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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노린다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4
마츠모토 세이조 지음, 문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평점 :
마쓰모토 세이초의 장편은 <점과 선> <모래그릇>에 이어 <너를 노린다>가 세번째다. <너를 노린다>는 <눈의 벽>이란 제목으로 1957년 <주간 요미우리>에 연재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첫번째 장편인 <점과 선> 역시 같은 해에 월간 <旅>에 연재되었다고 하니, 세이초는 두 편의 장편을 동시에 집필했던 셈이다. 세이초의 놀라운 집필속도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역시 장편 두 편을 동시에 쓰다니 대단하다!
<너를 노린다>는 <점과 선>이나 <모래그릇> 등의 작품처럼 대가의 명작으로 꼽히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어음사기 과정을 구체적으로 재연한 점이며, '우익'이라는 거대한 사회조직의 존재를 그려낸 점만으로도 세이초의 역량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그가 창시한 사회파 추리소설의 출발선에 있는 작품인만큼 '범행동기를 '가난한 시골 아이의 열등감' 정도로 귀결시킨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야기는 중소기업인 쇼와전기제작소의 회계과장 세키노 도쿠이치로가 어음사기를 당해 회사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이에 자책감을 느껴 자살하면서 시작된다.
세키노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는 안주머니 단추를 끄르면서 순간적으로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그것을 뿌리쳤다. 무슨 걱정이 있단 말인가? 은행원에게 안내되어 들어온 은행 응접실이다. 오야마 상무도 만났다. 그 모든 것은 이 호리구치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호리구치에게 눈치채여 괜히 불쾌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돈은 꼭 필요하다. 여기서 거절당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전무를 비롯해서 5천명이나 되는 종업원이 기다리고 있는데......세키노는 자기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지 절실히 통감했다.
그는 흰 봉투를 거냈다. 그리고는 약간 떨리는 손 끝으로 안에 든 것을 끄집어냈다.
"여기 있습니다."
쇼와 전기제작소 발행의 액명 3천만원짜리 어음이었다.
-마쓰모토 세이초, <너를 노린다> 中 p27~28-
사기는 이처럼 일말의 불안이라고 하는 조짐으로부터 시작된다. 다만, 이와 같은 불안을 체면이나 어쩔 수없는 상황에서 애써 무시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어쩔 수 없는 상태를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내어 '먹이감'을 속이느냐가 사기범의 기술에 해당되리라.
직원 월급날을 하루 앞두고 제도권 은행으로부터 차입을 할 수 없었던 쇼와전기제작소의 회계과장 세키노는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이 사기꾼을 불러 모으는 '미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자기 딴에는 최대한 신경을 쓰고 보안에 유의하면서 돌다리를 몇 번이나 두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두드린 돌다리가 살짝 흔들리는 걸 얼핏 직감했지만 '설마...'했을 것이다. 아니, 설령 돌다리가 무너질지언정 그에게는 되돌아갈 퇴로. 즉,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막다른 길에 접어들어 버리면 터무니 없는 '용기'와 '희망'이 멀쩡한 눈을 멀게 하는 법이다.
그래서 멀쩡히 두 눈 똑똑히 뜬 상태에서 사기를 당한 후 때늦은 후회를 한다.
R상호은행의 상무 오야마가 홋카이도로 출장을 간 사이, 누군가 오야마 흉내를 낸다. 고리대금업자 야마스기 기타로 사무실의 여직원-우에자키 에쓰코-으로 부터 소개받은 호리구치라는 사기꾼은 일당 2명과 함께 국회의원 명함으로 R상호은행의 응접실에 들어가 세키노로 하여금 오야마역을 맡은 일당을 R상호은행의 오야마 이사로 당연히 여기게끔 만들었다.
나 역시 일찍이 은행 VIP고객 응접실을 개인적인 목적으로 이용해본 적이 있다. 물론, 계약이 완료된 후 그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은행 업무를 보긴 했지만 말이다. 사기꾼들이 좀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면 은행이나 기타 관공서의 응접실 및 접대 공간을 범행 장소로 둔감시키고 버젓히 이용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행 응접실은 당연히 은행직원들만 사용하는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 즉 'blind spot' 혹은 '사고의 맹점'을 사기꾼들은 덫으로 이용한다.
회계과장 세키노 도쿠이치로의 부하직원인 다쓰오 다무라는 상사의 억울함을 풀 요량으로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사채업자인 야마스기 기타로의 사무실 여직원 우에자키 에쓰코를 미행하여 그녀가 우익의 한 계파를 이끌고 있는 후네자카 히데아키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아낸다.
그리고 그 와중에 두번째 희생자가 나타난다. 바로 쇼와전기제작소의 상임 변호사인 세누마 변호사가 고용한 전직 형사 출신인 다마루 도시이치다. 일명 신주쿠 살인사건으로 불리면서 전담 수사본부가 차려지고... 다쓰오-다무라팀과 수사팀이 마치 경주라도 하듯 앞서거니 뒷거니 범인의 흔적을 추적해간다.
수사회의가 본부에서 열렸다.
주임은 그 석상에서 경과를 보고했다. 보고가 끝나자 그는 의견을 말했다.
"신주쿠 살인의 범인은 그 구로이케라는 남자라고 단정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즉, 그는 바 레드문에서 야마모토라고 자칭한 바로 그 바텐더입니다. 그는 세무마 변호사가 조사하고 있는 사건에 관련된 한패이고 자기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변호사 사무실 직원인 다마루 도시이치를 격분해서 사살한 사람입니다. 그 흉기는 고시바 야스오로부터 산 권총임에 틀림없습니다. 즉, 감식에 따르면 미제 1911형 45구경 콜트 자동 권총입니다. 그뒤 구로이케나 그 일당은 또 권총이 필요해서 고시바가 증언하는 이른바, 깡마른 사내를 고시바에게 보냈지만 고시바는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고시바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아리요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을 때 또다시 그 깡마른 사내가 찾아와서 권총 입수의 루트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때도 고시바는 거절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날입니다. 그날은 들것이 도난당하기 며칠 전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그때 그 사나이는 병원 복도에 들것이 벽에 기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뒤 구로이케가 다마루를 사살하고 도주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 한패는 세누마 변호사를 납치해서 수사 당국으로부터 은신할 필요성을 느껴서, 도쿄 역으로부터 환자로 가장하여 탈출시키는 간계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마쓰모토 세이초, <너를 노린다> 中 p274~285-
두번째 피해자가 발생했다.
납치당한 자는 어음사건 발생 당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다쓰오가 사기꾼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의심했던 쇼와전기제작소의 상임 변호사인 세누마다. 납치한 세누마 변호사를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도쿄 외곽으로 데리고 나오기 위해 범죄일당은 들것을 이용하여 아픈 환자로 세누마를 위장시켜 기차에 태운다. 이렇게 되자, 우익 조직이 3천만원의 어음사기에 연류되어 있으며 현금이 그쪽으로 흘러들어갔음이 밝혀진다.
한편, 우에자키 에쓰코의 뒤를 추적하던 다쓰오는 그녀가 하네다 공항에서 누군가를 전송하고 미즈나미 역 근처 우체국에서 10만원권 어음을 현금으로 교환하는 등 어음사기꾼을 도와주고 있다는 걸 알아 차리지만 웬일인지 다쓰오는 우에자키 에쓰코 만큼은 보호해주고 싶다. 이것은 연민인가 아님 사랑인가.
사건 해결에 별다른 진척이 없는 가운데 중앙알프스의 깊은 산속에서 숨져 있는 세누마 변호사가 발견된다. 사인은 뜻밖에도 아사(餓死)다.
변호사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레드문의 바텐더로 일했던 자칭 야마모토라는 자가 어음사기범인 호리구치며 본명이 구로이케 겐키치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신병 확보에 수사력이 모아지는 상황에서 뜻밖에도 그가 백골로 변한 자살 사체로 발견된다.
어음사기 사건과 신주쿠 살인 사건은 범인이 자살한 것으로 일단락되는가 싶더니,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던 숨겨진 가족사가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후네자카 히데아키, 아니, 우메무라 온지가 자란 환경이지. 출생이라고 해도 좋아. 요코라고 하는 곳은 부근에서도 빈농으로 알려진 마을이야. 온지는 그 가난에 견디다 못해 집을 뛰어나간 것지. 무엇보다도 지방에서는 빈곤한 농가에 대해서는 인습적으로 멸시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야."
(......)
"그런데 그에게는 반항심이 있었지. 그 반항심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멸시하고 있는 세상을 복수해 주려는 일념에 사로잡혔던 거야"
(......)
"그 일념은 후네자카 히데아키라고 이름을 바꾸게 하고, 우익에 가담케 했어. 즉, 우익에 의해서 한바탕 명성을 떨치고 싶었던 거야. 그는 원래 재능이 있었어. 배짱도 있고, 그러는 사이에 부하도 생기고 해서 보스가 됐지. 즉 세상을 향해 복수하는 존재로 한 걸음을 내디뎠던 것이지"
"으음,"
"그러나, 최근의 군소 우익에는 돈이 없어."
다쓰오는 말을 이었다.
"전쟁 전 우익의 재원은 군부의 기밀비였어. 그것이 그들의 커다란 금고였던 것이야. 그런데, 전후에는 예전 후원자를 잃어버렸단 말이야. 그래서 신흥 우익은 그 재원을 비합법적인 수단에 호소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약간의 기부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지. 그래서 절조도 주의도 없는 전후의 우익은 공갈, 사기, 횡령 등을 일삼게 됐지."
후네자카의 경우는 금융업자인 야마스기 기타로와 결탁해서 야마스기로부터 정보를 얻어 가지고, 돈에 몰려서 할인 수표를 발행하는 회사를 함정에 몰아 넣어 어음사기를 하고 있었던 것야. 물론 분배는 야마스기에 주었을 것이지만, 이 돈이 후네자카의 단체에 중요한 자금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지. 그 돈으로 그는, 그를 위해서라면 생명도 아깝지 않다고 복종하는 부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야. 이 하수인이 되었던 자가 후네카자 즉, 우메무라 온지의 사촌동생인 구로이케였단 말이야."
또 한 사람, 야마스기의 사무실에서 비서로 있으면서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우에자키 에쓰코가 있지만 다쓰오는 그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새로 술이 나왔다
-마쓰모토 세이초, <너를 노린다> 中 p391~392-
본명 대신 가명을 쓰고 복잡하게 얽힌 가족사 등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에서 흔히 쓰이는 '트릭'이다. 우메무라 온지 역시 후네자카 히데아키로 이름을 바꾸고, 그의 사촌 동생인 구로이케 겐키치 역시 호리구치, 야마모토등 여러 가지 가명을 사용했다.
가족은 서로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개인을 고립시키는 거대한 장벽이 되기도 한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장벽에 갇혀 있으면서도 스스로 빠져 나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장벽이 아닌 울타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밖으로 걸어나오는 순간이 곧 가족해체요 가정파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혹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가족사라는 비밀의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그 안으로 숨어들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옳아매는 덫이 되고 만다. 마치 제때 발견하여 치료하지 않은 작은 상채기가 덧나 온몸을 못쓰게 만들 듯...
우에자키 에쓰코 역시 그런 인물이 아니었을까.
가족을 지키기 위해 범죄집단에 가담하게 되었지만 그 범죄집단으로부터 가족을 잃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게 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산이라고 할 정도가 아니었다. 길에서 20미터가량 들어간 숲 속에 나무상자는 반쯤 부숴진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그 속에는 도자기의 파편이 잔뜩 들어 있었고, 상자의 깨진 틈으로는 자잘한 파편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다쓰오는 달려 있는 꼬리표를 보았다.
진흙이 묻은 꼬리표에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발송인, 아이치 상회. XX전력주식회사 시로우마 발전소 귀중.'
다쓰오는 팔짱을 끼고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우에자키 에쓰코는 이 꼬리표를 확인하러 왔던 것이다...
(......)
우에자키 에쓰코는 무슨 필요에 의해서 나무상자를 여기까지 와서 확인했을까? 그녀는 확실히 수풀 속에 버려진 나무상자의 정체를 보았다. 그때 그녀는 어떤 눈초리로 이 나무상자를 바라다 보았을까?
-마쓰모토 세이초, <너를 노린다> 中 p352~353-
피혁공장에서 쓰인다는 화학약품인 중크롬산이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단백질 덩어리를 녹아내리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독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처럼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난 전문지식이 종종 범죄에 악용되곤 한다는 점은 영미 전통 추리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물론, 실제 범죄에서 전문지식이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바로 이 점이 사건 해결의 단서가 되기도 하지만, 추리소설에서 작가와 두뇌 플레이를 벌이면서 책장을 넘겨야 하는 독자로서는 이와같은 트릭에 직면하게 되면 왠지 사기 당한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이초의 <너를 노린다>에서도 중크롬산이 등장하며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한다.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개척한 세이초에게 기대했던 구성방식은 결코 아니었지만, 범죄은폐에 쓰인 소도구-중크롬산-가 마침내 범인을 단죄하는 최후의 도구로 쓰였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