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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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타나베, 그는 단지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다. 상실의 시대에, 노르웨이의 숲 속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기 위해 방황한 것이다. 그리고 독자는 그가 그것을 찾았는지 알 수 없다. 거의 잊고 있었던, 와타나베의 '회상' 이야기는 단지 회상에 끝나기 때문이다. 그 과거의 기억이 현재와 어떤 상호교류를 맺고 있는지 저자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 호기심과 불확실함이 바로 『노르웨이의 숲』의 매력이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매력은 대립적인 이미지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즐거움과 교훈들이다. 우선 와타나베는 과거 속으로 파고들며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과거의 조각들을 연상해 간다. 그 과정은 규칙이나 의미가 없는 나열이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규칙성과 상징을 가지고 있는 사건과 '우연히', 그러나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가즈키, 나오코, '나', 세 사람 사이에 있었던 허물없는 우정은 가즈키의 부재로 인해 어색하고 불안정한 만남으로 바뀌게 된다. 비록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가즈키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해 발전하지 못한다. 결국 그것이 발목을 잡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이다. 하루키는 '상실'의 아픔이 얼마나 무서운지(그것이 또 다른 상실을 가져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숲 속에서 그가 아픔만 앓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도심 속에서 미도리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나오코와 완전히 다른 여자이다. 그녀는 와타나베에게 일종의 치유였다. 그녀는 와타나베에게 먼저 접근한 이후, 자신의 모든 감정과 삶을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며, 마찬가지로 와타나베의 삶과 감정 속에 파고들려고 한다. '나'의 입장에서 쓰여진 『노르웨이의 숲』은 그 과정을 유쾌하고 다정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제 3자인 나로서는 와타나베의 바람기로 보인 감도 있었다. 물론 그들은 서로의 순수함을 지켰고, 깊은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것은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관계도 미도리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은연 중에 두 여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젊은이의 모습을 우리에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치유의 과정은 두 사람 모두 아니었다. 두 여자는 거의 모든 것을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불안하고 위태로운 관계였다. 나오코는 이미 스스로도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미도리는 그것을 쾌활한 분위기에 감추어 언급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나오코가 요양해 있던 병원에서 와타나베와 만난 레이코라는 여자는 이 소설의 가장 신선한 충격이 아닐까 싶다. 나가사와 선배가 항상 와타나베와 함께 하려 하지만 주인공의 근처를 맴돌기만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면, 레이코는 만난 그 순간부터 끝까지 그의 마음 속으로 바로 달려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레이코는 또 다른 와타나베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만 할 뿐인데, 와타나베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를 바로 이해한다. 이 보이지 않는 능력이 『노르웨이의 숲』의 또 다른 원동력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한 사실일 것이다.

 

 그 유명한 대사,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지 않은 사람은 내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은 하나의 비유일 것이다.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진리를, 하루키는 설파하고 있다. 어떤 이가 한 남자의 진정한 친구인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가즈키인가? 항상 그와 어울리려고 하는 나가사와인가? 사랑하지만 상실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나오코인가?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와 공유하려고 하는 미도리인가? 아니면 공감을 통해 서로를 치유하는 레이코인가? 답은 각자가 찾아야 한다. 각자의 인물에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청춘인 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바로 나 자신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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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
나종일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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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 같은 책들은 소장하고 싶어하고, 또한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다. 물론 가격은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영국의 마그나카르타에서 유엔의 새천년선언까지 인류의 인권사를 선언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 페이지는 1500쪽을 상회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영한대역으로 되어 있어서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인권선언들을 한 편씩 읽어보면, 어느새 오늘날 우리가 보장받는 혜택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며 깨달은 점 중 하나는 인간의 잘 살고 싶어하는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대헌장 이전의 영국은 의회나 국민의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정사를 진행하는 국왕으로, 일부 특권층만 잘 살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평등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대헌장으로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다음, 인권은 점점 발달해간다(그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소설과도 같다). 대헌장의 시초가 된 영국을 예로 들면, 마그나 카르타로 의회와 국민의 권리를 보장받은 이후, 권리청원, 권리장전 등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는 인권선언이 등장했으며 이는 미국과 프랑스로 이어져 미국 독립 선언과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시초가 된다. 인권선언의 내용은 현대로 갈수록 중복된다. 이것은 한 번 선언한 것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사람들간의 합의이다. 즉, 이 선언들은 불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조항도 삭제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추가로 그것을 발전시킨다. 그것을 종합한 것이 바로 '빈 선언'과 '새천년선언'이다.

 

 흥미로운 점은 52가지의 인권선언들 중 낯익은 선언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공산당 선언』이다. 이 책은 원래 여러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거대하고 장엄한 책 안에서는 그저 하나의 선언에 불과하다. 공산당 선언은 책의 거의 중간에 위치해서 약간 단절된 듯한 과거의 선언과 현대의 선언을 이어준다. 이 다리 덕분에 우리는 세계인권사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을 시작으로 노예제 폐지, 노동자들을 위한 선언, 어린이의 권리선언,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선언, 여성의 평등에 관한 권리선언,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선언, 그리고 환경과 발전에 관한 선언.......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한 나종일 선생님도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사실 이 책은 후반으로 갈수록 익숙한 내용이 등장하여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라. 왜 그들이 이렇게까지 중복을 하며 강조하는가? 그것은 선언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선언은 하나의 약속이자 다짐일 뿐이다. 선언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유엔의 새천년선언을 우리가 지켰다면 지금쯤 지구촌은 전쟁없고 차별과 가난이 없는 지상낙원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현실은 13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52개의 선언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찾았다. 그것은 선언 이전에 행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행동이 없었다면 선언도 없다. 움직이지 않는 자는 말할 권리가 없다. 프랑스 국민들이 가만히 앉아서 시민의 권리를 부르짖었는가? 미국이 영국과의 분열 없이 독립 선언을 했는가? 영국이 국왕과의 전쟁 없이 의회와 국민을 위한 법을 제정했는가? 이제 움직일 차례이다. 그리고 또 다른 선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현재의 선언을 지켜야 한다. 이 인권사는 곧 선언의 역사이다. 우리의 행동은 곧 선언으로 기록된다. 앞으로 이 선언의 역사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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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글로 치유하는 법 - 위대한 작가들은 어떻게 삶의 혼돈을 정리하고 빛나는 순간들을 붙잡았을까?
바바라 애버크롬비 지음, 박아람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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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글쟁이들의 숙명인가. 여기서 글쟁이란 존경의 의미이다. 나는 아픔을 글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는다. 나는 글을 기분에 따라 쓴다. 저 위대한 자신의 의사들을 보니, 내 모습이 무척 초라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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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행복]으로 통한다. 혁신, 성공, 정의, 창의, 소통, 치유, 건강은 모두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행복`, 또는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함이 아닌가(나는 종교는 다르게 본다). 책 제목이 『인문학 카페 인생강의』인데, 결국 인생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누구의 행복이든. 물론 위에서 말한 저 일곱 가지가 설령 없다고 해도 행복은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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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페르노 2 로버트 랭던 시리즈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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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책이 댄 브라운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동안 『천사와 악마』나 『디지털 포트리스』로 대표되는 댄 브라운의 작품들이 다양한 매체를 타고 나에게 다가왔지만, 그 때마다 나는 망설였다. 두 권으로 나뉘어진 까닭에 필연적으로 생긴 가격의 부담뿐만 아니라 이 저자 역시 대중적인 통속 작가의 일부일 뿐이라는 선입견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스트 심벌』 때 많이 흔들렸지만, 그 때도 나는 나의 주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작가는 어떻게 해야 내가 자신의 소설에 끌려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불멸의 서사시『신곡』을 쓴 단테를 매우 좋아했고, 그를 더 알기 원했다. 그런데 댄 브라운이 '단테'를 소재로 한 방대한 스케일의 작품 『인페르노』를 쓴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고, 결국 댄 브라운 속의 세계로 들어갔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댄 브라운은 자신이 만든 세계 속에서 자신이 창조주임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술자는 그저 서술자의 역할만 충실할 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리지 않는다. 한 마디로, 나는 로버트 랭던을 따라가느라 서술자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몰입감 아니겠는가? 나처럼 '댄 브라운'이라는 작가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거나 낯선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도 이렇게 책 속에 빠져들게 하다니. 그의 능력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댄 브라운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까닭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그의 세계로 들어온 것 같다. 댄 브라운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많이 보이는, 로버트 랭던의 세계로.

 

 그러나 원초적으로『인페르노』에 접근한 것은 단테 때문이 아닌가? 저자는 마치 그의 흔적을 뒤따라가는 서술 방식을 사용한다. 단테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 남긴 유산, 그가 살았던 장소, 그에게 뜻깊었던 공간 등을 하나하나 훑는다. 『인페르노』는 단순히 랭던과 시에나의 도주극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단테 알리기에리의 작품과 그의 삶을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소개하는, 일종의 단테 안내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솔직히 나는 단테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소설 속에서의 독특한 시구 해석, 들어보지도 못한 단테 유적지 등을 보고 나니 사실 나는 그 시인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결론적으로, 『인페르노』는 단테의 세계와 댄 브라운의 세계가 공존한다. 단테의 '지옥'은 엄청난 상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류의 생사를 위협하는 화학물질의 위치는 그 거대한 지옥 속에 숨겨져 있다. 추격, 도주, 사랑, 배신, 오해, 화해, 희망이 오고가며, 우리는 단테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으리라. 사실 그는 지옥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요, 연옥과 천국의 행복만을 노래하고자 함도 아니었다. 그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랭던은 마치 단테처럼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인도자 시에나, 즉 베르길리우스를 만난 이후 그의 삶은 변화되었다. 아니, 시에나는 오히려 베아트리체를 연상시킨다.

 '이곳, 이날로부터 세상은 영원히 변했노라.' 랭던이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그 후부터,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댄 브라운은 수많은 은유와 에피소드를 담아 나와 랭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인류에 대한 색다른 해석, 역사의 특별한 분석도 매우 인상깊었다.

 

 당분간 이 지옥 이야기, 아니 희망의 노래는 내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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