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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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미묘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술이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인간됨의 기술만이 필요하다. 인간이라면,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의 차이, 감정적 이끌림으로 이루어지는 사랑과 이성이 결합된 종합적 형태의 사랑, 연애와 결혼의 차이 등을 능숙히 이해한다.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면, 배워야 한다. 자신만이 이해하는 방식을 사랑이라고 주장하거나 그것을 상대에게 강요한다면, 단언컨대 그 사람은 먼저 인간이 될 필요가 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사랑을 시작했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물론 사랑의 어려운 점이라면, 그것을 실패한 경험이 거의 전 인류에게 동일하게 해당된다는 것이리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는 소위 말하는 '원하는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기술 따위는 없다. 애초에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나의 이상을 상대에 맞추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가 같은 방향을 걷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니까.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 소개된 그 문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하여 프롬이 주장하는 사랑이란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사랑하는 사람, 주변 사람,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나에게 가장 찔림이 된 말은 사랑하는 상대'만' 사랑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흔히 우리는 착각한다.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하는 이들을 보며 참 순애보 같고 순수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철없고 무모한 사랑의 방식이다. 진정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세계를 사랑한다. <인터스텔라>에서 만 박사가 지적한 대로, 인간은 자기 자신과 가족의 안위 외에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어쩌면 작중 세계를 위태롭게 만든 것은 바로 그러한 태도가 아니었는지 돌이켜 본다.


 이 책은 수십 년 전에 쓰였지만, 물질만능주의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일침을 고하기도 한다. 현대에 사랑은 물질보다 분명 아래이다. 보이지 않는 가치가 감각으로 접해지는 가치에 잠식 당한 시대이다. 그러나 작가는 분명히 주장한다. 많이 갖고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자가 부자라고. 상호호혜주의를 환상으로 치부하고 오로지 시스템으로 인간 세계를 구성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있었으나, 그러한 세상은 오직 유리벽으로 이루어진 고층 건물 속에만 존재해야 한다. 감히 사랑의 원리를, 인간 본능에 각인된 호혜의 원리를 원시적이라고 폄하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견고한 유리벽에 가두는 자들이다.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때로는 실패하더라도, 때로는 자신의 인생이 조금 힘들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남을 돕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 한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1원도, 1초도 소중히 여기면서 타인을 위해 쓰는 돈과 시간은 1원도, 1초도 아까워 한다. 나는 인간과 기계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서로를 사랑하는가의 여부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볼 때 세상에는 인간의 탈을 쓴 기계가 너무 많아 보인다.


 그리고 자신을 성숙하다고 여기는 무리에게 한 번 더 비판을 던진다. 어린아이의 사랑은 '나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는 명제를 벗어날 수 없다. 진정 성숙한 사랑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대가 필요하다'라는,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이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되며, 수동적인 소비에 취해 있다고 지적한다. 여전히 우리는 사랑을 먼저 받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 번 그것을 받고 나면 거기에 안주해 버린다.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인식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게 많은 지식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상상을 하지 못한다. 모든 인간다움이 고갈되어 간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 회복되는 것이다. 단순한 감정적 이끌림도 아닌, 육체적 욕구의 해소도 아닌,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방향성의 변화가 그것이다. 아이는 자신의 주변 환경에 변화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사를 했을 때, 또는 이민을 갔을 때 어른들보다 적응을 어려워하거나 도피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마찬가지로, 현대인은 어른의 몸을 하고 있지만,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을 변화 시키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한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세상이 너무나 편하기 때문에, 이대로 지내도 별 문제 없다는 환상이 너무나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방향성을 바꾸어야 할 때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이 그 세계로부터 받은 사랑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어렵지 않다. 양보하는 것을, 약간의 손해를, 잠깐의 시간 낭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사랑의 실패보다 더 두려운 것이 어디 있을까? 나의 일부를 내어주고 사랑을 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물질적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가치 있는 교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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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 석사까지 지내면서 참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났다. 빼놓을 수 없는 두 분이 바로 이 두 책과 관련된 분들인데, 나의 대학 생활 및 대학원 생활에 큰 힘이 되어 주셨다. 


 Bell in Campo & The Sociable Companions은 대학생 시절 알게 된 교수님이 빌려주신 책인데, 여성들이 전쟁에 주도하여 참여한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실제 역사에 상상을 더한 팩션(faction)이 이때부터 시도되었다니, 그 상상의 폭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 이어지는 The Sociable Companions은 일종의 결혼극 또는 희극이었다. 빌린 책이라 메모나 필기를 할 수는 없었으나 곳곳에 인상적인 구절들이 있어서 읽는 내내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권석우 교수님의 『선악과와 처녀 잉태: 유대-기독교 문명』은 교수님의 연구 결과를 집대성하는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인데, '집대성'이라는 말이 걸맞게 방대한 지식과 인용 문헌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꼬리 먹는 뱀을 의미하는 우로보로스의 상징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접하게 되었는데, 유대-기독교 문명뿐만 아니라 고대 문명이나 동양 문명까지 아우르는 사유의 폭넓음에 감탄했다. 연구자가 어떤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탐구하면 이러한 성과를 낼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지식을 전파하는 데에만 치중하지 않고 일반 독자가 읽을 수 있게 최대한 쉽게 풀어쓰신 노력이 보였다. 뱀, 처녀, 선악과 등 우리의 통념 속에 고정되어 있던 상징들을 해체한 뒤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기존에 그 개념에 접근하던 방식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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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주식회사
잭 런던 지음, 한원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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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는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상상에 즐겨 빠지며,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며, 자기 자신에게 병적으로 엄격하다. 그들이 쓰는 정신적 수고는 때로 그들을 병에 몰아넣을 정도로 강렬하다. 그러나 그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이들의 눈으로 보기에 소설가는 너무나 태평하고,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편협한 존재, 내지는 사회의 생산성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도태된 부류로 간주되기도 한다. 혹자는 쓸데없는 상상을 할 시간에 뭐라도 하라는 조소를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의 영역에 진입한 자들은 모두 알고 있다. 한가로이 소설의 영감을 구상하는 시대, 소수의 독자 또는 자기 만족을 위한 글을 쓰기에는 그들의 삶이 너무 보잘 것 없고 짧다는 것을. 한때는 무모한 이상을 좇기도 했으나, 현실과 타협하면서 그 꿈을 포기하는 이름 없는 작가가 얼마나 많은지 아는 이들은 멸종 위기 직전인 순수 소설가의 생태에 한숨을 쉴 뿐이다.


 나에게 잭 런던은 소설이 이상이 아닌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쳐 준 소중한 작가들 중 한 명이었다. 알베르 카뮈, 조지 오웰 등의 20세기에 나타난 걸출한 문인들은 문학이 현실 도피나 이상의 맹목적인 추구가 아닌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요, 사회를 비판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잭 런던은 자신의 유성과도 같은 삶을 통해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인생을 걸어 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의 독자를 위해, 그들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소설가는 현실을 견뎌 내며 그가 겪었던 육체적 고통과 정신의 밑바닥을 드러낼 필요가 있음을, 그는 후기 과학 소설을 통해 드러냈다. 『암살주식회사』는 이러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미완성된 후기작으로, 완성되지 못한 비운의 수작이다. 


 2020년대 초반부터 영화, 드라마, 웹툰, 웹소설을 망라하는 주요한 트렌드는 이른바 '사이다 서사'로 불리는 '정의 구현'이었다. 악한 인물이 더 잔인하고 비열할 수록, 그들이 몰락하는 서사는 컨텐츠를 소비하는 이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느끼게 했다. 독자들과 시청자들은 악한 인물을 '참교육'하는 주인공에 감정 이입하며, 때로는 답답한 자신의 현실을, 때로는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절망적인 사회의 문제가 일시적으로 해소되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러한 정의의 구현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악한 이들은 대개 자신이 저지른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처벌 받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으로 악인을 심판하던 고대의 법전이 연상되는 전개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정말로 '정의'의 구현일까? 자신을 정의라고 포장하는 또 다른 악의 반복이 아닐까? 폭력을 저지르는 이들에게 폭력을 쓴다면, 그 폭력을 감행한 이는 어떻게 처벌해야 하는가?


 『암살주식회사』에서 잭 런던이 던지는 물음이 이런 것이다. 사회적인 악한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들이 얼마나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았는지 작가는 관심이 없다.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사회주의와 자연주의를 신봉했던 그에게 인간의 삶은 비루할 수밖에 없으니까. 암살주식회사를 운영하는 드라고밀로프는 죽어 마땅한 자를 죽여 달라는 청부를 받으면, 그 임무를 반드시 수행한다. 오늘날 액션 스릴러의 단골 소재인 '사적 제재'가 적극적으로 도입된 셈인데, 여기서 딜레마는 드라고밀로프와 그의 부하들은 "죽어 마땅한 자"의 범주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다. 드라고밀로프를 비롯한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그 신념에 휩쓸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세운 이상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기까지 한다. 누가 그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런던이 완성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비판을 잠시 하고 싶다. 런던이 만든 메모 등의 여러 가지 맥락으로 보아, 드라고밀로프의 오른손인 하스가 마차 사고로 죽는 결말은 지나치게 허무하다. 또한, 단체의 근간을 흔들었던 윈터 홀과 드라고밀로프의 딸인 그루냐의 사랑 이야기가 그녀의 아버지의 추적극과 따로 논다는 느낌이 강했다. 차라리 홀이든, 그루냐든 단체의 이상을 따라서 드라고밀로프를 독으로 살해하는 결말도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작가가 원래 의도했던 대로, 드라고밀로프가 죽이지 못했던 하스가 끝내 그의 상사를 처단하는 결말도 좋았을 것이다. 작가가 생전에 완성했더라면 분명 그의 주요한 작품들 중 하나가 되었을 텐데,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피시가 완성한 플롯도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지니고 있고, 『암살주식회사』가 지닌 근원적인 물음을 변질시키지도 않는다. 암살주식회사의 인물들은 현실보다 이상을 추구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사적 제재를 교묘하고 은밀하게 진행하는 일에 주력한다. 심지어 그들은 살해를 사고나 자살 등으로 위장하기 때문에 어떠한 사회적 영향력이나 파장도 일으키지 못한다. 결국 암살주식회사의 시작과 끝을 아무도 알지 못한 채로, 그들이 만든 이상의 왕국은 소용돌이에 휩쓸려 사라지고 만다. 현실을 전혀 바꿀 수 없는 이상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사람에게, 그들의 지식 수준이나 육체적 능력이 탁월한다 한들, 어떻게 희망을 걸 수 있을까? 드라고밀로프는 많은 부를 거머쥐고 있었으나, 그의 이상에 의해 사랑을 잃고, 동료를 잃었다. 신념의 차이로 동료를 죽이는 자를 나는 결코 옹호할 수 없다. 다르다면, 그대로 두어야 하고 존중해야 한다. 내 이상이 틀렸다면,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정당화하는 자는 어리석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쌓으면 쌓을수록 나는 이 땅에 주어진 현실을 감당해야 함을 느낀다. 궁극적인 이상과 비전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이상 속에서 사느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지나친 이상은 우리를 눈 멀게 한다. 그 안에 있으면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존재이며, 눈앞에 있는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만약 내 생각이 틀렸다면,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희망은 이상으로 현실을 덮는 속임수가 아니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으로부터 작은 희망은 출발한다.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복수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지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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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의 안경 - 쉽게 풀어 쓴 신국원의 기독교 세계관 이야기
신국원 지음 / IVP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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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 쉽게 설명해 주는 책. 쉬운 만큼이나 거기서 얻은 깨달음은 생각보다 쉽게 휘발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대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리를 알고자 했던 니고데모의 결단만큼은 기억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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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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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개 사회적 통념을 지적하는 책들은 열렬한 지지를 받거나, 격렬한 공격을 받는다. 하기야 "당신 생각이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는 책들에 마냥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 마이클 셸런버거라는 사람에 대해 들은 적도 없고, 서점에서 우연히 끌려서 구매한 것이라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도 했다. 리뷰를 쓰는 지금도 그의 주장에 부족한 점이나 논리적 허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다만, 종말론적 환경주의, 나아가 환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에 비판적인 나로서는 저자의 기획 의도에는 적잖이 동감하는 바이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나아가 지구를 지키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교과서나 공익 광고에서 배운 대로라면, 우리는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을 최대한 줄이고, 전기를 아껴 쓰며, 고기 섭취를 지양해야 한다. 얼마 전에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서 육식이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제로 한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채식주의자에 재활용품만 사용하는 아날로그 인간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지구를 지키는 데에 한층 더 기여하고 있을까? 슬프게도, 그것을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들도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빠르게 녹아가는 만년설과 한반도보다 커지는 쓰레기 섬, 몇 달씩 지속되는 산불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좌절되곤 한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가?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인류가 병들어가는 지구를 고치기에는 너무 늦었고, 지구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문명을 모두 뒤엎는 변혁이 일어나야 한다는 움직임이다. 그들의 행동 방식은 환경 파괴의 앞잡이로 여겨지는 육식, 도시 개발, 그리고 원자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각 장마다 그것들이 사실은 환상에 가깝다고 주장하며, 원전을 모두 해체하고 신재생 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들의 생각에 반박한다. 또한, 환경 보호를 내세우며 개발도상국이 성장하는 것을 원천에 차단하는 선진국의 위선을 고발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이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의 요지일지도 모른다. 왜 환경주의자들은 호화로운 전용기를 몰고 다니며 지구를 지켜야 한다고 부르짖는가? 어째서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의 도시화를 가로막는가? 그저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고야 마는 환경주의자들이야말로 지구를 진정으로 위험에 빠뜨리고 있지는 않은가? 어떤 이들은 걱정한다. 현재 농업, 어업 기반의 국가들마저 공업, 첨단 산업으로 전환하면 지구에 남아 있는 자원이 없지 않겠냐고. 식량 부족과 에너지 고갈로 현재의 인구가 그 생활을 영위할 수 없지 않겠냐고. 글쎄, 그걸 인식하는 사람들은 아마 기존의 편한 생활(언제든 온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환경, 원하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는 여건, 필요할 때만 일회용품을 쓸 수 있는 조건)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저자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개인의 힘으로 현재의 문화적 흐름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환경에 유해한 것들을 줄이려는 인식이 확산되면, 생산하는 기업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원자력에 대한 지나친 옹호도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사고가 날 확률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며, 한 번 발생하면 생태계에 반영구적인 손상을 주는 것이 원전인데, 조금 비효율적이고, 저자의 주장대로 친환경과 거리가 멀다 해도 신재생 에너지로의 도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재생 에너지가 도입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아닐까, 라는 기대도 든다. 그리고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대한 비판적 입장도, 저자의 지위를 고려했을 때 다소 정치적으로 보인다. 본래 "이것은 정치가 아니라, 교육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는데, 환경 휴머니즘을 주창하기에는 아직 보여준 것이 많이 없다. 두 번째, 세 번째 책에서 더 풍성한 논의가 나온다면, 그때 이 책을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은 자연(nature)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었다. 자연은 자기 통제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새로운 종이 탄생하고, 내지는 진화하고, 기존의 종이 멸종하는 것도 모두 자연의 일부이다. 기후와 지구 생태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도 점진적이고 순차적이다. 어떤 특정한 기간의 기후 변화를 놓고 '위기'나 '종말'을 언급하는 것은 지구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아무리 현상을 보존하려 해도, 특정한 종의 탄생과 절멸은 필연적이다. 이것을 인식한 이들은 인간의 시대가 다했다는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인류세'(anthropocene)의 개념을 도입하기도 했다. 요컨대, 인간을 생태계에 속한 일부로 보고, 그들이 멸종한 이후에는 새로운 종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주장이다.


 미래에는 어떤 시대가 도래할까? 그야 아무도 모른다. 기후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해서 전 세대가 조화롭게 풍요 속에 살아갈 수도 있고, 부족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파멸적인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과학 기술과 자연 환경의 균형이 유지될 수도 있고,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상태에 대해 우리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행성이다"라는 명제는 인간의 관점에서만 유효한 것이다. 지구는 그 명제를 증명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자기 만족을 위한 명제를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보라. 지구는 당신의 생존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지구를 지구스럽게 만들자. 해석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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