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이야기 비룡소 걸작선 29
미하엘 엔데 지음, 로즈비타 콰드플리크 그림, 허수경 옮김 / 비룡소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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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는 이야기』에 존재하는 가장 큰 적은 사나운 괴물이나 미지의 존재가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도 아우린의 부적 앞에서 순종하며, 환상 세계의 인물인 아트레유와 현실 세계의 아이인 바스티안 사이의 갈등도 이야기를 마무리 짓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독자들이 미하엘 엔데가 펼쳐놓은 환상 속 이야기들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망각하는 사실은 무(無)가 그 자취를 감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스티안이 끝없는 이야기 안에 들어온 순간, 이야기는 시작되기 때문에 '무'가 끼어들 틈은 없다.


 이 작품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 상대방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음은 상대의 지난날을 이해하고, 현재를 공존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름은 이야기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작품의 마지막에 가서야 책방 주인인 코레안더 역시 환상 세계를 경험한 인물임이 드러나지만, 그에게는 환상 세계의 주인이자 어린 여왕의 이름이 '달 아이'가 아니었다. 즉, 그가 겪은 환상 세계는 바스티안이 상상한 세계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각 세계마다 원칙이 있고, 새로운 세계가 있다. 엔데는 모든 사람에게 본인만의 환상 세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야말로 끝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각 사람의 상상력을 들여다보는 작업은 정말 흥미롭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책을 읽고 싶어 했다. 어린 시절에는 두꺼운 책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반드시 저 책을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책방에 꽂혀 있던 이 매혹적인 제목의 책을 마음속에 오랫동안 담아두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약 15년 뒤에야 이루어졌다. 어른이 되어 읽는『끝없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과 비교해 보았을 때, 시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주요 소재인 '우로보로스'(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뱀)도 그렇고, 환상 세계 속의 소재들이 여러 신화에서 차용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환상 세계가 분명 매력적이고, 바스티안의 모험도 흥미진진하지만, 나는 그 세계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을 인식했다. 나는 더 이상 책 속 세상으로 도피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물론 한 번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은 적은 없다. 이야기를 탐험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바스티안처럼, 누군가에게 이야기는 훌륭한 피난처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야기의 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야기에 대한 갈망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책들을 읽었고,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지만, 나는 여전히 미숙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무'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기를 바랐고, 무지로 인한 실수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읽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분명히 안다. 그리고 가상의 이야기인 소설과 실제의 삶 중에 나는 더 재미 있는 쪽을 선호하는 편이다.


 환상 세계에서 수많은 여정을 겪었지만, 바스티안은 단 하루만큼 성장했을 뿐이다. 현실에서 그의 변화를 증명하려면,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한다. 환상 세계의 나머지 부분은 아트레유가 채워줄 것이다. 만약 끝없는 이야기를 완성하고도, 현실 속의 '무'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의 여정은 헛된 것이다. 그의 삶에 남아 있는 관계의 공허함, 소통의 부재는 그 스스로 채워야 한다. 아버지와 소중한 하루를 보내고, 코레안더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나면, 바스티안에은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 물론 그 방식은 환상 세계와 다를 것이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라는 이유로 제멋대로 행동하고 판단했지만, 현실에서는 그 역시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인식, 때로는 내가 기꺼이 생명의 물을 가져다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또 다른 주인공을 위한 초석을 마련해야 함을 인정하는 순간이 성장이 시작되는 때이다. 만약 당신이 세상의 중심에 놓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를 시작해 달라. 그 자리에 '무'가 자리잡지 않도록, 그 안에 누군가가 들어올 여지가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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