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하여 혁명을 하는가 - 끝나지 않은 프랑스혁명
피에르 세르나 외 지음, 김민철 외 옮김 / 두더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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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새롭게 바라본 프랑스 혁명, 그것은 단순한 혁명이 아니라, 또 다른 혁명을 위한 혁명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새로운 정치 체제를 낳았고, 새로운 이념을 만들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은 오늘날의 우리가 판단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한 책임 역시 우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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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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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셔터 아일랜드>는 단연코 큰 충격이었다. 디카프리오의 마지막 대사, 그리고 절벽에 떨어진 듯 의문스럽게 끝난 결말은 나에게 여전히 생생한 당혹감으로 남아 있다. 영화의 충격이 가신지 수 개월이 지난 후, 나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셔터 아일랜드>의 원작인 『살인자들의 섬』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소설을 읽었다. 전개 및 결말은 영화에서 이미 확인한 터였으나 책장을 덮은 지금도 이 작품의 결말은 나를 고민에 빠뜨렸다.

 

 아마 소설을 소설로 보지 않는 비평가들은 이 소설의 내용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살인자들의 섬』은 '셔터'라 불리는 섬을 배경으로 한다. 이 섬에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병동이 있으며 간부들이 이 병동을 관리하며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연방보완관인 테디 대니얼스는 우연히 만난 처크 노리스와 함께 행방불명된 환자 레이첼 솔란도를 찾기 위해 이 섬을 방문한다. 그러나 수사를 계속하던 도중 테디는 이 섬에서 환자들을 상대로 뇌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비롯한 비밀들이 있음을 눈치채고 위험을 무릅쓰며 섬의 진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영화, <셔터

아일랜드>.

 

 그러나 소설 안에 몰입한 독자는 책을 모두 읽고 난 뒤 이런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테디 대니얼스인가, 아니면 앤드루 레이디스인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힌트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건의 단서도 아니고, 암호의 해독도 아니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밝히지 않는다. 둘 다 진실이거나(이것은 불가능하다), 둘 다 거짓이거나. 병원의 속임수이거나, 아니면 테디의 망상에 불과하거나.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테디가 뇌실험을 받기로 결정한 뒤에도.

 

 어떤 훌륭한 소설은 언제나 그 전에 존재했던 위대한 명작이나 사상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법이다. 아마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은 데카르트의 사상을 노린 듯 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이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불확실함의 가능성을 가진 모든 것들을 부정하였고, 그것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은 결코 거짓일 수 없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살인자들의 섬』을 보면, 테디의 생각은 철저한 조작과 약물에 의해 분해되고 만다. 치밀하게 짜여진 게임 때문에 독자조차 그 진실을 헤매고 만다. 과연 생각이 언제나 나의 진실을 입증해 주는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

한다"는 산산히 짓밟히고 만다.

 

 테디의 생각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꿈'과 '기억'뿐이다. 그러나 약물과 조작에 의해 그의 꿈과 기억조차 왜곡되고 만다.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치료뿐이다. 그 치료가 끝나면 그의 정체성은 단 하나로 요약된다. 앤드루 레이디스, 2년 전에 세 아이를 죽인 레이첼 솔란도를 살해하고 자신이 아무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위험성 범죄자. 이제 더 이상 그는 두 가지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내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괴로워할 이유가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행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셉션>의 림보와도 같은 것이며, 그저 그의 바램일 뿐이다. 현실은 후자와 같다. "선량한 사람으로 죽을 것인가, 괴물로 살 것인가?" (<셔터 아일랜드> 마지막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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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영화의 영향이 크다. 1편을 볼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용이 등장하는 2편을 다 보고 나니, 갑자기 원작을 읽고 싶은 욕구가 강렬해졌다. 빠른 시일 내에 `호빗`을 구매해서 읽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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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4-01-10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프리트님 오랜만에 글을 올리셨네요.전 호빗이 달랑 1권뿐인데 영화를 3부작으로 한 것은 좀 오버란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늦었지만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O^

starover 2014-01-10 20:50   좋아요 0 | URL
저도 카스피 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솔직히 좀 많이 늘렸죠^^
 
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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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타나베, 그는 단지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다. 상실의 시대에, 노르웨이의 숲 속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기 위해 방황한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그가 그것을 찾았는지 알 수 없다. 거의 잊고 있었던, 와타나베의 '회상' 이야기는 단지 회상에 끝나기 때문이다. 그 과거의 기억이 현재와 어떤 상호교류를 맺고 있는지 저자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 호기심과 불확실함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의 매력이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대립적인 이미지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즐거움과 교훈들이다. 우선 와타나베는 과거 속으로 파고들며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과거의 조각들을 연상해 간다. 그 과정은 규칙이나 의미가 없는 나열이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규칙성과 상징을 가지고 있는 사건과 '우연히', 그러나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가즈키, 나오코, '나', 세 사람 사이에 있었던 허물없는 우정은 가즈키의 부재로 인해 어색하고 불안정한 만남으로 바뀌게 된다. 비록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가즈키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발전하지 못한다. 결국 그것이 발목을 잡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하루키는 '상실'의 아픔이 얼마나 무서운지(그것이 또 다른 상실을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숲 속에서 그가 아픔만 앓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도심 속에서 미도리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나오코와 완전히 다른 여자이다. 그녀는 와타나베에게 일종의 치유였다. 그녀는 와타나베에게 먼저 접근한 이후, 자신의 모든 감정과 삶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며, 마찬가지로 와타나베의 삶과 감정 속에 파고들려고 한다. '나'의 입장에서 쓰여진 『노르웨이의 숲』은 그 과정을 유쾌하고 다정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제 3자인 나로서는 와타나베의 바람기로 보인 감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서로의 순수함을 지켰고, 깊은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것은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관계도 미도리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은연 중에 두 여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치유의 과정은 두 사람 모두 아니었다. 두 여자는 거의 모든 것을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관계였다. 나오코는 이미 스스로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미도리는 그것을 쾌활한 분위기에 감추어 언급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오코가 요양해 있던 병원에서 와타나베와 만난 레이코라는 여자는 이 소설의 가장 신선한 충격이 아닐까 싶다. 나가사와 선배가 항상 와타나베와 함께 하려 하지만 주인공의 근처를 맴돌기만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면, 레이코는 만난 그 순간부터 끝까지 그의 마음 속으로 바로 달려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레이코는 또 다른 와타나베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만 할 뿐인데, 와타나베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를 바로 이해한다. 이 보이지 않는 능력이 『노르웨이의 숲』의 또 다른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한 사실일 것이다.

 

 그 유명한 대사,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은 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은 하나의 비유일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진리를, 하루키는 설파하고 있다. 어떤 이가 한 남자의 진정한 친구인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가즈키인가? 항상 그와 어울리려고 하는 나가사와인가? 사랑하지만 상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나오코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와 공유하려고 하는 미도리인가? 아니면 공감을 통해 서로를 치유하는 레이코인가? 답은 각자가 찾아야 한다. 각자의 인물에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청춘인 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바로 나 자신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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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
나종일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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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 같은 책들은 소장하고 싶어하고, 또한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다. 물론 가격은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영국의 마그나카르타에서 유엔의 새천년선언까지 인류의 인권사를 선언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 페이지는 1500쪽을 상회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영한대역으로 되어 있어서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인권선언들을 한 편씩 읽어보면, 어느새 오늘날 우리가 보장받는 혜택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며 깨달은 점 중 하나는 인간의 잘 살고 싶어하는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대헌장 이전의 영국은 의회나 국민의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정사를 진행하는 국왕으로, 일부 특권층만 잘 살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평등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대헌장으로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다음, 인권은 점점 발달해간다(그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소설과도 같다). 대헌장의 시초가 된 영국을 예로 들면, 마그나 카르타로 의회와 국민의 권리를 보장받은 이후, 권리청원, 권리장전 등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는 인권선언이 등장했으며 이는 미국과 프랑스로 이어져 미국 독립 선언과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시초가 된다. 인권선언의 내용은 현대로 갈수록 중복된다. 이것은 한 번 선언한 것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사람들간의 합의이다. 즉, 이 선언들은 불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조항도 삭제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추가로 그것을 발전시킨다. 그것을 종합한 것이 바로 '빈 선언'과 '새천년선언'이다.

 

 흥미로운 점은 52가지의 인권선언들 중 낯익은 선언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공산당 선언』이다. 이 책은 원래 여러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거대하고 장엄한 책 안에서는 그저 하나의 선언에 불과하다. 공산당 선언은 책의 거의 중간에 위치해서 약간 단절된 듯한 과거의 선언과 현대의 선언을 이어준다. 이 다리 덕분에 우리는 세계인권사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을 시작으로 노예제 폐지, 노동자들을 위한 선언, 어린이의 권리선언,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선언, 여성의 평등에 관한 권리선언,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선언, 그리고 환경과 발전에 관한 선언.......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한 나종일 선생님도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사실 이 책은 후반으로 갈수록 익숙한 내용이 등장하여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라. 왜 그들이 이렇게까지 중복을 하며 강조하는가? 그것은 선언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선언은 하나의 약속이자 다짐일 뿐이다. 선언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유엔의 새천년선언을 우리가 지켰다면 지금쯤 지구촌은 전쟁없고 차별과 가난이 없는 지상낙원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현실은 13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52개의 선언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찾았다. 그것은 선언 이전에 행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행동이 없었다면 선언도 없다. 움직이지 않는 자는 말할 권리가 없다. 프랑스 국민들이 가만히 앉아서 시민의 권리를 부르짖었는가? 미국이 영국과의 분열 없이 독립 선언을 했는가? 영국이 국왕과의 전쟁 없이 의회와 국민을 위한 법을 제정했는가? 이제 움직일 차례이다. 그리고 또 다른 선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현재의 선언을 지켜야 한다. 이 인권사는 곧 선언의 역사이다. 우리의 행동은 곧 선언으로 기록된다. 앞으로 이 선언의 역사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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