깊은 고독과 단절과 두려움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정작 무서운 것은 흡혈귀가 아니라, 흡혈귀를 불러들인 마을 사람들의 완벽한 단절과 어두운 비밀이라는 저자의 말은 <세일럼스 롯>이 단순한 공포 소설이 아니라, 중후한 예술적 주제를 가진 뛰어난 문학 작품이라는 사실을 잘 증명하고 있다.

 

 

-김성곤, <스티븐 킹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中-

 

 

 

 

나는 내가 이 글을 마치고 나서 <세일럼스 롯>을 읽을 것임을 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먼 훗날 다음과 같이 기억할 것이라는 사실도...

 

 

스티븐 킹의 <샤이닝>과 <세일럼스 롯>을 읽고 있던 시기.

한국에서는 지하철에서 침을 뱉었다고 뭐라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10여명의 행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두른 일용직 근로자가 경찰에 붙잡혔고, 은둔형 외톨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슈퍼마켙 여주인을 흉기로 찔렀으며,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가던 날 7살 어린 여자 아이가 가족과 함께 자고 있던 집안에서 이불째 납치되어 성폭행당했는가 하면, 아동용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던 30대 아빠가 자신의 친딸을 성폭행했다는 사건들이 연일 신문지상을 뒤덮고 있다고......

 

 

 

지금 우리는 더이상 흡혈귀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흡혈귀보다 우리를 더 공포로 몰아넣는 건, 다름 아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위와 같은 '묻지마 범죄'다. 스티븐 킹이 자신의 작품 <세일럼스 롯>에서 진짜 무서운 건 흡혈귀가 아니라 흡혈귀를 불러들인 마을이라고 말한 것처럼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건 범죄와 범죄자 자체가 아니라 범죄를 불러오는 사회가 아닐까. 가족조차 서로 교류하지 않는, 인간미가 사라진 사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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