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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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왠지 모르게 나에게는 서평집에 대한 짝사랑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같다.

흔히, 짝사랑은 혼자서 한껏 들떠 있다가는 혼자서 시들해지지 않던가. 짝사랑하는 상대에 대해 잔뜩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다가 상대방의 작은 실수나 행동 하나에 이내 실망하고 제풀에 지쳐버리는 것이지 않던가.

 

 

나에게 서평집은 바로 이런 짝사랑 같은 존재이다. 물론, 서평집이 열에 아홉은 짝사랑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소개된 책들에 대한 나의 이해도가 한참이나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감으로 시작해서 실망감으로 끝나고 마는 그런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또 다시 사랑이 돋아나듯 도서관에서건 서점에서건 서평집만 눈에 띄면 바로 손부터 나가곤 하니 이쯤되면 거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성일의 <한권의 책> 역시 그렇게 만난 책이다. 저자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읽어야할 독서 목록들이 차고 넘치건만 어찌하여 덥썩 집어들어 갈 길 바쁜 걸음을 붙잡히고 말았는지...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는 나처럼 책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이 있다면 고개 돌려 다시 한번 쳐다 볼만큼 호감을 갖는 버릇이 있다. 한마디로 책벌레들에게는 굉장히 헤픈 편이고 해야 하리라.

 

 

약력을 보니, 저자는 책에 관한 책들을 전문적으로 쓴 진정한 '책꾼'이었다.

<한권의 책>은 그런 저자가 4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생을 마감한 후, 가족들과-아마도 아내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주변사람들에 의해 출판된 책으로 저자가 평소 써두었던 글들을 모은 일종의 유고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책의 구성과 내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저자의 의도와 생각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은 가장 非저자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저자가 살아있었더라도 이런 서평집이 탄생했을까?

글쎄...

 

<한권의 책>이라는 책을 통해 내가 이해한 최성일이라는 사람은 결코 이런 서평집은 출판하고 싶어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다기 보다는 그냥 본문 중 한창 나이에 운명을 달리한 작은형의 일기(편지 포함)를 '속울음'이라는 제목으로 150부만 엮어 가까운 지인끼리만(?) 나누어 가졌다는 '착한 고백'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따름이다.

 

1부와 2부는 병마와 싸우기 직전에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어 시기적으로 '과거의 향수'가 짙게 배어 있지 않은 반면, 후반부로 갈수록 2000년대 초반에 발표한 글들이 불쑥불쑥 등장하여 어딘지 모르게 '한물 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마광수와 강준만 교수에 대해 언급한 문장들은 10년 전으로 독자를 돌려세우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저자의 정치적 견해와 생각들이 거침없이 들어나는 것에 대해 마치 예기치 않게 남의 방이라도 엿본 것처럼 당혹스럽기도 하다. '책 속에서 책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선택한 독자들라면 분명 낭패감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저자와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비슷하다면 우연한 합석에서의 부담없는 대화가 주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사회는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폭넓은 사회를 지향하면서도 양 극단의 함성만 들리는 것같다.

'고된 시집살이를 한 시어머니일수록 며느리에게 더욱 심한 시집살이를 시킨다'는 옛말처럼 한때 목소리를 죽이고 낮출 수밖에 없었던 계층들이 점점 목소리를 높이더니 심지어는 안아무인식의 억지 주장까지 펼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

 

 

<한권의 책>을 통해 저자는 자신이 읽은 책들에 대한 비판에 거침이 없다. 불편하다는 점잖은 표현을 사용했지만 내심은 결코 그 정도가 아님은 한눈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혹시 저자는 자신의 글들이 그 누군가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을까.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읽는 책을 보라'는 서양속담처럼 서평은 읽은 책을 논한다는 점에서 어쩔 수 없이 책에 대한 저자의 호불호가 들어날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저자의 가치관과 인생관까지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단 '한권의 책'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비록 나는 저자의 생각에 100% 공감할 수는 없지만 <한권의 책>을 통해 여러 권의 책들을 새롭게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언젠가 그 책들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끝으로,

어째서 신은 꼭 쓰임새 있는 사람들만 서둘러 데려가시는 걸까?

글쟁이 책쟁이들은 좀 더 오래도록 이 땅에 남아 있어도 대자연에 피해가 가진 않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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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책 읽는 시간 -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할 때
니나 상코비치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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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카페, 개인홈페이지, 알라딘서재... 등등 다양한 인터넷 매체가 발달하면서 바야흐로 서평쓰기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같다.

 

 

니나 상코비치 역시 평범한 개인의 특별한 독서프로젝트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친언니를 암으로 떠나 보낸 후 슬픔에 잠겨 있던 그녀는 어느날 장장 400페이지가 넘는 <드라큘라>를 하루만에 다 읽고 나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언니의 죽음 후 3년 동안 그 무엇으로도 위로받지 못한 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그녀의 신경세포들이 장시간의 독서 끝에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이리라.

 

 

그 다음날.

니나 상코비치는 1년 동안 하루에 한권씩 책을 읽고 개인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기로 결심한다. 그녀에게 글읽기와 글쓰기는 일종의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목적에서 시작된 나나 상코비치의 프로젝트는 서서히 입소문을 타게 되면서 <뉴욕 타임즈>에 'The 365 Project'로 소개되는 등 화제가 되었다.

 

 

개인 블로그에 꾸준히 독후감을 올리고 있으며, 올초에 '1년동안 100권 읽고 서평 100편 쓰기'를 한해 목표로 정해 실천중인 나에게 니나 상코비치와 그녀의 책 <혼자 책읽는 시간>은 호기심과 질투심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혼자 책읽는 시간>을 읽기에 앞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점은 '과연 그녀의 프로젝트는 무사히 달성되었는가? 달성했다면 어떻게 달성했는가?'였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하루 평균 두시간을 독서에 할애하고 있는 나로서는 하루에 책 한권 읽고 서평까지 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줄곧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나나 상코비치는 비록 나처럼 매일 출퇴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은 아니지만 남편과 4명의 어린 자녀들을 돌보아야 하는 전업주부로서 어린 자녀들을 등하교시켜야 했으며 식사를 준비하고 빨래와 청소를 도맡아 해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장보기와 사교모임 및 가족행사등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멋지게 자신의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물론, 그녀는 슈퍼우먼이 아니며 슈퍼우먼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목표가 세워지자 남편을 필두로 하여 어린 자녀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밝히고 양해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설거지 당번 정하기 등 구체적으로 가족의 도움을 구했다. 그저 말로만 양해를 구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가족 구성원에게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는 점이 신선했다. 한국이라면 그러니까 니나 상코비치가 미국이 아닌 한국의 가정주부였더라도 과연 저런 발칙한(?)발상과 행동이 받아들여졌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녀의 거침없는 생각과 행동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론 심히 부럽기까지 했다.

 

 

<혼자 책 읽는 시간>은 서평집이면서 또한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니나 상코비치는 무슨 책을 읽었고 책의 내용은 이러저러하며 어떤 느낌을 받았노라...식의 글쓰기로 독자들을 식상하게 만들지 않는다. 어렸을 때 추억이 묻어나는 책들을 넘기면서 자신의 어린시절과 부모님-특히 아버지- 더 나아가 조부모代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그녀의 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세 명의 형제들을 잃었다. 독일군 점령하에서 빨치산이 된 러시아군이 집안으로 갑자기 들이닥쳐 세 명의 자녀를 죽이고 만 것이다. 그때 니나의 아빠는 외출중이어서 다행이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부엌방에서 앓아 누워 있던 엄마 즉 니나의 친할머니와 함께 가족을 죽음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려야했다.

 

 

타인의 슬픔을 알게 되면 내 슬픔이 가볍게 느껴지는 법이라고 했던가.

니나는 자신의 이름이 스물 세살 꽃다운 나이로 숨을 거둔 고모 안토니나의 이름을 본따 지어졌음을 알고는 언니가 숨을 거두던 순간 아빠가 어째서 "하룻밤에 셋"이라고 외쳤는지 이해하게 된다. 아빠는 딸을 먼저 떠나보낸 그 순간 어린 시절 누나와 형들을 동시에 잃어버려야 했던 슬픔을 떠올린 것이다.

 

 

개인적으로 서평집을 멀리하는 편이다. 이유는 읽으면서 느끼는 심리적인 거리감 즉,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책들을 내가 읽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낯설음'으로 저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서평집은 읽으면서 집중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 읽고 나서도 아무런 감흥조차 남아 있지 않기 일쑤다.

 

 

그런데 니나 상코비치의 <혼자 책 읽는 시간>은 이와같은 심리적 거리감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저자가 책소개와 감상에 무게 중심을 두지 않고 독서를 통한 마음의 변화와 상처의 치유 과정을 솔직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와 공감하기 위해서 반드시 저자가 읽은 책들을 읽어야 할 필요도 없고 그 내용을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할 필요도 없다.

 

 

마치 한편의 잘 짜여진 1인 모노드라마라고나 할까.

니나는 독서라는 방법을 통해 자신과 마주하고 자신의 상처에 직면했다. 그녀의 성공은 1년동안 매일 한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썼다는 것이 아니라 1년 동안 매일 매순간 자기 자신을 바라본 것이 아닐까 싶다. 과거의 자기 자신까지 포함하여 니나는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했으며 또 이를 가감없이 표현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나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과정은 자기 자신과의 진솔한 대화다.

 

 

그래서였을까? 책 속의 소제목들이 하나같이 마음속을 파고 든다. 마치 니나 상코비치가 말을 걸어 오는 것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로 영롱하다고나 할까. 그냥 그대로 한편의 시나 명언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친구는 떠나도 책은 남는다

꼭 한 번 보물 같은 순간

밤 10시, 책장을 넘길 순간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것

종이로 슬픔을 흡수하는 법

선물 받은 책의 딜레마

남의 사랑이야기로 복습하는 옛사랑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이해되는 순간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운데 어찌 절망으로 생을 끝내는 걸까

나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

톨스토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

.

.

끝으로,

그녀가 읽은 책들 중에 몇 권은 꼭 읽어 보고 싶다. 만약,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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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두 얼굴 - 사랑하지만 상처도 주고받는 나와 가족의 심리테라피
최광현 지음 / 부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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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처럼 한 개인에게 지대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과연 또 있을까? 이 세상 그 누구도 가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고아처럼 가족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은 '가족의 부재'라는 영향을 받는다.

 

 

독일에서 가족상담을 공부한 최광현 한세대 교수는 <가족의 두 얼굴>이라는 저작을 통해 모든 성인이 느끼는 감정과 표출하는 행동은 모두 어린시절의 경험 및 가족과의 관계로부터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어린시절 가족 특히 엄마로부터 받은 거절의 기억을 뇌는 잊어버렸을지 몰라도 마음속 깊은 곳에 흉터로 자리하고 있다가 성인이 되어 자식들에게 표출된단다. 고통스러울수록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기억을 왜곡시키거나 망각하고 고통스러운 '이 순간과 이 곳'에서 도피하고자 한다. 모든 종류의 중독현상은 바로 고통을 느끼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행위이다.

 

 

어린시절의 심리적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로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마릴린 먼로(본명:노마 진 모턴슨)와 매춘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린시절의 슬픔을 아름다운 동화로 승화시킨 안데르센의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준다.

 

크리스턴 콜드웰은 몸과 마음에 남아 있는 트라우마를 해결하려고 '지금 여기'의 몸을 떠나는 현상을 중독이라고 합니다. 중독이란 트라우마 때문에 상처 입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고정된 신체 반응입니다. 트라우마의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욕구충족이란 쾌락의 경험, 즉 중독이 대체물입니다. 알코올, 니코틴, 도박, 게임, 섹스 등에 의존하여 자기 몸을 떠나려고 합니다. 중독의 특성은 반복에 있습니다. 반복을 통해 우리의 몸은 중독에 익숙해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점차 내성이 생기면서 나중에는 고통을 완화시켜 주는 도구가 아닌 자신을 옭아매는 감옥이 됩니다.

-최광현, <가족의 두얼굴> 中-

 

 

 

고통의 원인을 제공해주는 심리적 상처 즉 트라우마는 성인이 되어서도 생길 수 있지만, 대부분 정신과 마음이 연약한 어린시절에 발생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몸의 이곳 저곳을 다치듯 마음 또한 다친다. 몸에 생긴 상처는 신속하게 소독하고 치료해야 흉터가 남지 않듯 마음에 생긴 상처도 즉시 치료해야 트라우마가 남지 않는다. 어린시절 마음의 상처를 적절하게 치료하는 방법을 배운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적절하게 감정을 다스리고 심리적 컴플렉스를 다독일 줄 안다.

 

 

몸의 상처가 보이지 않으면 소독도 치료도 제때 할 수 없듯이, 마음의 상처 역시 외면하거나 보이지 않게 감춘다면 치료 시기를 놓쳐 심각한 후유증 즉 트라우마를 남기고 만다. 그러므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그 순간 바로 표현하고 표출해야 한다. 애써 감추거나 속이지 말고 고통의 순간들과 직접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자책감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따듯한 위로의 말과 함께 마음이 전해지도록 온몸으로 마주해야 한다.

 

 

"괜찮아ㅡ"

"사랑해ㅡ"

 

 

가족간에는 굳이 이런 말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 저절로 전달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만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몸은 괜찮지 않았던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은 거짓으로 할 수 있지만 몸은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법이다.

 

 

어린시절 부모의 이중적인 태도 즉,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겉으로 보여지는 태도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경험한 아이는 성인이 된 이후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된단다. 늘 생각과 감정을 부정당해 왔기에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어이 없이 사기를 당하거나 미신과 사교집단에 잘 넘어가는 유형 중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자, 이래도 가족간에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것인가?

 

 

어느 깊은 밤.

달리는 차안의 라디오에서 일본의 기타노 다케시라는 유명한 감독이 '가족이란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어딘가에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말했다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 순간, 가족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도 완벽한 정의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나'란 존재는...

십여년 전에 돌아가신 아빠와 이제는 늙고 병약해지신 엄마... 그리고 독신으로 외롭게 살아가는 오빠와 의사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언니와의 관계로부터 만들어졌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집이나 말 못할 가족사 한 두 가지쯤은 갖고 있듯이 우리 가족 역시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만 공유되는 비밀 아닌 비밀이 있다. 화목하고 모범적인 가정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우리 가족들은 서로를 지키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던 것같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자기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선택한 행동이었지만 결국 그와같은 노력들이 지금의 나와 엄마 그리고 오빠와 언니를 만들어낸 건 아닌지...

 

 

엄마가 자식을 위해 희생했다며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를...

언니가 경제적 부담을 혼자서 다 짊어졌다고 더 이상 서운해하지 않기를...

오빠가 아빠로부터 받은 상처로 더 이상 힘겨워하지 않기를...

내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더 이상 원망하지 않는 것처럼...

 

 

 

독일에서 가족상담을 공부한 최광현 한세대 교수가 쓴 <가족의 두 얼굴>이란 책은 때론 힘이 되기도 하고 때론 짐이 되기도 하는 가족이란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인정하고 행동으로 옮길 때이다.

가족에게 전하는 따듯한 말 한마디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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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코드 - 너와 나를 우리로 만나게 하는 소통의 공간
신화연 지음 / 좋은책만들기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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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란 감정은 부정적이고 나약하며 원활한 사회생활을 방해하는 불편한 감정이자 약자의 감정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런데 정말 과연 그럴까? 심리학 전공자의 눈에 비친 부끄러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이나 경험이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행동이나 경험과 어긋났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부끄러움은 내 인식의 넓이 안에 다른 사람의 시각이 함께 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존재의 한계를 깊게 그리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강자의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변했다.

 

 

부끄러움이란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인식이요 발견인가. 인간 존재의 깊이와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감정으로 부끄러움은 약자의 감정이 아닌 오히려 강자의 감정이란 주장에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서양의 '죄책감'과 동양의 '수치감'을 비교하면서 동서양의 문화적 특징을 설명한 점이 이채롭다. 서양은 고해성사등을 통해 잘못을 스스로 고백하는 '개인의 목소리'에 초점이 맞추어진 반면, 동양은 '시각'을 중시해서 '얼굴이 빨개진다'거나 '어떻게 하늘 아래 낯을 들고 다니느냐'는 등 '타인의 눈'에 초점이 맞추어진 '부끄러움 코드'가 발달해 왔다는 주장은 신선하면서도 일견 타당성있게 받아들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심리학자답게 저자는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에 대처하는 방식이 결국 개인과 사회 그리고 인류 전체의 행복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주장한다.

 

 

부끄러움이 긍정적으로 발현되어 미안해-> 괜찮아 -> 관계회복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회피한다면 타인에 대한 공격이나 자신에 대한 공격 혹은 비난이나 책임회피 등으로 나타나고 결국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되지 못하면서 여러가지 사회문제를 발생시킨다. 모든 형식의 폭력과 분노는 사실 무력하고 못마땅한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이자 폭력이지 않은가.

 

 

이 밖에도 부끄러움을 언급하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부끄러움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뿐만 아니라 어떻게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해준다.

 

 

조물주의 피조물인 아담과 이브는 조물주의 말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다. 아담과 이브는 결국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조물주로부터 달아나고 만다. 여기에서 조물주의 말이란 사회나 집단이 개인에게 부여하고 기대하는 행동양식으로 대치된다. 즉, 사회나 집단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발현되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담과 이브는 부끄러움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잘 알다시피, 에덴동산에서 쫒겨난 아담과 이브는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옷으로 몸을 가렸다. 조물주는 자신이 만든 완전무결하고 자랑스러운 피조물을 옷으로 가린 것이다!

 

 

조물주의 현신(現身)인 인간이 옷으로 부끄러움을 가렸다는 건 신이 자신의 피조물의 부끄러움에 깊이 공감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거부되지 않고 다시 신과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면서 부끄러움이라는 기제를 통해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저자는 부끄러움이 어떻게 표현되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과 인생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주변사람들과 사회로부터 거부되고 왜곡 증폭된다면 폭력을 낳지만, 받아들여지고 공감된다면 훨씬 더 성숙한 인간과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갖는다는 건..

그만큼 남들보다 더 뻔뻔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남들보다 더 많은 재산이나 지위를 얻은 사람들을 보면, 남다른 재능이나 노력도 물론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차마 하지 못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차마 남의 손가락질과 비아냥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사이에 '과감'하게 나서서 결국 제 것으로 차지하고 만다.

 

이런 모습을 가리키며 손가락질과 비아냥을 퍼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러움이 인다.

 

우리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끄러워서 하지 못한 행위의 결과에 대한 한없는 부러움.

 

 

부끄러움을 안다는 건...

그만큼 솔직하다는 것이고 그만큼 인간적이라는 뜻이다.

 

 

부러움을 느낀다는 것 역시...

그만큼 솔직하다는 것이니, 또한 그만큼 인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부끄러움과 부러움에 어울리는 동사의 다름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부끄러움은 '안다'라고 한다. 즉, 배워서 아는 것이요 깨닫는 것이다. 반면, 부러움은 '안다'라는 동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부러움은 그저 느끼는 것이다. 즉, 본능적 욕구이다. 그렇다면 부끄러움과 부러움 중 어느 것이 더 고차원적인지는 분명해진다.

 

 

부끄러움과 부러움 사이의 적절한 조화 그리고 그 간극을 좁혀나가는 것이 바로 좋은 '인격' 을 형성하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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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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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인터넷 세상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의 편리함과 컴퓨터를 인류 두뇌의 대체물로 확신하고 있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1부에서는 문자와 도구가 인류의 사고를 어떻게 확장시켰는지를 다루고 있다. 기록 이전의 시대 즉 문자가 없던 시대에 인류의 지혜는 곧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이 바로 인류의 기억력이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기억력에 의지하여 연설을 통해 지혜를 전수시켰다. 그후, 문자가 탄생하고 기록 문화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두뇌의 기억력에만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플라톤이야말로 글쓰기를 통해 사상 체계를 이루고 전달한 최초의 학자일 것이다.


완전한 구어 문화에서 사고는 인간의 기억력의 지배를 받는다. 지식은 기억해내야 하는 무엇이며, 기억해내는 대상은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것 내에서 가능하다. 인간이 문자 없이 살았던 수천 년 동안 언어는 개인의 기억 영역에서 복잡한 정보를 저장하도록 하고, 말을 통해 이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교환하기 쉽도록 진화했다. 진지한 생각은 기억 쳬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반면, 글로 쓰여진 말은 개인의 기억력이라는 속박에서 지식을 자유롭게 했고 기억과 암송을 위한 리드미컬하고 형식적인 구조에서 언어를 해방시켰다. 글쓰기 능력은 매우 중요하며 인간 잠재력의 보다 완벽하고 내적인 실현을 위해 진정 핵심적인 것이었다. 글쓰기는 의식을 고취시킨다.

-<생각하지 핞는 사람들> '문자, 새로운 사고의 도구'中-


니콜라스 카는 학자들이 실시한 의미있는 실험이나 논문들을 인용하여 깊이 있게 몰입해서 문자을 읽을 때 인간 두뇌의 시냅스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반면, 인터넷에서의 글읽기는 몰입과 사색을 방해하며 장시간에 걸친 집중적인 읽기 작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검색과 같은 반복적인 작업은 우리의 뇌구조까지 바꾼다는 것이다! 사실, 정보의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인터넷에서 정보와 정보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만 다닐 뿐, 의미 있게 정보를 활용하고 재생산하는 일은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되지 않았는가.


인터넷에서 쉽게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인류는 예전처럼 많은 정보들을 뇌속에 저장하려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인류는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망각의 바다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건 인류는 스스로 컴퓨터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생각하는 힘을 컴퓨터에게 위임한 후 컴퓨터에 속박되어 있는 노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억을 인터넷에 아웃소싱하는 것을 환호하는 이들은 은유를 호도하고 있다. 그들은 생물체의 기억이 지닌 근본적으로 유기적인 인격을 간과한 것이다. 정말 기억을 풍부하게 하고 그 특징을 형성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신비함과 연약함뿐 아니라 우연성 때문이다. 몸이 변하듯이 변화하면서 시간 속에 존재한다. 기억을 되살리는 바로 그 행동은 새로운 시냅스의 말단을 만드는 단백질 형성을 포함하는 모든 강화 과정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셉 르두가 설명했듯이 "기억을 하는 뇌는 기억을 처음 형성하는 그 뇌가 아니다. 오랜된 기억을 현재의 뇌가 이해하기 위해 기억은 업데이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검색과 기억' 中-


또한 저자는 구글 북서치 즉, 구글도서관이라 불리우는-도서관의 종이책들을 스캔하여 검색과 이용 서비스를 제공하려는-프로젝트를 언급하면서 <책의 미래> 저자인 로버트 단턴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하버드 강단에 서며, 도서관 시스템을 관장하고 있는 로버트 단턴은 이렇게 말한다. "구글과 같은 사업체는 도서관을 단지 학문의 전당으로서만 보지는 않는다. 그들은 도서관을 발굴 준비가 된, 자신이 '콘텐츠'라 부르는 것 혹은 잠재적인 자산으로 본다." 그는 이어서 비록 구글이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증진시킨다는 찬사받을 만한 목표를 추구해 오긴 했지만 이윤 추구를 위한 기업에 철도나 철강도 아닌 정보에 대한 접근성의 독접을 허락한다는 것은 너무 많은 위험을 수반한다."고 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구글이라는 제국' 中-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를 읽었을 때는 솔직히 핵심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로버트 단턴이 인류를 위해 한, '위대한 행적'을 깨닫게 되었다. 즉, 인류에게 악마의 유혹은 언제나 천사의 선물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해 준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탐구서을 쓴 조지 다이슨은 구글플렉스를 방문한 후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안락함은 거의 압도적이었다. 행복한 골든 리트리버들이 잔디 위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스프링클러 사이를 느긋하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고, 도처에 장난감이 널려 있다. 나는 이내 생각지도 못한 악마가 어두운 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가 지상으로 내려온다면 몸을 숨기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 같은 반응은 분명히 과하긴 하지만 이해할 만하다. 구글의 엄청난 야심과 어마어마한 자금 그리고 지식 세계에 대한 제국적인 디자인과 함께, 구글은 우리의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 또한 담고 있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세르게이 브린은 "어떤 이는 구글이 신이라고 말합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또 어떤 이들은 악마라고도 합니다."라고 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구글이라는 제국' 中-


1544년 경. 금 주조 기술자였던 구덴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여 종이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그 당시 지나치게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와 독서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인류를 게으르게 만들고 정신 세계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처럼 구글의 '도서검색서비스'와 '인터넷의 편리함'에 가해지는 비난의 목소리들이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뇌를 컴퓨터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은 인류의 두 다리를 대신했던 기차, 자동차의 탄생이나 눈을 대신하는 망원경의 발견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기차와 자동차 그리고 망원경과 같은 발명품들은 인류에 의해 인류를 위한 편리함을 제공할 뿐 인류의 지위에 위협을 가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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