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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 너머에 - 아직도 가야 할 길 그리고 저 너머에
M. 스캇 펙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그리고 저 너머에>는 1978년스캇 펙 박사의 첫번째 책인 <아직도 가야할 길>이 출간된 지
이십여년만에 나온 책으로 <아직도 가야 할 길>의 후속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결코
좁혀질 것같지 않은 종교와 과학의 경계를 허문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책에서 스캇 펙은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참된
종교인으로의 삶의 자세로 해석한 것 같다.
사실, 종교와 철학뿐만 아니라 과학까지도 어쩌면 그 출발점은 같다.
바로 '생각(思惟)라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도무지 풀릴 길 없는 수수께끼 앞에서 인류가 창조자(신)를 '창조'해낸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유
과정의 결과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유의 과정 속에서 인류의 종교가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한편,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 바로 철학이다. 그리고 경험과 사실에 입각한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란 다른 생물체와 마찬가지로 수분 단백질 등등의 물질로 이루어진 생명체일 뿐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과 <그리고 저 너머에> 등 스캇 펙 박사의 저서들은 이상의 세 가지 궁금증을 정신과 상담의라는
저자 자신의 직업적 특징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종교인으로서의 관점을 조화롭게 결합시켜 해답을 찾아 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특히, 정신과 의사로서의 관점은 일찍이 유대인 수용소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 정신과 전문의로서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을 떠올리게 하며, 사랑과 공동체를 강조하는 종교적 관점은 <사랑의 기술>의 저자 에릭 프롬을 떠올리게
한다. 굳이 차이라고 한다면 각기 다른 시대에서 태어나 각기 다른 경험을 했다는 시공간적 차이와 스캇 펙 박사가 훨씬 더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띄고 있다는 것 정도다. 하여, 비종교인으로서 스캇펙 박사의 책을 부담없이 읽어내려간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자의 영적인 경험과 주장들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 악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분석과 해석에는
십분 공감하는 바이다.
악의 문제로 깊이
들어가기 전에 내가 다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삶의 목적이 그저 고통 없는, 곧 언제나 편안하고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문제 해결에는 고통이 다르고 차원 높은 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은 쉽지 않다.
(......)
우리들 대부분은 죄, 실패, 결함 등의 증거가 드러나 몰리게 되면 우리의 그림자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칼 융이 사용하는
'거부'라는 단어의 의미는 훨씬 적극적인 그 무엇을 포함한다. 죄와 악의 경계선을 넘어 버린 사람들의 특성은 자신들의 죄의식을
분명히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결함은 양심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양심의 고통을 인내하지 않고 거부해
버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위를 악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죄가 아니라,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는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86~94 中-
저자는 자신의 본질적 실체와 마주하려하지 않는 '거부'야말로 악의 근원이요 죄의 시작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양심의 가책'이란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진정한 죄란 바로 양심에 위반된 행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 자체를 회피하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이야말로 용서의 시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린 사실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훨씬 더 많이 속이며 살아간다. 바로 자기 자신의 본질과 마주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우리는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한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향이더 강하다. 물론 두 가지 형태의 부정직함은 서로를 부추겨 거짓의 상승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우리는 일정한시간 동안 일부의 사람들을 속일수 있지만, 자기 기만은 잠재적으로볼때 무한계로 나타날수
있다. 물론 우리가 악 또는 광기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한도 내에서이다.
자기 기만은 스스롱게 온유한 태도를 취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만큼이나 나쁜 것이고, 자아의 '그림자'를 증대시키며, 동시에
자아에 대한 어둠과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와는 반대로 스스로에게 정직해진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자아를 사랑하는 행위를 선택한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210 中-
스캇 펙은 <거짓의 사람들>에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신(조물주)으로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선에 복종할
것인지 아니면 악에 복종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판단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혹시 선과 악의 경계선 언저리에
머물기를 선택할 순 없을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저자는 C.S루이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주에 중립 지대란 없다. 어떤 곳에서나 어떤 순간에서나 산이 우리의 영혼을 원하거나 또는 사탄이 우리의 영혼을 원하고 있다"
아
마도 우리는 선과 악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신과 악마의 중간 지점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선택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선택'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며, 불복종의 선택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210~211 中-
공교롭게도 스캇 펙 박사의 <그리고 저 너머에>와 셔윈 뉴랜드의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라는 책을 동시에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죽음을 가장 가깝게 지켜봐 온 의사의 근무일지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죽음의 양태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스캇 펙 박사가 <그리고 저 너머에>에서 언급하고 있는 '죽음'이 추상적인 차원이라고
한다면, 셔윈 뉴랜드 박사가 다루고 있는 '죽음'은 현실적인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생을 인위적으로 끝내고자 하는 결정은, 반드시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누구든지 그 죽음이 피치 못한 것이었음을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교수였던 브리지맨은 1946년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로 말기 증세에 이른 암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79세의 나이로 쓰러질 때까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7권짜리 저서의 색인작업을 마무리한 후 권총으로 자살했다. 브래지맨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수행할 수
밖에 없음을 한탄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내가 직접 어떤 원칙을 세웠으면 좋겠네. 피할 수 없는 종말이 다가왔을때, 의사에게 끝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말일세"
-셔윈 뉴랜드,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224~225 中-
죽어가는 환자를 돕는 것이 의사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불가항력적인 고통속에서 죽음으로 향해가고 있는 환자의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줄여주는 것 역시 의사의 역할이라 하겠다. 마땅히 합당한 가이드라인이 마련된다면 죽음 앞에서 마지막으로 인간적 존엄성을 지켜낼 수 있는 또 다른 형태의 삶의 마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반면, 안락사에 대한 스캇 펙 박사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안락사를 삶의 의지 부족이나 순간의 판단 착오로 이루어지는 자살과 같은 차원에서 접근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내가 말하는 품위 있는 죽음이란 안락사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안락사란 태생적으로 산란한 것을 깨끗하게 처리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내 생각에 그것은
죽음에 따른 실존적 합법적인 고통을 줄이고, 그럼으로써 배움과 성장의 기회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거부의 태도 또한
아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유언장을 작성하지 않거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느낌에 대해 입을
닫는다거나 심지어 먼 미래의 계획을 세우면서 아예 모르는 척하는 등의 제자각거부 형태를 보인다. 죽음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불가피한 죽음을 의식해야 되는 고통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의미 있는 의사소통의 기회를
막아 버리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으로 가면서까지 배움의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다.
품위 있게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죽음을 배움의 기회로 삼는 것이며, 영혼의 진정한 존엄성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육체적 파멸을 자기 삶의 정화 과정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캇 펙, <그리고 저 너머에> 210~211 中-
흔히, 인생을 뒤흔드는 책들이 그러하듯 한번 읽기만으로는 역부족인 것 같다.
특히, 나의 편견 혹은 짧은 지적 수준으로 말미암아 책을 읽어 나가는 과정에서 집중력이 종종 흐트러졌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다시
되돌아가 읽기라는 초소한의 노력마저 하지 않았더랬다. 다시 읽어봤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는 나태인가 교만인가?
아니면 둘 다 인가?
모든 악의 시작은 나태와 교만이라고 일갈한 스캇 펙 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