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가와 란포 전단편집 1 본격추리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소영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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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에도가와 란포(江戶川亂步)는 본명이 히라이 타로(平井太郞)로 일찍부터 에드가와 앨런 포의 작품을 즐겨 읽고 좋아한 나머지 에드가와 앨런 포의 발음을 본 떠 에도가와 란포라는 필명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90여년 전인 1920~1930년대에 주로 발표된 그의 작품들은 이제는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니라 당시 일본 사회와 일본인의 심리를 엿볼 수 있는 역사적인 가치까지 담고 있다.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란포의 작품에는 전보와 기차가 수시로 등장하고 전화는 최첨단 시설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무려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랑, 돈, 질투, 원한 등등 범죄의 동기면에서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과정 역시 CC화면 등 최첨단 방식이 새롭게 도입되긴 했지만 부검 지문감식 등 그 당시 수사에 주로 사용되었던 방식이 지금도 그대도 쓰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범죄자의 '심리(마음)'을 읽어내는 수사관의 '직관'이야말로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한 '키워드'라는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는 생각이 든다.

 

 

<2전짜리 동전>은 그 당시 일본에서 통용되던 두께 4mm 직경 3cm 정도 크기의 2전짜리 동전을 두쪽으로 쪼개고 그 사이에 암호를 기록한 종이를 숨긴다는 설정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물론, 일본어를 근간으로 한 암호 해독 부분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발상 자체는 기발했다. 그리고 진짜와 흡사한 가짜 돈을 만들어 문방구에서 판매한다는 사실과 훔친 돈을 문방구 납품용 가짜 돈과 바꿔치기 해서 안전(?)하게 보관한다는 아이디어 또한 100년이라는 시차를 거뜬히 뛰어넘어 21세기초의 독자들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것 같다.

 

 

<심리실험>은 피의자에게 단어를 말해주고 떠오르는 단어를 피의자가 말하도록 한 후, 단어와 답변할 때까지의 시간 간격등을 총체적으로 분석하여 사건과의 연관성을 유추해내는 연상기법이 등장하는데 거짓말 탐지기의 고전판이 아닌가 싶다.

 

 

에도가와 란포가 만들어낸 탐정 아케치 코고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D언덕의 살인사건>과 <석류>는 인간의 사디즘적 성적 취향을 모티프로 삼은 빼어난 수작이다.

 

 

이 밖에도 <몽유병자의 죽음>과 <두 폐인> 등은 몽유병 환자 혹은 가짜 몽유병 환자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몽유병자의 죽음>은 몽유병을 앓고 있는 아들이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어느날 밤 아버지가 머리에 둔기를 맞고 뜰에서 죽은 사체로 발견되자 아들은 자신이 꿈속에서 아버지를 죽인 건 아닌가 싶어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도망가던 중 허망하게 죽어버린다는 내용인데, 아버지의 사인인 밝혀졌을 때의 그 허망감이라니......

 

 

그리고 멀쩡한 사람을 그것도 친한 친구를 몽유병 환자로 만든 후, 하숙집 주인을 죽인 살인범으로 몰아가는 <두 폐인>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마주한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몽유병 환자가 등장하는 위와 같은 작품들은 조금만 더 섬세하게 구성을 다듬고 신중하게 표현을 선택한다면 훨씬 더 뛰어난 작품으로 재탄생하지 않을까 싶다. 굳이 추리소설이 아니더라도 순수소설의 모티브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한번 굳게 믿어 버리면 설령 그 믿음이 현실과 정반대라고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 두뇌의 착각을 소름끼치도록 표현해 낸 <무서운 착오>도 좋았고, 숨을 멈추게 만드는 마지막 반전이 돋보이는 <석류>도 뛰어난 작품이다.

 

<석류>는 정통추리소설의 기본 트릭 중에 하나인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일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인물바꿔치기'수법으로 완전 범죄를 달성한 가해자가 20년이나 지난 어느날 그 당시 사건을 추리했던 형사 앞에서 자백과 동시에 깊은 계곡물 속으로 뛰어들어 자결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는 아마도 서구 정통추리소설을 모방하며 발전하기 시작한 일본의 추리문학이 자결이나 자살을 미화하는 전통적 분위기를 녹여내면서 만들어낸 일본다운 마무리가 아닐까 싶다.

 

 

신경증과 의부증에 걸린 아내가 남편을 극도로 미워한 나머지 자살하면서 타살로 위장하여 남편을 살인자로 몰아가는 <영수증 한 장>은 발상이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장편으로 만들어도 좋았을 것 같다.

 

 

에도가와 란포는 자신이 밝혔듯이 장편보다는 단편에서 두각을 나타낸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단편들은 영미의 정통추리소설의 기법과 구성을 상당히 많이 모방한 면이 없지 않고, 고대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품 중간 중간에 작가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어 설명하는 해설투 문체가 곳곳에 등장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고 결국 작품의 재미마저 반감시키는 단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점들이 일본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개척한 작가의 공로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1955년 에도가와 란포의 환갑을 맞이하여 조성된 '에도가와 란포상'은 일본에서는 이미 명실상부한 추리소설작가들의 등용문이 되었다.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들을 어렸을때부터 즐겨 읽으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완성해 냈으니 이 점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일본 추리소설 분야에서 에도가와 란포의 위상과 영향력이 어느정도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와 같은 작가의 작품들이 한국에서는 최근에서야 본격적으로 번역 소개되기 시작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저, 과거 양국간의 역사적 문제가 청산되지 않았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이번에 도서출판 두드림에서 총47편의 단편들을 3권으로 나누어 출간했다고 하는데 1,2권은 본격추리물이고 3권은 '기괴환상'으로 나눠져 있단다. 본격추리는 1권만으로도 충분히 맛을 보았으니 기괴환상물로 묶여졌다는 3권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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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그릇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3
마츠모토 세이조 지음, 허문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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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보다는 단편이 훨씬 더 좋은 작가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코 아사다 지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또 여기에 한명의 작가를 추가하고 싶다. 바로 마쓰모토 세이초다. <점과 선>에 이어 <모래그릇>을 읽었다. 장편치고는 짧아서 중편이라고 볼 수도 있는 <점과 선>과는 달리 <모래그릇>은 장장 560페이지가 넘는, 말 그대로 장편추리소설이다. 이 두 작품은 일본인들로부터 가장 기억에 남는 세이초의 작품 1,2위로 선정된 바있다.

 

 

철도와 국내선 비행기의 출발시각과 도착시각의 차이를 트릭으로 이용한 <점과 선>은 범죄의 동기보다는 범인의 범행 방법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파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정통 추리소설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다소 미흡하고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1950년대에 쓰여진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추리소설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모래그릇> 역시 선(善)을 악(惡)으로 되갚는다는 내용을 중심 줄거리로 하고 있어 처음부터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작품이다.

 

 

한센병을 앓는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방랑하던 일곱살짜리 어린 소년이 있다.

우연히 만난 순경의 호의로 아버지는 자광원이라는 한센병 환자 치료기관에 입소를 하게 되면서 어린 아들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직업 의식이 투철한 순경이었으니 분명 7살짜리 어린이를 그냥 놔두지는 않았을텐데....

어린 소년은 어째서 그의 보호에서 벗어난 걸까. 바로 여기에서부터 미키 겐이치의 불운은 시작된다.

 

인간은 절대악도 절대선도 아닌 무지(無知)의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가정할 때, 와가 에이료 아니 모토우라 히데오의 악마성은 한센병 환자와 그 가족들을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빚어진 건 아니었을까. 오히려 사회적 편견을 깨고 한센병 환자를 보듬어 안은 사람이 피해자라는 사실이 가슴을 친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일찌감치 수면위로 들어난다. 세이초는 범인이 '왜(범행동기' 그리고 '어떻게(범행방법)'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역추적해나간다.

 

유일한 단서인 '가메다'라는 동북지방 사투리를 시작으로 펼쳐지는 이마니시 형사의 추적은 상당히 지루하게 전개된다. 나루세 리에코가 이마니시 형사의 동네에 이사오게 되고, 그러면서 리에코의 집 근처에서 휘파람을 불며 얼씬거리던 미야타 구니오가 이마니시 형사의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이마니시 형사의 여동생 집에 미우라 에미코가 세들게 된다는 점등은 남발까지는 아닐지라도 우연성이 지나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양자로 받아들여 키워준 것도 아니고, 그저 단 한번 그것도 7살때 스쳐지나친 인연을 잊지 않고 찾아갔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잃는다는 설정 역시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부분이다.

 

 

사실, 피해자 미키 겐이치와 가해자인 와가 에이료 사이에는 목숨이 오고갈만큼 뿌리 깊은 원한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미키 겐이치는 와가 에이료를 협박하지도 않았는데 와가 에이료가 과거의 비밀이 탄로날까 지레짐작 겁을 집어먹고 20여년만에 나타난 미키 겐이치를 잔인하게 살해한다는 설정은 어딘지 어색하다. 솔직히 세이초답지 못하다.

 

특히, 세이초가 범행동기에 무게를 둔 작가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반면, 범행에 사용된 옷과 그 옷을 처분하는 방식이라든지 작은 단서를 이용하여 예를 들면 영화관에 내걸렸던 대형기념사진처럼 일상의 작고 사소한 것들을 단서화시키고 하나씩 조각난 실마리들을 차례로 이어붙여 재배치하는 솜씨는 감탄을 불러올만큼 탁월하다.

 

 

<모래그릇>은 평소 아카데미식 파벌과 기성 문단과 평론계에 곱지 않은 시선을 갖고 있었던 세이초가 그들의 위선과 현학을 작심하고 폭로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작품속에서는 이마니시 에이타로와 같은 인물이 있어 결국 추악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지만, 작품 밖에서는 해결되지 않은 사건들도 상당수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슬퍼진다. 자신의 야망과 출세를 위해 타인의 호의를 철저하게 이용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타인의 소중한 목숨까지 빼앗는 일들이 작품 밖의 세상에서는 더욱더 기세등등하게 일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편 컬렉션 상중하 세권을 모두 읽은 다음에 만나서 그런지 <모래그릇>은 생각만큼 속도감있게 읽히지는 않았다. 단편에 비해 호흡도 다소 길고 부연설명도 길뿐만 아니라 초음파로 사람을 죽인다는 점 역시 상상력은 돋보이나 어딘지 사실성이 떨어지고...

 

그렇지만 세이초의 단편들이 지친 여름철에 마시는 탄산음료같은 강렬한 맛이라면, 그의 장편작품은 한모금씩 쉬엄쉬엄 마시는 녹차의 맛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더 깊숙히 빠져드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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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무너지고 말 모래그릇을 빚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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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 중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 2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미야베 미유키 엮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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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단편컬렉션을 드디어 모두 읽었다.

미야베 미유키가 책임 편집을 맡아 더욱 유명해진 세이초 단편컬렉션은 모두 상중하 3권으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상,하권만 비치된 상태였다. 일단, 상하권을 모두 읽은 후 도서관측에 중권이 누락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참만에야 마침내 중권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비교적 최근인 2009년도에 나온 책이라서 절판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만약, 절판이라도 되었더라면 도서관측으로서는 구입하고 싶어도 구입할 방도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쓸쓸한 여인들의 초상'과 '불쾌한 남자들의 초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중권의 제5장과 6장은 인간의 내면적 심리에 대한 심도깊은 관찰이 특히 돋보인다. 특히 <서예강습>은 겉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인간의 모습을 세이초 특유의 반전을 통해 형상화한 아주 빼어난 작품이라 하겠다. 이야기 구조와 전개 방식 및 세부적인 묘사까지 어느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은행원인 가와카미 가쓰지는 외근 중, 변두리에 자리한 기모노점의 예사롭지 않은 필체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기모노점 바깥양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모노점은 사라지고 만다. 한편, 가와카미가 종종 들리곤 하던 고서점은 쉰두어 살쯤 되어 보이는 주인과 그런 남편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안주인이 번갈아가면서 가게를 지킨다. 가와카미는 육감적인 고서점 안주인에게 호감을 품었지만 음침한 남편으로부터 그녀를 빼앗아 보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와카미는 이런 속마음과는 달리 파친코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후미코에게 서서히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순전히 첫눈에 반한 고서점 안주인과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국, 따지고 보면 고서점 안주인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 가와카미에게는 불행의 씨앗이었던 것이다.

 

 

가와카미는 뜻밖의 곳에서 우연히 '가쓰무라'라는 문패를 발견하게 된다. 그 이층집은 기모노점의 미망인이 옮겨온 곳으로 서예강습 팻말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드디어 본격적으로 취미를 살리나 보다고 가와카미는 생각했다. 평소 서예에 관심이 있던 가와카미는 망설이는 가쓰무라 히사코를 졸라 서예강습을 받게 되는데, 단 한번도 다른 강습생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 점이 가와카미의 흥미를 끌었다.

 

 

한편, 후미코에게 돈을 뜯기기 시작하면서 매일매일 생지옥을 헤매는 것같은 가쓰무라의 마음은 서예강습을 받으면서 약간의 위안을 얻는다. 그런데 가쓰무라는 서예강습소가 사실은 남들 눈을 피해 은밀히 운영되는 '업소'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가 뜬금없이 왜 이렇게 짐작했던 걸까?

 

이런 가쓰무라의 추측은 고서점 안주인인 다니구치 다에코가 젊은 남자와 이곳으로 드나드는 것을 목격하고는 더욱 굳어진다. 그러던 어느날. 젊은 남자와 외도를 즐기던 다니구치 다에코가 가나가와 현 사가미 호숫가의 산림 속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서예강습소로 다에코가 들어갔음을 확인한 가쓰무라는 젊은 남자가 서예강습소로 위장한 '업소'에서 밀애를 즐기다가 다에코를 죽이고 다음날 아침 유유히 사라져버리자, 가쓰무라 히사코는 자신의 비밀영업이 탄로나지 않도록 사람을 시켜 몰래 다에코의 시신을 호숫가 근처에 유기했다....? 가와카미는 이렇게 추측한다. 그리고 자신의 추측을 확신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파국을 향해 첫발을 내딛게 된다.

 

 

후미코의 협박이 집요해지자 가와카미는 드디어 결심을 한다.

서예강습소로 후미코를 유인하여 죽인 후, 시체처리는 히사코에게 맡기는 것이다.

 

가와카미의 계획은 행동으로 옮겨지고 언뜻 성공한 듯 보인다.

 

그가 아내 야스코에게 기모노만 사주지 않았더라도... 아니, 하필 새로 부임해간 지방 소도시의 집에 도둑이 들지만 않았더라도... 아니, 도둑이 가와카미의 고급양복과 새로 구입한 아내 야스코의 기모노만 훔쳐가지 않았더라도... 아니, 아내 야스코가 잃어버린 기모노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지만 않았더라도....아니, 기모노 장물아비조직을 검거하는데 일조하여 매스컴의 주목을 받게 된 아내가 한껏 우쭐해지지만 않았더라도....평소 마음 속 깊이 내재되어 있던 아내의 지적 허영심이 발현되어 취재기자에게 "(우리) 남편도 서예를 배운 적이 있지만,"이라는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말따위는 하지 않았을 터. 그랬더라면 가와카미의 후미코 살인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았을 것이다. 』

 

 

 

 

<멀리서 부르는 소리>는 연애할때 종종 동생을 데리고 나갔던, 사소하지만 다소 이기적인 언니의 행동이 부른 슬픈 결말이 참으로 가슴을 치게 만드는 작품이다.

 

"예전의 처제였다면 저 보리밭 속에 숨어서 우리를 불렀을 거야. 그래, 예전에 주젠지 호숫가 안개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게이코는 그 말에도 이렇다 할 대답 없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쓸쓸한 얼굴이었다.

두 시간쯤 뒤, 두 사람은 역으로 돌아왔다. 두 시간 동안 요컨대 그런 정도밖에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시오는 그녀를 만나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차가 도착하자 두 사람은 개찰구에서 헤어졌다. 움직이기 시작한 차창으로 내다보니 게이코는 얼굴 가득 웃음을 짓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열흘쯤 지나면 또 만날 것 같은 인사였다.

객실에서 자리를 잡고 나자 문든 눈물이 나왔다. 게이코의 속을 비로소 알았다고 생각했다.

자기 부부가 고엔지에 신접살림을 차리자 발길을 딱 끊었던 것도, 훗카이도로 옮겨 아기를 낳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이 많은 남자의 후처 자리로 기꺼이 들어간 것도, 그리고 금세 다른 사내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인 것도ㅡ아기는 잘 자라냐고 물었을 때 미처 숨기지 못한 그녀의 복잡한 표정을 보고 도시오는 깨달았다.

게이코는 자신을 연모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부부의 생활이 단단히 뿌리를 내릴 때마다 애써 멀어지려는 행동을 취했다. 자기와의 거리를 더 떼어 놓으려고 스스로 굴러 떨어졌던 것이다.

남학생들과 어울리고 후처로 들어가고 사랑의 도피 행각을 할 때마다 그녀는 멀리서 자기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형부ㅡ."

"형부ㅡ."

주센지 호숫가 안에서 모습을 감춘 채 부르던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귓불에 되살아 났다.

 

도시오가 귀경하고 한 달 남짓 지나자 게이코가 또 처자식 딸린 탄갱부와 눈이 맞아서 도망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시오는 다시 게이코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쓰모토 세이초, <멀리서 부르는 소리> 中, 1957년 作-

 

 

<멀리서 부르는 소리>는 행동거지가 얌전하지 못한ㅡ특히 남자편력이 화려한(?)- 여자들에게 갖었던 평소 나의 선입관을 다소나마 완화시킨 작품이다.

어쩌면 그녀들도 게이코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몸부리 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과거의 사랑이 되지 못한, 영원히 현재진행형인 사랑으로부터 멀리 멀리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사연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남자인 마쓰모토 세이초는 어떻게 여성의 내면을 이다지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의 뛰어난 관찰력 덕분이라는 말은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눈을 뜨고 보아도 보이는 않는 것들이 존재하는 법이므로. 세이초는 눈으로 관찰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별을 초월한 인간 내면의 심리에 대한 세이초의 깊은 통찰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권두시를 쓰는 여자>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무의탁 환자를 범죄를 감추는 '도구'로 철저하게 이용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난 후, 다음과 같은 질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도대체 인간의 '악의스러움'의 끝은 어디인가?

 

아내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구사카베 슌스케는 생명 보험금 이백만 엔을 노리고 있었다. 애인이 애광원 간호사의 친구였는데, 그 간호사를 통해 가족없고 죽음이 임박한 시무라 사치코라는 시료 환자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슌스케에게 전하자 그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사치코를 데리고 나와서 죽기를 기다렸다가 아내 이름으로 사망 절차를 밟자는 것이었다. 나이도 그리 차이 나지 않는다. 사치코가 시코쿠 M시 출신이라는 사실은 간호사를 통해 알고 있었으므로 동향인에게 기부한다는 구실로 사치코에게 접근했다. 종종 병문안을 가다가 그는 사치코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연기했다. 사랑에 주려 있던 사치코는 금세 슌스케에게 기울었고, 청혼을 받고 기쁜 마음으로 나카노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이집도 그가 계획을 세우면서 미리 빌려 둔 집이었다.

사치코는 자기 병이 암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냥 위궤양이라고 믿고 있었으므로 자택에서 요양하게 하겠다는 슌스케의 배려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가정부까지 붙여 주었다. 이 가정부가 슌스케의 애인이며 살인 공범자임을 그녀는 전혀 몰랐다.

(...)

사치코는 사월 십일 오후 열시가 지나서 사망했다. 죽을 즈음에는 가정부의 정체를 눈치 챈 듯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치코가 숨을 거두자마자 임종을 지키던 슌스케는 재빨리 세타가야 자택으로 가서 아내를 자동차에 태웠다.

(...)

슌스케는 아내 구사카베 다이코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자마자 뒤에서 넘어뜨리고 목을 졸라 죽였다.

의사는 사치코의 사망을 확인하고 사망진단서를 써 주었다. 그녀는 의사에게 이미 구사카베 다이코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연령도 엇비슷했다.

의사가 돌아가자 슌스케는 미리 준비해 둔 관에 아내의 교살 사체를 넣고 뚜껑을 닫았다. 한밤중에 못질 소리가 나면 곤란하므로 동이 트고 나서 했다고 한다. 병사한 사치코의 사체는 슌스케가 안고 대문 밖 자동차에 실은 후 직접 운전해서 옮겼다. 이것이 열두시경으로, 역시 이웃집 아들이 차가 출발하는 소리를 들었다.

슌스케는 심양의 고슈 가도를 달려 기타타마 군의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논길 옆에 사체를 버리고 돌아왔다.

(...)

그가 집을 나가 있던 두 시간 동안 애인은 대담하게도 본처 사체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쓰모토 세이초, <권두시를 쓰는 여자> 中, 1958년作-

 

'그래, 인간은 한없이 악해질 수도 있어.'

그렇지만, 그런 만큼 또한 한없이 착해질 수도 있는 거야. 그게 바로 인간인 거야.'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사람의 행방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하이쿠 동인잡지 <가마노호>의 주간 이모토 바쿠진과 같은 사람이 나의 터무니없는 위와 같은 확신을 뒷바침해 주니 참으로 고맙다.

 

 

 

범인의 심문 과정을 작품 곳곳에 등장시켜 범인의 목소리로 사건을 재현하고 고백하도록 하는 기법은 이젠 흔한 형식이지만 세이초가 한창 작품 활동을 하던 5,60년대에는 상당히 참신한 시도였으리라. 세이초는 이와 같은 구성을 통해 작품의 리얼리티를 높였다. 대학 교수 구무라 다케지의 성공과 몰락을 그린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라는 작품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검사는 구무라 다케지를 상해치사죄로 기소했다. 검사는 중년 남자였는데, 다음과 같이 논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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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건은 상해 치사죄로 기소했지만 상당한 의문이 남아 있다. 처음에 나는 피고의 진술이 사실이리라고 판단했다. 피고는 대학교수이므로 지성으로 보나 사회적 지위로 보나 일반 범죄 피고인과 동일시할 수 없었다. 나는 피고의 인격을 믿었다.

(...)

피고와 오쓰루 게이노스케의 관계를 조사해보니 피고가 오쓰루 교수를 은사로서 매우 존경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오쓰루 게이노스케가 공직 추방에서 풀려나자 지금의 대학으로 복직시키려 노력하고, 종종 집에 초대하여 대접하고 서적을 빌려주는 등 은사를 후대한 적이 많았다는 것을 알았다. (...) 따라서 피고가 피해자 스미코에게 은사를 위해 즉시 고소를 취하하라고 종용했다는 말은 신뢰해도 좋았다고 생각했다.

(...)

조사에 따르면 당일 밤 피고는 열시경 집을 나서서 긴자에 있는 술집에 갔다. 피고의 부인에 따르면 집을 나설 때까지 피고는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초조해했다고 한다. 긴자에서는 술집을 세 군데나 전전하고, 나아가 새벽 한시경 신주쿠 유흥가로 가서 술집을 다시 두군데나 거쳤으며, 새벽 세시경에야 귀가했다.

(...)

이것은 기이한 일이다. 피고의 성격을 보면 꼼꼼하고 냉정한 편이다. 술은 즐기지만 여때까지 그렇게 마신 적도 없고 그렇게 만취한 적도 없다고 가족과 지인들이 증언하고 있다.

(...)

스미코는 피고의 애인이다. 애인이 지금 다른 남자에게 욕을 당하고 있다, 또는 당할 예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각을 전후한 몇 시간 동안 단절부절못했던 것이다.

(...)

단적으로 말하면 피고와 스미코가 그 일을 상의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억측을 해 보자면 피고가 스미코에게 지시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참으로 기괴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는 작정하고 오쓰루 게이노스케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획이 아닌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과연 그럴 만한 이유가 피고와 오쓰루 게이노스케 사이에 있었을까. 나는 그 점을 조사해 보았지만, 전혀 찾을 수 없었다.

(...)

다음으로, 피고의 서재를 조사해 보니 형법 책이 한 권 있었다. 피고의 서재는 전공인 역사학에 관련된 서적분이었고 형법에 관한 책은 그 책이 유일했다. 그것도 새 책이었는데, 표시를 해 놓은 것인지 책 중간에 빨간 색연필이 끼워져 있었다. 긴급 피난 항목이 설명되어 있는 페이지였다.

(...)

색연필을 끼워둔 페이지는 '카르네아테스의 판자'를 설명하는 내용이었다. 조난당한 두 사람이 나무판자 하나에 매달렸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밀어내고 자기만 살아남는다는 일화다. 피고는 왜 그런 일화에 흥미를 느꼈을까? 판자에 남은 사람이 피고라면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사람은 스미코일까 오쓰루 게이노스케일까.

이상을 보건대 나는 피고가 실수로 스미코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진술에 강한 의심을 품고 있다. 즉 처음부터 살해를 계획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피고의 진짜 목적을 알 수 없다. 명확한 증거도 없고 추측만으로 기소할 수도 없으므로 상해 치사죄로 기소하기로 한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 <카르네아데스의 판자>中, 1957년 作-

 

 

 

 

마쓰모토 세이초는 작품을 구상하기 전에 철저한 조사와 자료 수집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형법의 긴급구조란에 '카르네아데스의 널'이라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세이초 역시 다량의 문헌조사와 신문 등을 읽으면서 형법에 위와 같은 내용이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세이초는 신문에 나온 범죄사건과 법원의 판결에 관한 내용등을 꼼꼼하게 읽고 스크랩하고 기억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기소되지 않거나 혹은 무죄판결을 받은 사건에 자연히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생각을 집중하고 상상력을 더욱 진전시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일년 반만 기다려>라는 작품 역시 '정당방어'에 대한 법조문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었다.

 

 

 

<공백의 디자인>은 거대한 사회구조 속에서 작은 부품에 지나지 않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섬뜩하리만큼 신랄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지방지인 Q신문 광고부장 우에키 긴사쿠는 일류제약회사 와도 제약의 신제품 '랑키론'의 광고를 광고 대행업체인 고신샤로부터 받아 싣는다. 그러나 랑키론 광고가 실린 면에 랑키론 주사를 맞고 사망한 사건이 2단으로 실린 기사를 발견하고는 기겁한다. 와도 제약의 광고가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광고 대리업체가 다른 광고까지 주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우에키는 오만한 편집국장의 얼굴을 떠올린다.

 

 

직접 신칸센을 타고 도쿄로 올라간 우에키는 고신샤의 향토신문과 과장은 만나보지도 못한 채 부과장인 나카타에게 갖은 수모를 다 당한다. 그렇지만 일개 지방신문사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를 위해서 꾹 참는다. 도쿄에서 며칠 머무르며 매일같이 고신샤를 찾아가 무시와 수모를 당한 우에키는 마침내 나카다를 통해 이번 일은 나구라 다다카즈과장이 직접 Q신문사를 찾아가 매듭짓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간신히 전해 듣고는 귀향한다.

 

 

직접 내려온 나구라 과장을 영접하고 접대하는 일은 자연히 광과부장인 우에키 긴사쿠의 몫이다. 그는 나구라 과장이 접대 자리에서 호탕하게 웃으면서 기분 좋게 즐기는 것을 보고는 일이 잘 풀릴 것으로 확신하다. 그동안 노심초사하면서 공을 드린 결과이리라. 전무님도 이런 우에키 부장의 노고를 잊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이거 대접이 소홀해서 어쩌지요."

전무가 고개를 납죽 숙이며 인사했다.

"천만에요. 신세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선물까지 주시고, 송구스럽습니다."

(...)

"전무님"

나구라가 말했다. 나구라 다다카즈의 얼굴에서 지금까지 내내 보이던 호방한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얇은 눈썹 밑에서 가는 눈이 이상하게 번뜩였다. 나구라는 전무 귀에 입을 바짝 댔다.

"저도 모처럼 여기까지 왔으니 이번에 일어난 골치 아픈 문제와 관련해서 와도 제약에게 내놓을 선물을 들고 돌아가야겠습니다. 이것만은 양해해 주셔야겠습니다."

열차가 플랫폼으로 미끄러져 들어오기 전, 겨우 이삼 분 새였다.

전무의 안색이 변했다. 선물이란 말의 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자, 그럼 이만"

나구라는 열차가 도착하자 다시 큰 소리로 호방하게 웃으며 전송 나온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 특급칸 차량 속으로 사라졌다.

 

Q신문 광고부장 우에키 긴사쿠는 전무의 애원에 못 이겨 그날로 사표를 냈다.

 

                                                  -마쓰모토 세이초, <공백의 디자인>中, 1959년作-

 

 

씁씁함을 넘어 목에서 '울컥' 시큼한 것이 넘어왔다.

와도 제약회사에게 전해줄 선물이란 바로 그동안 회사를 위해 살아온 우에키 긴사쿠의 해고였다.

우에키는 대학입시를 앞둔 큰아이와 중학교에 다니는 둘째를 둔, 네 식구를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이다.

 

 

거대한 사회구조와 싸워야 하는가? 아니면 그 속에 철저하게 동화되어 스스로 사회구조가 되어야 하는가?

우린 모두 매일 매일 이런 얄굳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우치보리 히코스케는 스스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공범>은 반전이 돋보이는, 색다른 공포감을 그린 대단한 작품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범죄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하고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알려진 잔인한 범죄행위에 대해서 몸서리를 친다. 공포라면 의레 이런 종류의 것이리라.

반면, 범죄자가 느끼는 두려움의 원천은 범죄행위가 발각되진 않을까 하는 것이다.

<공범> 은 바로 이런 범죄자가 느끼는 공포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공포는 '공범'으로부터 온다.

 

이제 모든 행복이 그에게서 떠나려 하고 있다.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남자가 그를 향해서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다. 그자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우치보리 히코스케는 은행 강도였다는 실체가 폭로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하게 되리라. 그자는 언제라도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물귀신처럼 부자가 된 공범을 물고 늘어질 것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마치다는 집과 재산을 자포자기한 상태다. 그는 자기와는 달리 성공한 자리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은 공범에게 질투와 증오를 품을 게 틀림없다.

돈을 우려내자고 마치다 다케지는 작심했으리라. 그래서 혈안이 되어 히코스케를 찾고 있는 것이다. 마치다는 히코스케에게 악랄하게 우려낼 속셈이다. 그것이 성공한 공범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마쓰모토 세이초, <공범> 中, 1957년 作-

 

 

 

 

 

우연히 깊은 산속에서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시체를 감춘 사람의 신원을 알게 되었다면?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번거로움을 면하기 위해 '누군가 신고하겠지...'라는 심정으로 못 본 척 할 것이다.

 

반면, 이를 누군가를 협박하여 돈을 갈취하는 '기회'로 이용하려는 사람은 없을까? 아마 드물긴 하겠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특히, 경제적으로 쪼들리거나 말 못할 비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신고하는 대신 타협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더군다가 협상 상대가 성공한 사업가로 남몰래 바람을 피우다가 상대 여성이 단순실족사하자 자신의 부정이 탄로날까 두려워 시체를 숨기고 자기만 아는 비밀로 한 것이라면 말이다. 이런 비밀을 기회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이를텐면 죽은자의 억울함보다는 산자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선의를 베푼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회사공금을 횡령하고 도망다니는 아즈오카와 남편과 이혼한 후 온천 여관의 종업원이 된 기쿠가 바로 이처럼 죽은자가 아닌 산자에게 '선의'를 베풀고자 한 이들이다.

 

아즈오카와 기쿠가 이치사카 히데히코의 '약점'을 이용한 방법과 사건의 진상을 풀어 나가는 방법은 '과연 세이초구나...'할만큼 절묘하다.

 

 

1, 평소 미인도를 표지로 삼고 있는 신생 월간지 <신류>가 뜬금없이 산(山) 그림을 표지로 올린다.

2,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언니 하마에의 앨범 속에는 쌍둥이산 사진이 있다. 평소 언니는 사진 촬영를 좋아했으며 행방불명되기 직전에도 사진기를 챙겨들고 어느 지방으로 촬영 여행을 떠난 터였다.

3, 월간지 <신류>의 편집장은 판매부수나 편집에는 신경쓰지 않고 사장으로부터 엄청난 운영경비를 받아내고 있다. 사장이 경비를 줄이려하자 표지가 산 그림으로 바꾸고...사장은 오히려 경비를 풍족하게 내놓는다. 그러자 표지는 다음호부터 다시 산그림에서 미인도로 되돌아온다.

4, 한편, 사장으로부터 엄청난 편집비를 착복하고 있는 편집장은 그닥 예쁘지도 않은 연상의 아내에게 꽉 붙잡여 살고 있다.

 

 

<신류> 편집장의 이름은 아즈오카, 아내는 한때 여관과 꼬치점 점원으로 일했던 기쿠. 그리고 <신류> 사장은 레스토랑 체인을 여럿 갖고 있는 실업가인 아치사카 히데히코다.

 

 

악의는 전혀 없었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의 억울함을 모른 척 한 죄와 타인의 약점을 이용하여 협박과 갈취를 일삼은 죄 중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 아마도 전자는 단 한번의 실수로 법적인 문제는 둘째치고 동정의 여지가 충분해보인다. 반면, 후자는 지속적으로 당사자에게 고통을 주는 야비하기 그지없는 짓임에 틀림이 없다.

 

 

전자에 속하는 아치사카는 사체은닉죄에 해당되며, 후자인 아즈오카와 기쿠는 공갈협박죄에 해당될 수 있을 듯...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사체은닉죄는 5년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으며, 공갈협박죄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나와있다.

 

'휴~'하고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 <공범> 속 등장인물인 아치사카에게 형법 긴급구조편의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를 적용시켜야 한다면 지나치게 '사심'이 들어간 것일까. 그렇지만 아치사카의 사정은 정말 딱하기 그지없어 연민이 일어날 정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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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벚꽃지는 계절에 읽고 싶어 여러번 도서관을 찾아갔지만 그때마다 이미 대출중이었다.

그렇게 한달 남짓 흘러갔나 보다.

 

여러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도서관에서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대출할 수 있었다. 우타노 쇼고의 작품은 <움직이는 집의 살인>이후 두번째다. <물만두의 추리책방> 리뷰을 읽지 않았더라도 시적인 제목에 이끌려 언젠가는 읽었을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래도록 기다리고 기대하던 작품이었기에 단 이틀만에 다 읽어 버렸다. 주말 초저녁의 한가한 전철안에서 막바지로 향하는 작품 속 이야기를 쫓아가면서 나는 황당스러움과 함께 배신감마저 들었다. 작가에 대한 배신감인지 나 자신에 대한 배신감인지 종잡을 수 없는 미묘한 감정으로 이미 읽은 페이지들을 더듬어 나갔다. 드물지만 간혹 일어나는 '작가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이따위 작품이 있을 수 있지!'

나의 '분노'와 '배신감'은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서 어느정도 가라앉았다. 독자로서 내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 작가의 원래 의도가 그러했다는 점을 이해하고 나자, 작품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대해서 어째서 많은 사람들이 '대단하다! 놀랍다!'라는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작품은 2004년 출간되자 마자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본격미스터리대상'을 수상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에 오르는 등 베스트셀러가 되었단다.

 

베스트셀러란 말 그대로 일정기간 동안 가장 잘 팔린 책으로 대중의 취향을 대변해 주지만, 그렇다고해서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베스트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베스트셀러는 어느정도 입소문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역시 베스트셀러가 될 수있었던 이유도 아마 다음과 같은 입소문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냥 한번 직접 읽어봐!'

 

 

작품을 읽으면서 줄곧 상상해 왔던 등장인물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조각이 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작가에게 물으려고 작품을 샅샅히 뒤지지만... 이거 왠걸, 작가는 거짓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물론, 독자들이 오해할만한 흔적은 곳곳에 남겨두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작가는 바로 그 '오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해 즉 사실과는 다른 잘못된 '선입견'말이다.

 

 

작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그리고 독자의 오해와 선입견도 함께 시작된다.

 

사정(射精)한 뒤에는 꼼짝도 하기 싫다. 여자의 몸 위에 올라탄 채, 밀려오는 졸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예전에 치과병원 대기실에 비치된 여성 주간지에서 '후희(後戱)없는 섹스는 디저트 없는 디너'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남자들에게 그 얘기를 하면 대번에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일단 사정하고 나면 젖가슴 따윈 더 이상 주무르고 싶지 않다. 설령 상대가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 미국 가수)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남자라는 동물은 먼 옛날 에덴동산 시절부터 원래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내가 이러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지금 막 정액을 방출하고 여자의 배 위에서 거친 숨을 내쉬고 있기 때문이다.

                                    -우타노 쇼고,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p1 中-

 

 

주인공 나루세 마사토라의 첫등장은 이처럼 다소 퇴폐적이고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세리자와 기요시가 나를 선배하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내가 일곱 살 위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현재 도립 아오야마 고교에 다니고 있고, 나는 그 학교의 졸업생이다.

                          

                                     -우타노 쇼고,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p22 中-

 

 

주인공과 함께 호라이 클럽의 범죄를 캐내는 파트너인 세리자와 기요시에 대한 설명이다.

 

 

기요시가 내게 멍한 시선을 보낸다. 구다카 아이코는 이 헬스클럽의 회원으로, 이 험상궂은 녀석이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는 연상의 여자다.

(......)

"난 지금 진지하게 말하는 거예요. 그녀를 좋아하니까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거죠. 그래요, 그냥 좋아하고 걱정하는 것뿐이에요. 어떻게 해볼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런 애정도 불순하고 비윤리적인 건가요?"

기요시가 눈을 부라리며 대답을 강요한다. 나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올렸다.

(......)

양갓집여자답다. 그 집안의 여자들은 3대째 세이신에 다니고 있다. 여기서 세이신은 미치코 황후가 다녔던 세이신 여학교를 말하는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시로카네에 있다. 한쪽은 양갓집 아가씨들이 다니는 최고의 여학교 출신이고, 한족은 도립 고교 재학생. 기요시에게는 너무 과분한 상대다.

(......)

기요시가 꽃다발을 내밀었다. 아이코는 더욱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절부절못한다. 기요시는 억지로 꽃다발을 쥐어주며 묻는다.

"더위 먹은 거예요? 몸은 좀 어때요?"

"그런 거 아녜요."

"이렇게 밖에 나오는 거 보니까 아주 심하진 않은 모양이네요. 자리에 드러누웠으면 어떡하나 하고 줄곧 걱정했는데."

"그런 거 이니라니까요. 제가 아니라 가족 중 한 명이 좀......"

아이코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간병?"

"그게 아니라 할아버지가......"

"아, 그래요?"

"돌아가셨어요"

"넷?"

나와 기요시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이코는 고개를 숙인 채 갈아진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한다. 아래로 향한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글썽거린다.

                             -우타노 쇼고,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p27~28 中-

 

 

고등학생 기요시가 짝사랑하고 있는 연상의 여인 구다카 아이코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한동안 헬스클럽에 못 나온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기요시와 주인공인 나루세 마사토라가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아이코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게 된다.

 

 

자, 그럼 이쯤해서 머리속에 주요 등장 인물들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 그려질 것이다. 세명의 나이를 대충 짐작해 보면, 기요시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10대후반일 것이고, 그보다 6살 많은 주인공 '나'는 20대 중반일것이며, 명문 세이신 여학교를 졸업한 구다카 아이코의 나이는 아마도 이 둘 나이의 중간 어디쯤이 아닐까.

 

 

짐작이 언제나 사실과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무의식적으로 짐작들을 기정사실화 시켜버린다. 바로 '선입견'이다.

 

 

과연 우타노 쇼고는 전통추리소설의 대가다웠다.

야쿠자들의 세력 다툼으로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두 건의 잔혹한 미스터리 살인사건을 보기좋게(?) 해결하니 말이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에는 사건을 직접 해결하는 탐정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주인공인 나루세 마사토라가 사설탐정 노릇을 잠깐 하긴 하지만 말이다. 주인공은 아이코의 '할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위장되어 타살당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호라이클럽이라는 곳을 파헤친다. 호라이클럽은 연금생활자들을 대상으로 물건강매 및 보험사기행각을 일삼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 집단이다. 겉으로는 흔히 볼 수 있는 건강식품 유통회사지만 그 내막은 야쿠자보다도 더 악날하다.

 

 

처음에는 판단력이 떨어지고 건강 문제에 유난히 집착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건강식품이나 건강생수 이불 등을 팔다가 이들이 더 이상 물건을 살 돈이 없으면 고리대금을 빌려서 물건을 사게 하고, 고리대금을 갚지 못한 이들은 결국 천문학적인 빚을 떠안게 된다. 빚에 시다리던 사람들은 자살을 택하는가 하면, 빚을 탕감시켜주겠다는 호라이클럽의 꾐에 넘어가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선량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에 동원되고 심지어는 보험사기를 돕기도 한다.

후루야 세쓰코가 바로 이런 경우에 속한다.

 

세쓰코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두 사내가 류이치로를 떠밀고, 다카기가 차로 친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류이치로를 데려오고, 두 사내가 떠밀고, 다카기가 차로 친것이다.

(......)

후루야 세쓰코는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녀는 호라이 클럽이라는 거미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다음 목표물은 안도 시로라는 70대 중반의 노인이다. 독신이고 일가친적도 없으니, 보험 살인의 대상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감정을 마비시키고, 악마의 종이 되어 사악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우타노 쇼고,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p368~369 中-

 

 

인구의 1/4이 연금으로 생활한다는 고령사회 일본.

이런 일본이 안고 있는 사회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해 보인다. 세대갈등은 기본이고 아예 세대간 대립과 충돌이 곧곧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자리가 없어 프리터(단기 아르바이트족)로 전전하는 젊은이들은 수입의 상당부분을 연금이나 세금 등으로 떼인다. 안정적인 직장이 없으니 결혼도 요원한 일이다. 독신자가 늘어나고 출산율은 더욱 낮아지며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니 전체 인구에서 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높아진다.

악순환이다.

 

도심의 전철이며 공원 등은 노인들로 넘쳐난다. 전철과 공원은 경로우대라는 이름으로 노인들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금으로 생활하는 노인들이 많을수록 사회는 점점 활력을 잃고 늙어만 간다. 노인혐오 현상이 대두되면서 노인을 대상으로 한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고령사회 일본의 현주소다.

 

일본의 오늘이 바로 우리의 내일일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살펴보면,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전통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사회파추리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작가는 나루세 마사토라, 아사미야 사쿠라, 후루야 세쓰코, 안도 시로 등을 통해 일본의, 아니 인간의 슬픈 자화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달빛 아래 비쳐든 그 슬픈 자화상처럼...

 

벚나무가 꽃을 피우는 5월에는 너나할 것이 없이 벚나무를 찾아다닌다. 벚꽃를 보기 위해서...

그런데 벚꽃이 지고 나면 사람들의 관심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벚나무도 단풍이 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사람도 누구에게나 벚꽃피는 화려한 시절이 있는 법이다. 그 시절이 지나고 나면 꽃잎이 떨어지고 단풍이 들다가 이내 나뭇잎마저 떨구고 말라비틀어진 나목(裸木)이 된다. 그러나 나목은 어디까지나 나목일뿐 결코 죽은 고목(故木)이 아니다. 비록 화려한 꽃잎을 피우지는 못할지언정 엄연히 벚나무인 것처럼 사람도 한창 시절이 지나갔어도 여전히 마음만은 그대로인 그때 그 사람인 것이다! 우타노 쇼고는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벚꽃지는 계절에...

나는 나루세 마사토라, 아사미야 사쿠라, 후루야 세쓰코, 안도 시로를 그리워하리라.

 

그리고....

또한 그대를 그리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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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정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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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아......'

마지막 책장을 넘긴지 벌써 이틀이 흘렀건만 단말마의 감탄사밖에 나오지 않는다. 마치, 작품속 주인공들처럼 하얀 어둠 속을 걷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총3권으로 이루어진 작품 중, 제1권을 다 읽었을 무렵 범인의 윤곽은 그려진다. 청초한 미모 뒤에 감추어진 사악함과 세상을 속이는 교활함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점점 더 악랄하게 변해가는 범인을 지켜보면서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래, 그랬었구나....'

범인도 범행 동기도 밝혀지면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시원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슴은 더욱 답답해지고 머리는 더욱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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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하라 전당포 주인 기리하라 오스케가 빈 건물 안에서 죽은 채 발견된다. 저항의 흔적도 범인의 발자국도 없다. 그저 빈 건물 안에서 뛰놀던 아이들의 발자국만 무성할 뿐. 오스케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니시모토 후미요는 열 두살 어린 딸 유키호를 남겨둔 채 의문의 자살을 하고, 담당 형사인 사사가키 준죠에 의해 강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데라사키 다다오 또한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오일쇼크로 강력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결국 전당포 주인 살인 사건은 흐지부지 미제사건으로 남겨지고......

 

후미요의 어린 딸인 유키호는 엄마가 죽은 후, 아빠쪽 친척인 가라사와 레이코의 양녀가 되면서 평범한 중학교 생활을 시작한다. 그녀를 둘러싼 소문들이 무성했지만 타고난 외모와 품위 있는 행동거지로 유키호는 학교의 인기스타로 부상한다. 심지어 근처 남학교의 남학생들이 하교길에 몰래 숨어서 유키호의 사진을 찍어가기도 한다. 그런 그녀 옆에는 언제나 단짝 에리코가 함께 한다.

 

한편, 아홉살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은 기리하라 오스케의 아들 기리하라 료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말수 적고 뭔가 어두운 구석이 있던 료지는 눈에 띄지 않게 학교 생활을 하지만 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컴퓨터를 익숙하게 다룰 줄 알고, 가끔 따분한 중년 여성들에게 젊은 남성들을 공급하는 아르바이트로 돈을 번다. 그의 친구 소노무라 도모히코 역시 료지의 검은 유혹에 걸려들어 그를 도와 컴퓨터 매장을 운영한다. 전당포 지배인으로 일했던 마츠우라가 나타나기 전까지...

 

세이카 여자대학에 들어간 유키호는 단짝 에리코와 함께 에메이 대학과의 연합댄스동아리에 가입하여 시노즈카 가즈나리를 알게 된다. 댄스 동아리 회장인 가즈나리는 모든 이들이 선망하는 유키호 대신 그녀의 단짝인 에리코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던 어느날 에리코는 중학교 시절 유키호의 경쟁상대였던 후지무라 미야코처럼 여자에게는 치명적인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게 되면서 가즈나리 곁을 떠나고 만다. 

 

졸업후, 유키호는 댄스 동아리 선배인 다카미야 마코토와 결혼하지만 마코토는 유키호보다는 미사와 치즈루라는 파견사원을 사랑한다. 결국 마코토는 결혼식 전달 치즈루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그녀가 예약한 호텔에서 기다리지만 치즈루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주식투자와 부티크 운영으로 승승장구하는 유키호는 결국 마코토와 이혼하고 시노즈카 가즈나리의 사촌형과 재혼을 한다.

 

이 과정에서 가즈나리가 고용한 탐정 이마에다는 유키호의 과거와 그녀와 연관된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불행해졌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어느날 그는 행방불명되고 만다. 

 

컴퓨터 매장에서 사라진 기리하라 료지는 대학병원 약사로 근무하는 노리코 앞에 우연을 가장하여 나타나 자신을 아키요시 슈이치라고 소개한다. 노리코는 슈이치-기리하라 료지-에게 깊이 빠져들지만 빠져들면 들수록 그는 비밀투성이 의문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9년 전 전당포 주인 살인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사사가키 준죠는 이미 정년퇴직을 했지만 끈질기게 범인의 행방을 쫒고 있다. 결국, 시노즈카 가즈나리와 함께 하나씩 하나씩 퍼즐을 맞추어 나간다.

 

사건이 미제에 빠진 건, 첫단추부터 잘못 채워졌기 때문이다.

사건 당일 오스케가 은행에서 찾은 백만엔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오스케의 유품인 라이터를 데리사키 다다오가 어떻게 갖고 있게 된 걸까?  첫만남부터 예사롭지 않던 분위기를 내품던 료지는 사건 발생 시간대에 정말 집에 있었던 걸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던 조숙한 소녀 유키호는 그때 정말 도서관에 간 걸까? 니시모토 후미요의 죽음은 사고사를 가장한 자살이 아니라 타살은 아니었을까? 범인을 왜 성인으로만 한정했을까? 어린 아이들의 사건 당일 알리바이를 정확히 확인하지 않았다는 실수의 대가는 너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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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인군자이거나 아니면 바보일 것이다. 누군가에게 세상은 따듯한 빛이 가득한 엄마의 품속과 같은가 하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세상은 냉혹하다 못해 깊은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렇게 상처받은 영혼은 때론 자신의 아픔을 고스란히 또 다른 타인에게 되돌려주면서 '악'을 확대 재생산하기도 하지만,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여 악을 선으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창조해낸 인물-예를 들면, 유키호-은 안타깝게도 전자에 속한다. 세상으로부터 따듯한 빛을 받지 못한 불운을 타고 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불운이 주변 사람들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불행에 빠뜨리고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생명까지 앗아가는 행동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어긋한 가치관을 소유한 인물은 어쩌면 약자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적인 사회풍토가 만들어낸 '사회악'으로, 작가가 침잠한 점도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싶다. <백야행>은 트릭과 범인 및 범행수법 등이 상당부분 생략되어 있다는 점에서 본격파 추리소설이라기 보다는 사회파추리소설쪽에 보다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작품의 도입 부분에 '오늘을 위해 마쓰모토 세이초의 신작을 읽지 않고 있었다'라는 문장은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마쓰모토 세이초에 대한 작가의 '오마주'로 읽힌다. 

 

미야베 미유키, 온타 리쿠등과 함께 일본 추리소설 3인방으로 불리우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세계는 상당히 거칠고 현실적 괴리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가 지향하는 주제는 악이 아니라 선인 것만은 확실하다. 밝음을 표현하는 건 빛이 아니라 오히려 어둠이듯, 악을 그리므로써 선을 구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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