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 / 들녘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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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1994년이후 18년만의 폭염이라고 한다. 이처럼 더운 여름철에는 추리소설이 제격이다.

올 여름 내가 선택한 작가는 스티븐 킹과 일본의 신예 미치오 슈스케였다. 한국과 달리 일본은 추리소설이 순수 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발달해 있는 나라이다. 추리소설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작가층도 두텁고 작품도 다양할뿐만 아니라 순수문학작품을 뛰어넘는 수준 높은 작품들도 많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2004년 <등의 눈>으로 등장한 미치오 슈스케의 두 번째 장편이다. 추리소설이 일반적으로 자극적인 제목인 것과는 달리 매우 시적이다. 8~9월에 피는 한해살이로 향일화(向日花), 조일화(朝日花)라고도 하며 꽃말은 숭배, 애모, 그리움 등으로 알려져 있다. 해바라기는 강렬한 색상과 정열적인 이미지로 예술가들의 사랑을 일찍부터 받아왔는데,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가 대표적이다.

 

 

도시화가 진행되어 더 이상 주변의 피고 지는 꽃들을 보며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게 되었지만, 해바라기가 피어나지 않는 여름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미치오 슈스케가 그려낸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자못 기대가 된다.

 

 

 

7월20일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종업식날.

주인공 마야 미치오-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따 주인공 이름을 지었다-는 담임인 이와무라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결석한 친구 S의 집에 가게 된다. 미치오는 S의 집으로 가는 도중 두 다리가 모두 골절된 채 입에는 비누를 물고 죽어 있는 고양이 사체를 발견한다. 벌써 아홉번째다. 최근 미치오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똑같은 모습으로 죽어 있는 개와 고양이의 사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한 행동이 분명한데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한편, 놀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S의 집에 도착한 미치오는 목을 매고 죽어 있는 친구의 모습에 기겁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즉각 이와무라 선생님께 알리지만 이와무라 선생님이 형사와 함께 S네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시신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거미로 환생한 S가 미치오를 찾아와 자신을 죽인 범인과 사라진 자신의 시신을 되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한편,

주인공 미치오와 동생 미카가 자주 찾아가던 동네 국수가게의 '도코할머니'가 어느날 비누를 입에 물고 두 다리가 절단된 채 죽은 모습으로 발견된다.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슈스케는 상식과 비상식,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절묘하게 결합시켜 놓았다.

작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보면 커져만 가는 의구심에 자꾸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여기에서 잠깐 미스터리 평론가 센가이 아키유키의 작품 해설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본격 미스터리는 1+1=2인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이해하면서 해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본격 미스터리에서 주관을 다룬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쿄고쿠 나츠히코의 데뷔작 <우부메의 여름>(1994년)이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키면서, 이후의 본격 미스터리는 수수께끼를 푸는 범위 내에서 주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인정하게 된다. 자신에게 보이는 세계와 타인에게 보이는 세계는 반드시 동일할 수 없다는 회의가 작품 배경에 깔리게 된 것이다. 그것을 본격 미스터리 장르의 위기로 파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관적으로 바라본 일그러진 세계 역시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오히려 본격 미스터리의 가능성을 넓힌다는 사실을 우리는 쿄고쿠 나츠히코나 야마구치 마샤야의 뛰어난 작품에서 분명히 인지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이 같은 미스터리 흐름에서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들, 특히 이 책은 주인공의 주관을 중시하면서 합리적인 수수께끼의 해결을 구축한 뛰어난 야심작이라 하겠다.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 덕분에 독자들은 작품 속 주인공의 비뚤어진 주관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 범상치 않은 구성력 또한 이 소설이 본격 미스터리와 양립하는 데 일조한다. 결국 주관을 모티브로 한 본격 미스터리는 문장이나 구성 면에서도 최대한으로 기교를 부린 인위적인 소설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소설과 현실성의 연출은 양립할 수 있다. 저자는 이 두가지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진부한 소설관에 반기를 든다. 그는 본격 미스터리는 인간을 그리는 데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여기서 '인간을 그린다'는 것은 확고부동한 일상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눈에 보이는 세계를 그리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저자의 소설 속 등장인물에게 현실 세계는 항상 주관과 오해, 그리고 환상에 좀 먹히는 약한 존재일 다름이다.

 

 

-2008년 5월, 미스터리 평론가 센가이 아키유키-

 

 

그러니까 슈스케는 독자의 상식을 시험하고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친구가 거미로 환생할 수 있을까?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동생이 도마뱀으로 환생할 수 있을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걸어다닐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같은 질문에 'No!'라고 대답한다.

이 세상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상식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들만 일어나는 걸까?

이 세상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상식적'이라면 애당초 두려움 즉 '공포'라는 감정은 존재할 수 없지 않을까.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때까지 혹은 죽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는 걸 보면 이 세상에는 반드시 상식적인 일들만 일어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스스로 굳게 믿으면서 역설적이게도 끊임없이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전쟁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공포, 귀신에 대한 공포, 소외에 대한 공포 등등......

공포의 근원은 환상과 착각이다. 그리고 환상과 착각은 무지(無知)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건 그만큼 인간이 모르는 무지의 세계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며 환상과 착각도 많다는 의미일 터.

 

 

 

'공포'를 극복하는 과정은 좋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지만-우린 이를 '승화'라고 부르며, 예술이야말로 인간의 불완전성을 가장 훌륭하게 극복한 사례이다- 통제되지 않는 일탈행위나 심지어 금지된 행동 등을 통해 표출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언제나 비극적이다.

 

 

엄마의 장례식 날. 마루 밖을 바쁘게 오가며 일을 도와주던 동네 사람들.

갑자기 들려온 그 소리. 낯선 소리.

다이조가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도와주는 사람들이 엄마를 관에 넣을 때였다.

ㅡ뭐지?ㅡ

마루에서 멍하니 마당을 바라보던 아홉 살짜리 다이조는 일어나서 그쪽을 바라보았다. 마당 구석에 동네 여자들이 대여섯 명 모여 있었다.

(......)

"저, 소리......"

엄마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있었다. 둔하고 낮은 희미한 소리를 내면서 그들은 엄마의 두 다리를 담담히 부러뜨리고 있었다.

(......)

ㅡ설마 저 사람들이ㅡ

지금 엄마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남편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어쩌면 엄마와 자신은 그 남편들 덕에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사실을 아내들이 알아버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몰래 남편과 정을 통했던 다이조의 엄마에게 그녀들이 제재를 가한 것은 아닐까. 모두가 공모하여 엄마에게 독을 먹인 것은 아닐까.

(......)

다이조는 마당 한 구석을 노려보았다. 담담히 작업을 진행하는 여자들을 분노에 찬 눈으로 지켜봤다.

ㅡ저 사람들이 우리 엄마를 죽인 거야ㅡ

저 사람들은 엄마가 다시 살아날까봐 무서워하고 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자신들이 죽인 여자가 복수를 하러 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한 여자가 말끄러미 바라보는 다이조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그 얼굴은 다이조도 잘 아는 여자였다. 볼이 축 늘어지고 입술이 두꺼운 여자. 바로 순경의 아내였다. 이웃여자들 속에서 항상 앞장서며 툭하면 주변에 이것저것 시키는 여자. 아까부터 이루어지고 있는 그 무서운 작업도 다른 여자들은 그녀의 지식를 받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

다이조는 천천히 일어났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두 다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마당을 등지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거실을 빠져나가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대충 꿰신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목 속에서 의미 없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 정신없이 달렸다.

ㅡ살해된 거야.ㅡ

죽을 힘을 다해 뛰어가면서 다이조는 가슴속으로 소리 질렀다.

ㅡ그 사람들이 엄마를 죽인 거야.ㅡ

(......)

사흘 뒤, 순경의 아내가 살해되었다. 머리를 돌로 맞고 인적이 드문 길가에서 온 얼굴을 피로 물들인 채 죽어 있었다고 한다. 범인은 알아내지 못했다.

ㅡ어쩌면.ㅡ

사건 소식을 들은 다이조는 엄마가 묻힌 무덤으로 급히 가보았다. 그리고 산간의 해가 들지 않는 그 장소를 한 번 보고, 온 몸이 움츠러들었다. 엄마의 법명이 적힌 졸탑파(묘지에 쓰이는 나무로 된 비석)만이 딸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앞, 엄마가 묻혀 있던 곳만 검은 흙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곳은 휑하니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 바닥에 뚜껑이 비뚤어진 관이 반쯤보였다. 아무리 봐도 그 안에 시신은 없었다.

ㅡ살아난 거야.ㅡ

흙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ㅡ살아나서 그 여자를 죽인 거야.ㅡ

다이조는 엄마의 무서운 집념에 바들바들 떨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사실은 엄마와 함께 한 9년이라는 세월의 추억을 단번에 공포로 바꾸어 놓았다. 자상했던 엄마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바닥에서 기어 나오는 엄마. 원한의 상대를 찾아서 마을을 걸어 다니는 엄마. 썩어가는 두 손으로 돌을 들어 올리는 엄마. 그 돌을 내려치는 엄마.

 

 

-미치오 슈스케, <해바라기가 피지않는 여름> 中-

 

 

후루세 다이조처럼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유일한 가족이자 보호자인 엄마를 잃어버린 충격은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왜곡된 이미지와 불필요한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온상이 되었을 것이다. 거부하려고 하면 할수록 강압적으로 조여오는 그 어떤 힘 같은 것 말이다. 자신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다이조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화풀이'를 하면서 두려움을 잠시나마 회피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미치오 슈스케의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카프카의 <변신>과 함께 읽어도 무방한 작품이다.

 

카프카의 <변신>은 어느날 갑자기 흉칙한 벌레로 변해버린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의 일그러진 일상과 죽음을 통해 소외된 인간의 고독과 인간 세계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우린 자기 자신만은 아니라고 결코 아닐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지만 모두 알고 있다.

너,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공포감에 어쩔 줄 몰라하는 '후루세 다이조'이자 '그레고리 잠자'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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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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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일본소설은 범죄 동기에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녀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범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범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다는 어째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즉 범행동기에 천착한 작가들로 유명합니다.

 

 

범죄 동기를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범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범죄자를 이해하게 되고, 심지어는 '그럴 수 밖에는 없었겠다.'는 식으로 범죄자를 두둔하고 범죄행위를 합리화시키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물론, 소설 작품 속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도 '핑계 없는 무덤없다.'라는 속담을 다들 알고 계실겁니다.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들을 읽고 있노라면 특별히 애착이 가고 연민이 생기는 사연 또한 없지 않지만 저마다 안고 있는 구구절절한 범행동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피해자나 그 가족들의 슬픔 따위는 너무도 간단하게 생략되거나 대수롭지 않게 다루어진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이 무슨 희안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강력범죄자들의 인권은 법의 이름으로 철저히 보호되는 반면 피해자의 인권과 그 가족들의 사생활은 법의 테두리밖으로 무참히 내동댕이쳐지곤 해서 비판 여론이 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이 지나치게 범행 동기를 추구하고 범죄자에게 집중한 나머지 '핑계 없는 범죄없다.'식의 면죄부를 주고 있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됩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에서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묻지마 범죄'가 커다란 사회문제로 대두된지 이미 오래인데, 이들의 범죄행위 역시 사회로부터 소외된 것에 따른 행동이므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책임을 다같이 반성해야 한다.라는 주장의 목소리도 들려 오곤 합니다.

 

 

물론, 장발장처럼 사회적 약자로서 어쩔 수없이 범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모두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열악한 현실을 극복하여 사회에 귀감이 되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위대한 성과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신이 사회로부터 억울한 고통과 슬픔을 받았다고 해서 사회에 복수하는 대신 극복함으로서 자기 승화의 길을 걸었습니다. 분명 한차원 높은 행동이라 아닐할 수 없습니다.

 

 

모든 범죄행위는 어떤 상황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응당의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여기에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인간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대한 자기 자신의 반응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서평을 쓰려했을 따름인데 그만 서론이 길어져버렸네요.

 

제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작품은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란 소설입니다.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출판되자마자 일본 열도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킨 이를테면 '문제작'인가 봅니다.

 

 

아닌게 아니라 작품의 기본 줄거리는 상당히 충격적이더군요. 그리고 배경 묘사보다는 이야기 위주로 작품이 전개되어 도무지 조금도 쉴 틈을 주지 않더군요. 쉼없이 펼쳐지는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가파지곤 하는데 역시 스토리텔링의 힘이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기는 역시나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됩니다.

S중학교에서 1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여선생님의 4살배기 외동딸이 학교 수영장에서 사체로 발견됩니다.

 

사건은 싱글맘인 유코 선생이 어린 딸을 학교에까지 데리고 온 데 따른 사고사로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최소한 겉으로는 말이지요. 그런데 종업식날이자 유코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두는 날 종례시간에 유코 선생님은 자신의 딸인 마나미를 죽인 범인이 반에 있다고 공표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유코 선생님은 자신의 어린 딸을 죽게 만든 범인이 누구인지 알았으면서도 어째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을까요? 선생님은 알았던 겁니다. 미성년자 범죄자는 철저하게 보호받는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래서 간접적으로 직접 응징에 나서기로 한 겁니다. 종업식날 교단 앞에서 모든 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고백한 것이 바로 범죄자들에 대한 응징의 시작이었습니다.

 

 

두번째 응징은 에이즈 감염자인 자신의 애인인자 죽은 딸의 아빠의 피를 체취하여 범인인 두 명의 학생들이 마실 우유팩에 주사기로 몰래 주입한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드라마틱한 응징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유코 선생님은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범인으로 지목된 아이들은 이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맙니다. 유코선생님이 노린 의도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유코 선생님의 응징은 성공한 걸까요?

아닙니다.

선생님의 응징은 실패로 돌아간 듯 싶습니다. 범인 중 한명은 죽음의 공포에 떨기는 커녕 오히려 에이즈 반응 검사가 나오기도 전에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것을 내심 기뻐하고 에이즈 환자로 행세하니 말입니다. 왜냐구요? 그건 와타나베 슈야-그 학생의 이름입니다-가 세상의 이목을 받음으로써 자신을 버리고 떠나 버린 엄마의 관심을 받고자 했으니까요.

 

와타나베 슈야는 전자공학도인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도난방지지갑인가 뭔가를 만들어 결국 마나미를 죽게 만들었지요. 아이들의 영웅심과 관심받고자 하는 욕심이 사춘기 특유의 영악함과 결합하여 불러온 참극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와타나베군에게는 분명히 살해 의도가 있었지만 사실 마나미는 감전사한 것이 아닙니다. 와타나베군이 끌어들인 얼뜨기 시모무라 나오키가 기절한 마나미를 보고 깜짝 놀란 나머지 수영장에 빠트렸기 때문에 익사한 것입니다.

 

 

살해 의도는 와타나베군이 갖고 있었지만 실제 살인은 시모무라군에 의해 저질러졌다?!

시모무라군은 억울하게 되었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미나토 가나에는 이처럼 단순에게 작품을 이끌고 가지 않습니다.

더 큰 충격을 던져주고자 작심한 듯 합니다. 소심하기 그지없는 시모무라군이 와타나베군에게 모욕을 당하자 글쎄 한순간 와타나베군을 이기고자 하는 욕망이 고개를 쳐들고 맙니다. 결국, 시모무라군은 기절한 마나미가 눈을 뜨자 와타나베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걸 직감하고는 스스로 그 계획을 성공시켜 와타나베이 하지 못한 것을 자신이 해냈다는 승리감을 맞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만 마나미를 물이 가득 차 있는 수영장에 빠트리고 합니다. 눈을 반짝거리고 있는 고작 4살 밖에 안된 어린 여자 아이를 말이지요.

 

 

시모무라의 행동은 다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시모무라는 어느모로보나 사랑과 관심이 넘쳐나는 가정에서 성장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불우한 와타나베군처럼 삐뚤어진 성격이나 가치관을 갖고 있을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엄마의 과잉보호가 문제였을까요? 아님, 자식을 보호할 줄만 알았지 격려할 줄 몰랐던 그녀의 질투심이 문제였을까요?

 

 

아들의 무죄를 철썩같이 믿고 있던 시모무라의 어머니는 진상을 알고 난 후, 아들과 함께 죽기로 결심하지만 오히려 거칠게 반항하는 시모무라군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맙니다. 이제 시모무라군은 존속살인까지 저지른 처지로 추락하고 맙니다.

 

 

한편, 엄마의 관심을 끌지 못한 와타나베군은 반장이자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미즈키의 목숨을 너무나도 손쉽게 빼앗아 버립니다. 그것 역시 매스컴의 관심을 받기 위해 저지른 살인이었지만 그의 기대처럼 경찰도 기자도 그를 찾지 않자, 마지막으로 자살폭탄을 감행하기에 이릅니다.

 

이 정도면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없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막장 스토리를 만들어 냈을까요?

와타나베는 결국 자신의 꾐에 빠져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엄마의 연구실을 폭탄으로 날려버리고 맙니다.

 

와타나베 군, 저는 와타나베 군이 만들어 학교에 설치한 폭탄을 그저 해체만 한 게 아닙니다. 그것을 다른 장소에 새로 설치해놓았어요. 와타나베 군이 스위치를 누르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와타나베 군은 스위치를 눌렀어요. 불발은 아니었습니다. 와타나베 군이 어느 정도의 규모를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철근 건물을 반쯤 날려버릴 정도의 효과는 충분히 있었습니다. 와타나베 군의 재능을 믿고 멀리 피신했기에 망정이지, 저도 위험할 뻔했네요.

K대한 이공학부 전자공학과 건물 제3연구실. 그곳이 폭탄을 새로 설치한 장소입니다. 폭탄을 제작한 것도, 스위치를 누른 것도 와타나베 군 본인입니다.

어떤가요, 와나베 군. 이것이 진정한 복수이자, 와타나베 군의 갱생을 향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미나토 가나에, <고백> 中-

 

 

이 모든 비극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몸부림치던 사춘기 남학생의 마음속에서 싹텄습니다. 그의 아픔은 빛나는 재능으로 승화되는 대신, 친구가 필요했을 뿐인 동급생 '마마보이'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를 친구로 감싸안은 '엄친딸'까지도 죽음으로 내몰고 맙니다.

 

이와 같은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지만 와타나베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응당의 죄값을 치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유코 선생님으로 하여금 직접 나서서 그를 응징하게 만들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결국, 고통을 또 다른 고통으로 확대 재생산하는 꼴이 되고 말았네요.

 

미나토 가나에는 이 작품을 통해 미성년자 범죄의 잔인함과 그들에 대한 법의 관대함 및 사회의 불합리한 시선을 지적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렇지만 너무 과격하게 앞서간 나머지 공감을 반감시킨 점이 없지 않습니다.

 

 

범죄에 대한 진정한 용서란 불가능하겠지요. 그렇지만 용서 대신 응징 역시 정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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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벌레 동서 미스터리 북스 1
에드거 앨런 포 지음, 김병철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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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까?

'추리 소설의 아버지'나 '괴기소설의 거장' 혹은 '최초의 사립탐정 오귀스트 뒤팡을 만들어낸 인물' 정도로 정의한다면 그에 대한 턱없는 이해 부족을 드러낸 꼴이나 다름 아니다.

 

 

<검은 고양이> <모르그 거리의 살인> <어셔집안의 몰락> 등등으로 대표되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세계는 단순히 괴기스러운 이야기나 살인사건의 해결 과정을 나열한 것이 아니다. 그는 프로이드보다도 먼저 인간 본성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공포와 두려움의 근원에 접근했을 뿐만 아니라 탁월하게 묘사함으로써 인간 자체에 대한 이해도를 한단계 드높혔다. 그러므로 그는 작가라기보다는 인간의 정신 세계를 여행한 최초의 탐험가라 할 수 있다.

 

 

1809년 미국 보스턴에서 유랑극단 배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에드거 앨런 포는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부유한 양부모를 만나 성장하지만 빈곤과 고독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친부모와 양부모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알콜에 탐닉하면서 고통스런 현실을 잊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성과 비이성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살았던 포의 평탄하지 않은 인생이야말로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에 충분했다. 포의 유별난 감수성과 지적인 날카로움은 어린 시절 5년 동안 영국에서 머물면서 받은 교육의 영향일 것이다.

 

 

17살에 버지니아 대학에 입학하지만 약혼의 실패와 양부의 송금 거절 및 도박에 빠져 막대한 빚을 지게 되면서 입학 10개월만에 퇴학당하고 만다. 작품 <윌리엄 윌슨>의 주인공인 '나'도 학교에서 도박을 일삼다가 결국 퇴교를 당하고 만다. 주인공이 이름도 생일도 나이도 똑같을 뿐만 아니라 쌍둥이처럼 외모까지 빼닮은 친구의 등장으로 고통을 받다가 결국 타락하게 된다는 내용을 그리고 있는 <윌리엄 윌슨>은 작가의 학창시절의 모습을 재현시켜 놓은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자전적 소설로 읽힌다.

 

 

일란성 남여 쌍둥이의 병적인 생활과 죽음에 대한 일탈을 그리고 있는 <어셔집안의 몰락>도 <윌리엄 윌슨>처럼 쌍둥이를 다루고 있다. 에드거 앨런 포가 이처럼 '쌍둥이'에 대해 지대한 관심과 집착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작품 구상에 따른 우연에 불과한 것일까? 어쩌면 포는 술에 극도로 취한 상태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망상'과 '신체이탈'을 경험했던 건 아니었을까? 알콜중독의 일부 증세가 환각, 환청, 망상 등을 포함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포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어둠 그리고 몽환적인 분위기 등은 그의 비정상적인 알콜 의존적 성향으로부터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에드거 앨런 포는 1836년 14살 어린 사촌 누이동생과 결혼하지만 노름과 주벽에 빠져 모든 것을 잃고 결국 1847년 아내마처 폐병으로 잃고 만다. 아내가 임종할 당시 포의 곁에는 아내의 몸을 덮고 있던 그의 낡은 외투 한벌과 고양이 한 마리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짐착컨데, 포는 고양이를 키웠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좋아했었던 것 같다. 그의 작품 <검은 고양이>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리고 오랜 병마로 여성의 모습은 상실한 채 흩트러질대로 흩트러진 병색이 완연한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어셔家의 몰락>에 등장하는 쌍둥이 누이 동생의 이미지를 상상해 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신경증을 앓고 있는 어셔집안의 마지막 후계자가 자신과 꼭 닮은 누이동생을 생매장시키는데 여기에는 단순한 근친살해사건이라고 하기에는 '기막힌 구조'가 담겨 있는데 바로 자기파괴가 그것이다. 신경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이 자신처럼 신경증을 앓는 쌍둥이 누이동생을 땅굴속에 생매장시키는 것은 바로 곧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하는 자기자신을 죽이는 행위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영화로 이 작품을 볼 때에는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성인이 되어 포의 인생을 더듬어가며 다시 읽어 보니 역시나 포의 깊은 절망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포는 <어셔家의 몰락>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을 만큼 협오했는지도 모른다.

 

 

근현대 추리 소설의 원조로 알려진 <모르그 거리의 살인>은 포가 창조하낸 최초의 사립탐정이자 그 이후의 추리소설 속 탐정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오귀스트 뒤팡이 등장하여 모녀를 참혹하게 살해한 범인은 다름 아닌 오랑우탄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참고로, 이 작품은 한동안 <모르그가의 살인>으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져왔는데, 나는 포의 또 다른 작품 <어셔가의 몰락> 때문인지는 몰라도 당연히 모르그가의 거리 '가(街)'를 집 '가(家)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오해를 나 한 사람만 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최근에 출판된 책에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모르그 거리의 살인> <어셔집안의 몰락>으로 번역되어 착오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애쓴 흔적이 보이니 말이다. 초기 번역사의 실착이 만들어낸 해프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범죄를 감쪽같이 은폐시켰다는 환희가 교차하면서 표출되는 주인공의 돌출행동이 '도플갱어'처럼 그려지는 작품이 있는데 하나는 포의 대표작인 <검은 고양이>고 다른 하나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말하는 심장>이라는 작품이다.

 

드디어 서너번째나 그들은 땅광으로 내려갔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내 심장은 마치 천진난만하게 잠을 자고 있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뛰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이리저리 유유히 활보하였다. 경관들은 완전히 의심이 풀어져 떠나려 했다. 내 마음의 기쁨은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나는 다만 한 마디라도 승리를 표현해서 나의 무죄를 그들에게 한층 더 확실하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불탔다.

"여러분!" 경관들이 계단을 올라갈 때 참다 못해 나는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의 의심이 풀어져 무엇보다 기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들의 건강을 빌며 경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집은요, 이 집은 말이죠, 그 구조가 아주 썩 잘 되어 있답니다. (아무거나 무작정 술술 얘기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에 싸여 무얼 얘기하고 있는지 나도 몰랐다.) 특별히 잘 지어진 집이라 할 수 있죠. 이 벽들은 말이죠, 자 여러분들 그만 가시렵니까? 이 벽돌은 말이죠, 견고하게 쌓여 있답니다."

여기서 일단 말을 멈추고 공연히 미치광이처럼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막대기로 아내의 시체가 있는 바로 그 부분을 힘껏 내리갈겼다.

그러나 하느님, 악마의 손길로부터 나를 구해 주소서! ㄸ깨린 소리의 울림이 채 가시기도 전에 무덤 속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 왔다. 처음에는 막혔다 끊어졌다 하는 어린애 울음 소리처럼 들리던 것이, 갑자기 길고 높게 이어지는 아주 이상하고도 잔인한 비명으로 변했다. 마치 지옥에 떨어진 수난자의 울부짓는 비명소리와 그에게 형벌을 주며 기뻐 날뛰는 악마들이 동시에 지르는 공포와 승리가 반반씩 뒤섞인 외침이었다.

-에드가 앨런 포, <검은 고양이> 中-

 

 

주인공 '나'는 특별히 죽여할 이유도 없는 노인을 매일 밤 12시에 찾아갔다가 마침내 여드레째되는 밤에 죽이고 만다. 그리고 그 시체를 방바닥의 널빤지 석 장을 뜯어내고 각목 사이에 쑤셔 넣고는 간교하고도 교묘하게 널빤지를 다시 맞추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소식을 전해 들은 경관들이 들이닥쳐 가택수색이 이어졌다.

 

 

경관들은 만족해했다. 나의 태도가 그들을 납득시켰다. 나는 이상하게도 침착했다. 내가 기분 좋게 대답하는 동안 그들은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되자 나는 자신이 창백해짐을 느끼고는 그들이 가 주기를 바랬다. 머리가 아프고 귀에서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앉아 잡담을 나누었다. 울림이 더 분명해졌다. 귀울림은 계속되고 더욱 분명해져 갔다. 나는 이런 느낌을 없애기 위해 좀 더 자유롭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귀울림은 계속되어 그겡 달했다. 결국 나는 그 소리가 내 귓속에서 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

나는 더 빨리, 더 격렬하게 지껄였다. 그러나 소음은 꾸준히 커져 갔다. 나는 일어나 사소한 것들에 관해 논쟁을 했고 격렬한 몸짓을 써 가며 큰 목소리롤 말했다. 그러나 소음은 계속 커져만 갔다. 왜 그들은 가지 않는 것일까? 그들에게 관찰되고 있는 것에 마치 화가 난 듯, 나는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며 이쪽저쪽을 돌아다녔다.

(......)

그러나 소음은 더 커졌다. 소리는 점점 더,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경관들은 여전히 즐겁게 지껄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과연 듣지 못했응ㄹ까? 전능하신 신이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들었다! 그들은 의심했고 그들은 알았다! 놈들은 나의 공포를 갖고 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ㄸ너 것도 이런 고통보다는 낫다! 어떤 것도 이런 비웃음보다는 견딜 만하다! 이런 위선적인 웃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나는 소리르 지르거나 죽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소리가 더 크게! 더 크게! 더 크게! 나느 소리쳤다.

"나쁜 놈들! 더 이상 시치미 떼지 마라! 내가 죽였다! 널빤지를 뜯어 봐! 여기, 바로 여기! 이 소리는 끔찍한 그의 심장박동이란 말이다!"

-에드가 앨런 포, <말하는 심장>中-

 

 

이 정도면 거의 두 작품의 클라이막스가 '도플갱어'처럼 똑같지 않은가.

 

 

소년 시절부터 에드가 앨런 포를 경외에 마지 않았던 히라이 타로(平井太郞)라는 일본인은 성인이 되어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에드가 앨런 포의 이름을 본 떠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라 지었다. 에도가와 란포는 일본에 근대 추리소설을 알리고 형식화시킨 인물로 그의 영향력은 사회파 추리소설의 창시자인 마쓰모토 세이초 그리고 '세이초의 손녀'로 불리우는 미야베 미유키까지 이어진다.

 

 

에드가 앨런 포의 작품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2전짜리 동전>은 에드가 앨런 포의 <황금벌레>와 <도난 당한 편지>와 상당히 비슷한 면이 있다. <황금벌레>는 해적이 남긴 암호 지도를 우연히 손에 넣은 주인공이 기발한 발상과 번뜩이는 재치로 암호를 풀어 마침내 보물을 찾아낸다는 이야기로 포의 문예상 당선작이라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2전짜리 동전> 역시 에도가와 란포의 문예상 당선작으로 암호를 활용하고 있다.

 

 

<2전짜리 동전>은 그 당시 일본에서 통용되던 두께 4mm 직경 3cm 정도 크기의 2전짜리 동전을 두쪽으로 쪼개고 그 사이에 훔친 돈을 숨겨 놓은 장소를 암호로 기록한 종이를 숨긴다. 그리고 훔친 돈은 문방구에서 판매하는 진짜와 흡사한 가짜 돈과 바꿔치기 함으로써 남들이 모두 진짜돈을 가짜돈으로 믿게 만듦으로써 훔친 돈을 안전(?)하게 보관한다는 이야기인데, 사람들 눈에 드러나게 감춤으로써 의심을 사지 않는다는 이 아이디어 역시 포의 단편 <도난 당한 편지>로부터 모티브를 딴 온 것이다. 분명에 집안에 숨겨 놓았건만 경관들이 몇날 며칠 동안 샅샅이 뒤져 보아도 편지는 오간데 없다. 편지를 훔친 범인은 도대체 어디에 숨겨 놓은 걸까?

 

 

 

삶의 진실은 마치 숨은그림찾기와 같아서 뻔히 보이는데도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추리소설의 트릭 역시 사건 해결의 단서와 정보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 있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추리공포소설에 매료되는 까닭은 어쩌면 이렇듯 추리소설이 우리의 삶과 가장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뻔히 드러나 있음에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은 내 인생의 맹점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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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노린다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4
마츠모토 세이조 지음, 문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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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의 장편은 <점과 선> <모래그릇>에 이어 <너를 노린다>가 세번째다. <너를 노린다>는 <눈의 벽>이란 제목으로 1957년 <주간 요미우리>에 연재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의 첫번째 장편인 <점과 선> 역시 같은 해에 월간 <旅>에 연재되었다고 하니, 세이초는 두 편의 장편을 동시에 집필했던 셈이다. 세이초의 놀라운 집필속도는 익히 알려져 있지만 역시 장편 두 편을 동시에 쓰다니 대단하다!

 

 

<너를 노린다>는 <점과 선>이나 <모래그릇> 등의 작품처럼 대가의 명작으로 꼽히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어음사기 과정을 구체적으로 재연한 점이며, '우익'이라는 거대한 사회조직의 존재를 그려낸 점만으로도 세이초의 역량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그가 창시한 사회파 추리소설의 출발선에 있는 작품인만큼 '범행동기를 '가난한 시골 아이의 열등감' 정도로 귀결시킨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야기는 중소기업인 쇼와전기제작소의 회계과장 세키노 도쿠이치로가 어음사기를 당해 회사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이에 자책감을 느껴 자살하면서 시작된다.

 

세키노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는 안주머니 단추를 끄르면서 순간적으로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그러나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그것을 뿌리쳤다. 무슨 걱정이 있단 말인가? 은행원에게 안내되어 들어온 은행 응접실이다. 오야마 상무도 만났다. 그 모든 것은 이 호리구치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호리구치에게 눈치채여 괜히 불쾌하게 해서는 안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돈은 꼭 필요하다. 여기서 거절당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전무를 비롯해서 5천명이나 되는 종업원이 기다리고 있는데......세키노는 자기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지 절실히 통감했다.

그는 흰 봉투를 거냈다. 그리고는 약간 떨리는 손 끝으로 안에 든 것을 끄집어냈다.

"여기 있습니다."

쇼와 전기제작소 발행의 액명 3천만원짜리 어음이었다.

 

-마쓰모토 세이초, <너를 노린다> 中 p27~28-

 

 

 

사기는 이처럼 일말의 불안이라고 하는 조짐으로부터 시작된다. 다만, 이와 같은 불안을 체면이나 어쩔 수없는 상황에서 애써 무시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어쩔 수 없는 상태를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내어 '먹이감'을 속이느냐가 사기범의 기술에 해당되리라.

 

 

직원 월급날을 하루 앞두고 제도권 은행으로부터 차입을 할 수 없었던 쇼와전기제작소의 회계과장 세키노는 이와 같은 절박한 상황이 사기꾼을 불러 모으는 '미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자기 딴에는 최대한 신경을 쓰고 보안에 유의하면서 돌다리를 몇 번이나 두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두드린 돌다리가 살짝 흔들리는 걸 얼핏 직감했지만 '설마...'했을 것이다. 아니, 설령 돌다리가 무너질지언정 그에게는 되돌아갈 퇴로. 즉,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막다른 길에 접어들어 버리면 터무니 없는 '용기'와 '희망'이 멀쩡한 눈을 멀게 하는 법이다.

그래서 멀쩡히 두 눈 똑똑히 뜬 상태에서 사기를 당한 후 때늦은 후회를 한다.

 

 

R상호은행의 상무 오야마가 홋카이도로 출장을 간 사이, 누군가 오야마 흉내를 낸다. 고리대금업자 야마스기 기타로 사무실의 여직원-우에자키 에쓰코-으로 부터 소개받은 호리구치라는 사기꾼은 일당 2명과 함께 국회의원 명함으로 R상호은행의 응접실에 들어가 세키노로 하여금 오야마역을 맡은 일당을 R상호은행의 오야마 이사로 당연히 여기게끔 만들었다.

 

 

나 역시 일찍이 은행 VIP고객 응접실을 개인적인 목적으로 이용해본 적이 있다. 물론, 계약이 완료된 후 그 자리에서 온라인으로 은행 업무를 보긴 했지만 말이다. 사기꾼들이 좀 더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면 은행이나 기타 관공서의 응접실 및 접대 공간을 범행 장소로 둔감시키고 버젓히 이용할 개연성은 충분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행 응접실은 당연히 은행직원들만 사용하는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믿음 즉 'blind spot' 혹은 '사고의 맹점'을 사기꾼들은 덫으로 이용한다.

 

 

회계과장 세키노 도쿠이치로의 부하직원인 다쓰오 다무라는 상사의 억울함을 풀 요량으로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동분서주하는 과정에서 사채업자인 야마스기 기타로의 사무실 여직원 우에자키 에쓰코를 미행하여 그녀가 우익의 한 계파를 이끌고 있는 후네자카 히데아키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아낸다.

 

그리고 그 와중에 두번째 희생자가 나타난다. 바로 쇼와전기제작소의 상임 변호사인 세누마 변호사가 고용한 전직 형사 출신인 다마루 도시이치다. 일명 신주쿠 살인사건으로 불리면서 전담 수사본부가 차려지고... 다쓰오-다무라팀과 수사팀이 마치 경주라도 하듯 앞서거니 뒷거니 범인의 흔적을 추적해간다.

 

 

수사회의가 본부에서 열렸다.

주임은 그 석상에서 경과를 보고했다. 보고가 끝나자 그는 의견을 말했다.

"신주쿠 살인의 범인은 그 구로이케라는 남자라고 단정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즉, 그는 바 레드문에서 야마모토라고 자칭한 바로 그 바텐더입니다. 그는 세무마 변호사가 조사하고 있는 사건에 관련된 한패이고 자기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변호사 사무실 직원인 다마루 도시이치를 격분해서 사살한 사람입니다. 그 흉기는 고시바 야스오로부터 산 권총임에 틀림없습니다. 즉, 감식에 따르면 미제 1911형 45구경 콜트 자동 권총입니다. 그뒤 구로이케나 그 일당은 또 권총이 필요해서 고시바가 증언하는 이른바, 깡마른 사내를 고시바에게 보냈지만 고시바는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고시바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아리요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을 때 또다시 그 깡마른 사내가 찾아와서 권총 입수의 루트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때도 고시바는 거절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날입니다. 그날은 들것이 도난당하기 며칠 전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그때 그 사나이는 병원 복도에 들것이 벽에 기대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뒤 구로이케가 다마루를 사살하고 도주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 한패는 세누마 변호사를 납치해서 수사 당국으로부터 은신할 필요성을 느껴서, 도쿄 역으로부터 환자로 가장하여 탈출시키는 간계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마쓰모토 세이초, <너를 노린다> 中 p274~285-

 

 

두번째 피해자가 발생했다.

납치당한 자는 어음사건 발생 당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다쓰오가 사기꾼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의심했던 쇼와전기제작소의 상임 변호사인 세누마다. 납치한 세누마 변호사를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도쿄 외곽으로 데리고 나오기 위해 범죄일당은 들것을 이용하여 아픈 환자로 세누마를 위장시켜 기차에 태운다. 이렇게 되자, 우익 조직이 3천만원의 어음사기에 연류되어 있으며 현금이 그쪽으로 흘러들어갔음이 밝혀진다.

 

 

한편, 우에자키 에쓰코의 뒤를 추적하던 다쓰오는 그녀가 하네다 공항에서 누군가를 전송하고 미즈나미 역 근처 우체국에서 10만원권 어음을 현금으로 교환하는 등 어음사기꾼을 도와주고 있다는 걸 알아 차리지만 웬일인지 다쓰오는 우에자키 에쓰코 만큼은 보호해주고 싶다. 이것은 연민인가 아님 사랑인가.

 

사건 해결에 별다른 진척이 없는 가운데 중앙알프스의 깊은 산속에서 숨져 있는 세누마 변호사가 발견된다. 사인은 뜻밖에도 아사(餓死)다.

 

 

변호사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레드문의 바텐더로 일했던 자칭 야마모토라는 자가 어음사기범인 호리구치며 본명이 구로이케 겐키치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의 신병 확보에 수사력이 모아지는 상황에서 뜻밖에도 그가 백골로 변한 자살 사체로 발견된다.

 

 

어음사기 사건과 신주쿠 살인 사건은 범인이 자살한 것으로 일단락되는가 싶더니, 오랫동안 비밀에 부쳐졌던 숨겨진 가족사가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후네자카 히데아키, 아니, 우메무라 온지가 자란 환경이지. 출생이라고 해도 좋아. 요코라고 하는 곳은 부근에서도 빈농으로 알려진 마을이야. 온지는 그 가난에 견디다 못해 집을 뛰어나간 것지. 무엇보다도 지방에서는 빈곤한 농가에 대해서는 인습적으로 멸시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야."

(......)

"그런데 그에게는 반항심이 있었지. 그 반항심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를 멸시하고 있는 세상을 복수해 주려는 일념에 사로잡혔던 거야"

(......)

"그 일념은 후네자카 히데아키라고 이름을 바꾸게 하고, 우익에 가담케 했어. 즉, 우익에 의해서 한바탕 명성을 떨치고 싶었던 거야. 그는 원래 재능이 있었어. 배짱도 있고, 그러는 사이에 부하도 생기고 해서 보스가 됐지. 즉 세상을 향해 복수하는 존재로 한 걸음을 내디뎠던 것이지"

"으음,"

"그러나, 최근의 군소 우익에는 돈이 없어."

다쓰오는 말을 이었다.

"전쟁 전 우익의 재원은 군부의 기밀비였어. 그것이 그들의 커다란 금고였던 것이야. 그런데, 전후에는 예전 후원자를 잃어버렸단 말이야. 그래서 신흥 우익은 그 재원을 비합법적인 수단에 호소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약간의 기부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지. 그래서 절조도 주의도 없는 전후의 우익은 공갈, 사기, 횡령 등을 일삼게 됐지."

후네자카의 경우는 금융업자인 야마스기 기타로와 결탁해서 야마스기로부터 정보를 얻어 가지고, 돈에 몰려서 할인 수표를 발행하는 회사를 함정에 몰아 넣어 어음사기를 하고 있었던 것야. 물론 분배는 야마스기에 주었을 것이지만, 이 돈이 후네자카의 단체에 중요한 자금이 되었던 것은 물론이지. 그 돈으로 그는, 그를 위해서라면 생명도 아깝지 않다고 복종하는 부하 1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야. 이 하수인이 되었던 자가 후네카자 즉, 우메무라 온지의 사촌동생인 구로이케였단 말이야."
또 한 사람, 야마스기의 사무실에서 비서로 있으면서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우에자키 에쓰코가 있지만 다쓰오는 그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새로 술이 나왔다

-마쓰모토 세이초, <너를 노린다> 中 p391~392-

 

 

본명 대신 가명을 쓰고 복잡하게 얽힌 가족사 등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에서 흔히 쓰이는 '트릭'이다. 우메무라 온지 역시 후네자카 히데아키로 이름을 바꾸고, 그의 사촌 동생인 구로이케 겐키치 역시 호리구치, 야마모토등 여러 가지 가명을 사용했다.

 

 

가족은 서로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기도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개인을 고립시키는 거대한 장벽이 되기도 한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장벽에 갇혀 있으면서도 스스로 빠져 나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장벽이 아닌 울타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밖으로 걸어나오는 순간이 곧 가족해체요 가정파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혹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가족사라는 비밀의 문을 굳게 걸어잠그고 그 안으로 숨어들지만 결국 자기 자신을 옳아매는 덫이 되고 만다. 마치 제때 발견하여 치료하지 않은 작은 상채기가 덧나 온몸을 못쓰게 만들 듯...

 

 

우에자키 에쓰코 역시 그런 인물이 아니었을까.

가족을 지키기 위해 범죄집단에 가담하게 되었지만 그 범죄집단으로부터 가족을 잃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게 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녀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산이라고 할 정도가 아니었다. 길에서 20미터가량 들어간 숲 속에 나무상자는 반쯤 부숴진 상태로 버려져 있었다.

그 속에는 도자기의 파편이 잔뜩 들어 있었고, 상자의 깨진 틈으로는 자잘한 파편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다쓰오는 달려 있는 꼬리표를 보았다.

진흙이 묻은 꼬리표에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발송인, 아이치 상회. XX전력주식회사 시로우마 발전소 귀중.'

다쓰오는 팔짱을 끼고 그 자리에 오랫동안 서 있었다.

우에자키 에쓰코는 이 꼬리표를 확인하러 왔던 것이다...

(......)

우에자키 에쓰코는 무슨 필요에 의해서 나무상자를 여기까지 와서 확인했을까? 그녀는 확실히 수풀 속에 버려진 나무상자의 정체를 보았다. 그때 그녀는 어떤 눈초리로 이 나무상자를 바라다 보았을까?

-마쓰모토 세이초, <너를 노린다> 中 p352~353-

 

 

피혁공장에서 쓰인다는 화학약품인 중크롬산이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단백질 덩어리를 녹아내리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독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처럼 상식의 범주에서 벗어난 전문지식이 종종 범죄에 악용되곤 한다는 점은 영미 전통 추리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물론, 실제 범죄에서 전문지식이 사용되고 있으며 또한 바로 이 점이 사건 해결의 단서가 되기도 하지만, 추리소설에서 작가와 두뇌 플레이를 벌이면서 책장을 넘겨야 하는 독자로서는 이와같은 트릭에 직면하게 되면 왠지 사기 당한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세이초의 <너를 노린다>에서도 중크롬산이 등장하며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한다.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개척한 세이초에게 기대했던 구성방식은 결코 아니었지만, 범죄은폐에 쓰인 소도구-중크롬산-가 마침내 범인을 단죄하는 최후의 도구로 쓰였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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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이가든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편혜영은 <토끼의 묘>로 2009년도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토끼의 묘>는 파견근무자인 '그'의 일상을 통해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을 그린 작품이다.

주인공 '그'는 어느 지방도시로 파견근무를 나가게 된다. 기간은 6개월이다.

6개월 동안만 머물다 떠날 것이므로 '그'는 도시에 대해 관심도 없고 사무실의 동료들과도 '애써' 관계를 맺으려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공원에서 버려진 토끼를 발견하곤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내 곧 후회하게 되지만.

 

단 6개월만이라는 조건을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면서 어쩔 수 없이 토끼를 키우는 '그'는 서서히 토끼의 '본질'을 인식하게 된다.

 

‘개나 고양이처럼 친근하게 애정표현을 하는 경우가 없어 애완동물이나 반려동물이라고 부르기 망설여지고’, ‘사료와 양육에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소나 돼지 취급을 하는 게 적당했지만 고기를 삶아 먹기 꺼려진다는 점에서 소나 돼지보다 못하다’. 그런가하면 ‘무표정하게 누군가를 오랫동안 응시하다가는 결국 미움을 사고 만다는 걸 알려주’며 교훈을 준다.

 

더도 덜도 아닌, 인간 그 자체다.

 

 

<토끼의 묘>는 소외된 현대인을 토끼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작품의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사무실과 독신자 아파트 그리고 야외 공원은 '묘지'라고 볼 수 있다. 공적인 관계만 존재하는 사무실 풍경이며 토끼장을 방불케하는 독신자 아파트 그리고 싫증이 난 애완동물을 몰래 갔다 버리는 공원...

 

작가 편혜영은 도시화와 사무자동화가 진행된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점점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인간-인간, 인간-동물 간 관계 맺기에 실패하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다. 다만, 회복 가능성을 열어두는 여타의 작품들과는 달리, 더욱더 자기자신 속으로 깊숙히 침잠해 들어가는 마무리 장면이 가히 충격적이다.

 

 

사무실에 있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하루에 다섯번씩 벌떡 일어섰다.

처음 일어섰을 때는 큰 소리로 웃으며 괜히 화장실에 갔고

두 번째 일어섰을 때는 멋쩍은 듯 살짝 웃으며 물을 마시러 갔다.

세 번째 벌떡 일어섰을 때는 자기 머리통을 때렸다.

네 번째 일어섰을 때는 울고 싶어졌고

다섯번째 일어섰을 때는 조금 울었다.

 

                                                                                -편혜영, <토끼의 묘> 中-

 

<크림색 소파의 방>은 중소 도시에서의 곤궁한 삶을 마치고 대도시(서울)로 입성하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삿짐 차량을 먼저 보낸 후, 젖먹이 어린 자식과 젊은 아내를 태우고 서울로 향한다. 상식적으로 대도시의 새집으로 이사가는 것이니 당연히 흥겹고 희망 가득한 분위기여야 하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어딘지 모르게 칙칙하고 어두운 분위기다.

 

 

불길한 예감은 어긋남이 없듯, 도중에 차가 고장나고 만다. 게다가 장대같은 비까지 쏟아지고...

간판을 보고 찾아들어간 주유소는 더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불량 청년들을 만나게 되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차량수리를 할 줄 아는 듯 따라나선 불량청년은 본넷을 열어 뭔가 작업을 하는 듯하지만 그의 시선은 차안에서 젖먹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젊은 아내에게 쏠려있다. 주인공 '그'는 기분이 상하면서 그 모든 불유쾌한 상황들을 모두 칠칠한 못한 아내탓으로 돌려버린다. 어쭙잖게 경찰에 신고를 하고 서울로 향하는가 싶더니 도중에 차량이 또 서버린다. 어쩔 수 없이 보험회사에 연락을 취해보지만 이미 도착할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보험회사 직원은 전화연결도 되지 않은 채, 나타날 기미조차 없다. 이런 초조한 가운데에서도 이미 새집에 도착한 이삿집 인부들의 전화는 계속 걸려온다. 거실 크기에 맞지 않은 크림색 소파가 문제였다.

 

 

새집 거실에 어정쩡하게 놓여 있는 소파는 곧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주인공의 위치를 말해준다.

 

작품은 상당히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

신고에 대한 보복으로 주인공을 따라온 불량청년들에게 구타당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홍콩 오우삼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슬로우 비디오로 흐물흐물 움직이는 주먹질과 발길질 그리고 고통스럽게 이그러지는 표정들과 둥둥 떠다니는 땀방울과 빗방울들......

 

나약한 현대인의 초상이다.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추리소설집을 갖고 있단다.

하여, 일찍부터 독서목록에 담겨 있던 편혜영의 <아오이 가든>이라는 책을 서둘러 읽게 되었다.

 

모두 9편이 실려 있었는데 첫번째와 두번째 작품인 <저수지>와 <아오이 가든>까지만 읽고 책을 덮었다.

 

시체와 꾸물거리는 구더기들 그리고 끊임없이 언급되는 역한 냄새들로 인해 시각과 후각은 물론이고 촉각마저 마비될 지경이다.

독특하고 새롭다.

그러나 상당히 고통스럽다.

 

공포 스릴러물 매니아가 아니라면 섣불리 읽기를 시도해서는 결코 안되는 책이다.

 

다만,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랜드-이광호>라는 제목으로 실린 작품해설은 읽어 볼만했다. 작가의 신선한 시도와 독특한 상상력의 의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니 말이다.

 

 

편혜영 소설의 서술자는 작중 인물의 정서적 개입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인물에 대한 독자들의 동일시의 가능성과도 거리를 두는 냉혹하고 무표정한 태도를 취한다. 이 하드보일드한 문체의 효과는 무엇인가? 탈내면성의 문법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간 주체의 시선의 우월적 위치 자첼르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휴먼 스토리도 배제한 채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시체의 일부로 되돌리게 한다.

(중략......)

편혜영 소설에서 인간은 '부패하기 쉬운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라는 낯익은 명제를 거슬러 다시, '인간은 동물이며 더 나아가 부패하기 쉬운 단백질에 불과하다'는 극단적인 명제로 되돌아간다.

(......)

대중화하는 하위 대중문화의 영역을 '억압적 탈승화'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면, 편혜영의 소설 미학이 향하는 지점은 (...) 엽기적 대중문화의 시각적 쾌락 효과 혹은 도착의 기호학 너머의 세계이다. 편혜영은 시체를 시각적으로 대상화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인간 존재 자체를 '시체되기'의 국면으로 끌고 나간다. 이 '시체 되기' '동물 되기' '벌레 되기'의 상상력은, 인간 존재의 주체화 과정을 해체하고 다른 차원의 삶을 경험하게 만든다. 주요한 것은 시각적인 코드에서의 시체의 발견과 전시가 아니라, '시체 되기'를 통해 경험되는 '다른 삶'이다. 이런 맥락에서 편혜영의 소설 미학이 향하는 지점은 탈억압적인 미학적 탈승화의 지점이다.

 

-<시체들의 괴담, 하드고어 원더랜드-이광호> 中-

 

 

작품 해설자의 말처럼 불편하고 엽기적인 작품 속 장면들 속에는 인간 진화의 결과인 현대 문명이 자랑이 아닌 '악몽'이라는 은유가 내포되어 있으며, 작가의 목적이 독자로 하여금 기존의 현대 소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체험을 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면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하고 싶다. 단 두 편을 읽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말로 형언할 수조차 없는 체험을 했으니 말이다.

 

 

많은 고민과 용기 속에서 탄생했을 작가의 작품들을 끝까지 읽지 못해서 매우 안타깝다. 나의 독서력이 이처럼 전위적이고 독특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음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이건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독자인 나의 개인적 성향일 뿐, 작품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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