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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경계선에서 - 오래된 믿음에 대한 낯선 통찰
레베카 코스타 지음, 장세현 옮김 / 쌤앤파커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2010년 출판될 당시부터 쟁쟁한 석학과 리더들의 추천사가 이어졌던 책이다.
저자는 마야, 로마, 크메르 제국이 몰락한 이유를 놀라운 통찰력으로 지적하고 있다.
현
대적인 과학 기술로도 풀리지 않는 놀라운 문명을 창조해냈던 고대 왕국이 어떻게 몰락해 갔을까? 바로,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과
물부족 그리고 가뭄과 같은 자연 재해를 합리적으로 극복하지 못하자 인신공양과 물신숭배라는 종교적 '믿음'에 매달리면서 '사실'과
'지식'에 입각한 과학적인 문제 해결의 길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구가 늘어나고 도시가
커지며 문명이 발달하면 필연적으로 해결해야하는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 두뇌의 진화 속도가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빨리 진화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즉, 인간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해가는 속도보다
환경이 바뀌는 속도가 너무나도 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류는 필연적으로 '인식의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정말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컴퓨터와 무선 인터넷을 만들어낼 만큼 인류는 기술적 진보를 이루었지만, 그 진보의 결과를 누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초원을 거닐던 유인원의 인식 체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기술적 진보를 이루어냈다면 그만큼 인류의 두뇌와 생각의 틀도 바뀌고 진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답은 천만의 말씀이다.
안타깝지만 인류의 기술적 진보는 소수의 특별한 '돌연변이'들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제임스 왓슨, 리처드 디킨스, 그리고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까지 이들을 일반인들과 똑같은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마 거의 없으리라. 이들은 정글의 숲에서 제일 먼저 사바나 초원으로 내려와 인류 최초로 두 발로 걷기를 시도했던 첫번째 호모
에렉투스이며 최초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첫번째 호모 파베르라 하겠다.
어느 순간 불연듯...
'통찰'이라는 지렛대를 이용하여, '인식의 한계'라는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저 너머에 먼저 이른 최초의 사람들 말이다.
'경계 저쪽으로 너머 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경계 이쪽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흔
히 시대를 앞선 이들의 진보적 발견과 발명 앞에서 대중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대다수는 변화와 진보를 선택하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는 쪽을 택한다. 하이테크 시대에 진입한 오늘날 인류가 고대 문명인들이 겪었고
해결하지 못한채 멸망해갔던 문제들에 여전히 발목이 잡혀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전세계적으로 직면한 문제들...
예
들 들면,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환경파괴, 테러리즘과 종교적 갈등 및 인구증가와 고령화는 여전히 난제로 우리 앞에 산적해 있다.
최첨단 위성으로 태풍의 경로를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현재 65억인 지구 인구는 2030년경에는 90억명으로 불어날 것으로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일부국가에서는 여전히 출산을 독려하고 있다.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부족, 자원고갈, 전염병 확산, 지구환경파괴 등에 따른
심각한 폐해는 후손들에게 전가시킨 채 말이다.
번성하던 마야제국과 로마제국 그리고 동아시아의
크메르 제국도 처음에는 우리처럼 빠르게 기술적 진보를 거듭하면서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을 것이다. 자연히 인구도 증가하였다. 태풍을
막기 위해 제방을 쌓고 가뭄에 대처하기 위해 댐과 수로를 축성하는 등 짧게는 수십년 길게는 수천년 동안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인식의 한계와 지식의 교착을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인식과 통찰의 한계에 다다른 마야와 로마인 그리고 크메르인들은 사실과 지식의
추구 대신 믿음과 신앙에 집착하는 원시사회로 회귀하면서 몰락하고 말았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인류 문명 번영의 한가운데를 지나, 인식의 한계에 봉착하진 않았는가. 아무래도 그렇게 보인다.
그
러나 우리는 스러져간 고대 문명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는 몇 장의 카드를 갖고 있다. 첫번째 카드는 마야와 로마 그리고
크메르인들이 자신보다 앞선 문명의 탄생과 발전 그리고 몰락의 과정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이들 제국 문명의 역사
뿐만 아니라 역사 이전의 선사시대에 대해서도 이미 상당한 지식을 확보한 상태라는 점이다. 두번째 카드는 고대 문명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기술적 진보를 거쳤기에 인식의 한계를 극복하기만 한다면, 즉 의지만 갖고 있다면 멸망으로 이어지는 문명
진화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기술과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고, 마지막 세번째 카드는 레베카 코스타와 같은 선지적인 인물들의
목소리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귀기울이므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즉 통찰의 빈도를 늘리면서 인류 두뇌의 진화 속도를 끌어 올릴
수 있다는 점이리라.
이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소 길지만 레베카 코스타가 에필로그에서 남긴 말을 들려주고 싶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이래로 우리는 진화와 이중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대다수 사람들은 진화가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문제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와 지난 수세대에 걸쳐
우리를 괴롭힌 방대하고 복잡한 문제들(지구온난화, 테러리즘, 빈곤, 유행성 전염병, 핵 위협, 세계금융위기, 공교육의 쇠락
등)사이에서 우리가 아무런 연관성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도 진화 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인간은 진화가 허용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진보할 수는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애써 진화를 등한시해 온 것은 아닐까? 이는 곧 인간에게 생물학적 제약이 있어서 한정된 범위 내의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될 테니 말이다.
생물학적 제약?
분명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
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어느 시점이 되면 문명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복잡성과 규모는 우리의 생물학적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때 복잡성과 진화가 충돌하는 지점이 "인식 한계점"이며, 이것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등장했던 모든
선진문명에 종말을 초래하는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그 깨달음의 과정에서 나는 초코릿공장 포장라인에서 일하는 루시는 결코 떠올리지 못했다.
비
록 내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루시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은유다. 새로운 인식 능력을 제때 계발하지 못하면 반드시 여러
가지 불합리한 행동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선은 미처 상자에 담지 못한 초코렛을 어딘가에 쑤셔 넣어 문제를 은폐하려 든다. 하지만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초콜릿은 끝없이 나온다. 초콜릿을 더 이상 먹거나 감출 수 없게 되면 우리는 얼어 붙는다.
우리가 정체 상태에 빠져 꼼짝도 못하는 사이에 초콜릿은 한층 빠른 속도 속도로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한다. 결국 우리는 컨베이어
벨트를 정지시키고 공장 문을 닫을 수 밖에 없다. 운이 좋으면 얼마 후에 공장을 재건하고 새로운 경영진 하에서 다시 시작할 수도
있따. 처음 잠시 동안은 일이 잘 되어 간다. 하지만 컨베이어 벨트는 다시금 속도를 올리고......
자연은 우리에게
닥친 난제를 풀 명쾌한 해법을 주었다. 뇌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통찰"이라는 놀라운 문제해결 능력을 말이다. 통찰을
발견한 것은, 루시가 문득 컨베이어 벨트 끝에다 상자를 대고 떨어지는 초코릿을 받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다. 이제 루시는 컨베이어 벨트가 아무리 빨라져도 손쉽게 그 속도를 따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
통
찰을 발견한 것 외에도, 우리는 붕괴의 패턴을 중단시킬 지식과 깃굴, 자원을 보유한 최초의 문명이기도 하다. 앞서 존재했던 그
어떤 문명도 환경에 대해 이 정도의 지배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으며, 인류 흥망성쇠의 행로를 변경할 수단을 이처럼 풍부하고 자유롭게
이용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장래를 낙관할 만한 이유도 과거 그 어떤 문명보다 많다.
-레베카 코스타, <지금, 경계선에서> 에필로그 p395~397 中-
부디 이것 하나만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는 침팬지처럼 숲 속의 나무 위에서 살다가, 맹수들의 땅이었던 초원으로 용감하게 내려와 두 발로 걷기 시작한 루시의 후예들임을...
하지만...
또한, 저자는 인류가 환경의 변화와 인류 진화의 속도 차이를 극복하고 통찰을 통한 항구적인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장벽 다섯개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번째 장벽은 '불합리한 반대'이다.
대안은 없이 무조건 반대한다.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 에어컨 사용이나 차량 이용을 제한시키는 강제적 법안이 나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 레베카의 지적처럼 대다수 사람들이 불편함을 이유로 반대할 것이다.
두번째 장벽은 '책임의 개인 전가'이다.
고
대인들이 가뭄이 깊어져 사람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면 신에게 산 사람을 통째로 제물로 바치듯, 우리 사회도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희생자 색출에 혈안이 된다.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관련자-말 그대로 관련만 있을 뿐 직접적인 책임이나 권한은
없는-를 문책하거나 몇몇 개인을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집단 착각에 빠진다.
세번째 장벽은 '거짓 상관관계'이다.
우
리는 흔히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동한다. 자카리 쇼어는 자신의 저서 <생각의 함정>에서 극동 지방의 한 양치기 소년
보보의 이야기를 통해 이 점을 적나라하게 꼬집고 있다. 우연히 집에 불이 나 돼지 우리에 옮겨 붙게 되었단다. 불이 꺼진 후,
마을의 보보라는 소년이 불에 타 죽은 돼지들을 만져보다가 맛을 보았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더란다. 하여, 그후 마을 사람들은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기막힌 그 맛'을 보기 위해 멀쩡한 집에 불을 놓았다는 이야기다. 보보네 마을사람들은 돼지고기가
맛있어진 이유가 불에 익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집에 불이 났었다'라는 사실에만 집착한 나머지 '집에 불을 내면
돼지고기가 맛있어진다'로 거짓 상관관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기가 막힐 따름이다.
근데
이런 기막힌 상관관계의 오류에 우리는 매일 매일 빠져서 살아간다. 사소한 예를 들자면,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우리는 곧잘
인과관계를 혼동하는 우를 범한다. 어느집 고등어 구이가 맛있다고 한번 입력이 되면 1년 내내 항상 맛있는 것으로 돌같이 굳게
믿는다. 고등어가 제철일 때에는 왠만한 집 고등어 구이는 다 맛있는 법이다. 크게는 선거에서도 거짓상관관계를 잘 만들어낸다.
지난번엔 '이' 당 후보를 뽑았더니 나라가 엉망이 되었으니 이번엔 '저'당 후보를 뽑아야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하니 말이다. 특히,
여러 사람이 선택하면 거짓도 사실이 된다. 레베카 코스타는 위키피디아를 예로 들면서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는 다수의 합의에 의해
'사실'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우려를 표한다.
네번째 장벽은 사일로식 사고이다. 사일로식
사고란 조직에 속한 개인이나 집단이 서로 소통하지 않고 정보를 독점하거나 회피함으로서 조직 전체에 피해를 입히는 사고 방식을
일컫는다. 이와 같은 사일로식 사고는 과거 초원에서 살아가던 인류의 조상들이 "영역"을 지켜냄으로써 생존 기회를 늘리려는
불합리한-혹은 아직 진화하지 못한- 원초적 본능의 일환이라고 한다.
다섯번째 장벽은 바로 '극단의 경제학'이다.
경
제적 논리가 모든 분야에 침입해 들어오면서 인류는 점점 더 고도의 이윤 추구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되었다. 위에 나열된
장벽들 안에는 모두 인류 집단의 공통된 그릇된 믿음, 즉 '슈퍼밈'이 개입되어 있지만 특히 '극단적 경제학'이라는 장벽에서 인간은
더욱 더 강력한 슈퍼밈을 고수하고 있다. 저자는 그 한 예로 방글라데시의 빈민은행인 '그라민 은행'을 언급한다. 그라민 은행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극빈층 사람들을 대상으로 집단연대보증이라는 대출형식으로 낮은 이자만을 받았지만 세계적인 금융 회사들이 쓰러져
넘어갈 때에도 무사(?)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극단적으로 이윤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바로 미국
월가의 지나친 탐욕과 노벨상 수상자 조차도 놓쳐버린 금융 상품과 시장의 복잡성때문이었다.
선택 가능한 대안, 결정할 일, 알아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아서 우리의 인식 능력에 지나친 부담을 주는 환경에서는 복잡성을 자초하지
않도록 좀더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이롭다. 생활을 간소화하기로 결심할 때 집중력과 의지를 가지고 사고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도 생긴다. 이 복잡한 세상에서 생존하려면 뒤로 한 걸음 물러나 큰 그림을 볼 시간,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를 더욱 주의 깊게
고려할 시간, 보다 신중한 의사결정을 위해 심사숙고할 시간, 한숨 돌리고 휴식을 취할 시간이 꼭 필요하다.
-레베카 코스타, <지금, 경계선에서> p383 中-
인간은 모든 복잡성과 다양성에 대응하고 대처할 수 있다는 오만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환경이 복잡해질수록 인간은 인식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고 거짓된 인과관계와 믿음에 의해 잘못된 선택이나 선택의 포기에 내몰리게 된다.
끝으로, 저자는 장벽을 극복할 수 방법으로 두뇌의 비약적 진화라고 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강조한다. 통찰이란 좌뇌와 우뇌의 사이
어디쯤에 위치한 우리 뇌의 특별한 작용이라 하겠다. 그런데 통찰은 일반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우연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저자는 통찰 역시 '두뇌 훈련'을 통해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혹시, 지금 내가 '슈퍼밈'이라는 잘못된 믿음에 전도되어 '불합리한 반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우려를 잠시 잠깐 해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컴퓨터를 이용한 그 어떠한 두뇌훈련 프로그램보다 산책과 명상 그리고 독서와 운동 등이 훨씬 더 쉽게 인간을 통찰의 세계로 인도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의 준거로 무엇을 삼아야 하는지....
이런 문제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이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