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 외 7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4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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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렸을 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대표작은 단연 『보물섬』이었다. 보물을 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고, 권선징악의 결말을 가지고 있는 소설은 아이들에게 읽히기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스티븐슨의 진가는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유명한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원작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가 『보물섬』을 쓴 사람과 동일하다는 것을 배웠을 때, 꽤 당황했다. 스티븐슨이 낭만과 도덕을 동시에 챙기려 하다 보니 인물의 복잡함을 포기하는 작가라고 생각했지만,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야기에 드러난 복잡하고 치밀한 인물의 심리는 도덕성의 굴레에 한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작품집은 낭만과 도덕 사이에서 고뇌하고 실패하는 인간상을 사실적으로 담은 단편을 골랐다. 작품의 편집을 맡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스티븐슨에 대한 탁월한 이해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티븐슨은 『신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본인만의 이야기집을 만들었는데, 그중 대표격인 「자살 클럽」을 선별한 것도 괄목할 만하다. 그의 소설들은 낯선 세계(이 작품집에서는 주로 남태평양 제도로 제시된다)를 모험하는 낭만과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야 할 인간의 도덕을 함께 등장시킨다. 작가는 계속 변하는 상황과 그에 따라 혼란을 겪는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래서 한 편 한 편을 볼 때마다 짧은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역동적이다. 


 인상적인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역시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나는 뮤지컬로 유명한 이 작품의 다른 버전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 원작의 내용이 지킬과 하이드에 대해 아는 전부이다. 당사자가 아닌 어터슨 씨의 시점으로, 추리소설처럼 진행되는 소설의 구조는 상당히 흥미롭다. 그리고 서서히 밝혀지는 지킬 박사의 죽음과 하이드의 행적에 대한 전말은 그들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매우 충격적이다. 익명성 또는 타자의 신원을 이용하여 도덕적 해이를 저지르는 하이드의 모습은 현대인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새로운 기술에 대해 검토하지 않고 수용하는 태도는 반드시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소설의 어조는 당시 빅토리아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목소리였다. 여러 모로 스티븐슨의 소설들은 저평가되었다. 단순히 흥미로운 소재를 사용했다는 것, 이야기의 구조가 탄탄하다는 것 말고도 복잡한 심리 묘사에 능통하다는 것 역시 그의 장점이다. 


 기억에 남은 단편을 또 하나 선택하라고 하면, 「악마에 깃들인 병」을 선정하겠다. 이 소설은 스티븐슨의 작품 중 대표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소재에 비해, 이야기가 평면적이고 결말이 다소 맥 빠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설정부터 보자면, 악마가 깃든 병이 전설처럼 내려오는데, 이것을 보유한 사람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다. 대신 처음에 샀던 가격보다 싼 값에 팔지 못하면, 그 병은 반드시 주인에게 돌아온다. 또한, 죽는 순간에 이 병을 가지고 있는 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주인공 케아웨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처럼 그것을 사용하지만, 악마는 지니와 달랐다. 순식간에 소원을 이뤄주는 요정과 다르게, 악마는 누군가의 불행을 이용하여 소원을 이루어준다. 하와이에 아름다운 집을 가지고 싶다는 소원을 빌자, 그 땅을 지닌 친척이 사고로 죽음으로써 원하는 바가 실현된다. 케아웨는 그 병을 어떻게든 처분하고 싶어서 애를 쓰지만, 가격이 너무 낮아져서 병을 파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든, 나는 단편소설을 읽으며 "나에게 이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순간의 유혹에 사로잡혀 악마와 거래할 텐가, 아니면 고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거절할 텐가?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테지만, 인생이 언제나 뜻대로 흘러가던가? 섬뜩한 생각이 등골을 스친다.


 전반적으로 스티븐슨의 소설은 인간의 밑바닥에 있는 심리를 잘 이끌어낸다. 마지막에 수록된 「자살 클럽」 역시 정말로 자살을 원하는 사람들만 모이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한 호기심이나 오해로 그 곳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다. 이 소설에는 특히 당대 시대의 사회상에 대한 비판도 곳곳에 담겨 있다. 아무래도 남태평양 제도나 하와이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낭만을, 영국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도덕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그의 소설들은 낭만이나 도덕이라는 주제로 모든 것을 나눌 수 없다. 낭만과 도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인간의 욕망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들의 모험에 동참하다 보면, 어느새 선택의 기로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사고실험은 어떻게든 당신의 앞날에 기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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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의 교육 - 개정판 한길그레이트북스 135
크세노폰 지음, 이동수 옮김, 정기문 감수 / 한길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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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는 달리, 이 책은 키루스가 이름값 있는 스승으로부터 지혜를 전수받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황제 키루스가 제국을 세우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중 플라톤의 입김에 가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크세노폰과 알렉산더 제왕의 명성에 드리워진 키루스는 역사 속에서 한결된 이야기를 전한다. 그속에 시대를 뛰어넘은 가르침이 숨겨져 있다. 


 물론 키루스의 전술 및 대형 배치 등은 전쟁학자나 고고학자에게 꽤나 유용한 정보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전쟁과는 거리가 먼 일반 독자로서 『키루스의 교육』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명료하다. 군주 키루스가 어떻게 훌륭한 사람이 되어 가는지, 그의 성장 과정을 차근차근 지켜보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정도의 위대한 학자를 스승으로 둔 적이 없었다. 따라서 키루스는 스스로 배워야 했다. 직접 전투를 지휘하고,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모습에서 교훈을 얻기도 한다. 독자는 키루스가 황제로 거듭남과 동시에 어엿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관찰할 수 있다.


 전체적인 인상을 계속 논하기보다는 기억에 남았던 몇 가지 구절을 기록하고자 한다. 그가 깨달았던 내용이 곧 미래의 독자에게 전해진다. 세상에 대한 지식이 완전하지 않았던 시대에, 키루스가 남긴 단상은 나름대로의 보편성을 확보한다. 키루스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아라스파스로부터 수사인 아브라다타스의 아내에 대한 말을 듣는다. 그 여자는 다른 시녀들과 똑같은 옷을 입었지만, 아라스파스는 천막에 들어가는 순간 귀부인의 미모와 기품으로 그녀를 알아본다. 그리고는 키루스에게 반드시 아브라다타스의 아내를 직접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키루스가 그것을 거절하자, 아라스파스는 인간이 자유의지로 사랑을 결정할 수 있으니 일단 보고 판단하라고 조언한다. 그러자 키루스가 대답한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자유의지의 문제라면 언제든 자신이 원할 때 사랑을 그만두는 것도 가능해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 노예처럼 얽매이는 경우를 자주 본다네.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그런 얽매임이 아주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말이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쉽게 내놓기 어려운 많은 물건을 상대방에게 선물하는 것을 보았네. 게다가 나는 사람들이 마치 다른 질병에 걸렸을 떄처럼 사랑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네. 그럼에도 사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쇠사슬에 묶인 것보다 더 강한 필연으로 묶여버리고 말지. (p. 252)


 여기서는 그가 목격했던 사람들로부터 얻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렇지 않게 된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만, 결국은 사랑의 구속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에 진심으로 기뻐한다. 이 신비한 원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러한 구절을 고대 역사서에서 발견한 것은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키루스의 인간성이 드러나는 대목은 후반부에 여러 차례 나오는데, 그 중 대표적인 부분이 가다타스를 돕자고 동맹국의 장교를 불러놓아 설득하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나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가다타스에게 우리가 진심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공정한 일이라고 생각하오. 그것은 우리가 감사의 빚을 갚는 일인 동시에 올바른 일이기도 하오. 게다가 그 일은 우리 자신들에게 큰 이득을 가져다주는 일이기도 하오. 우리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 피해를 배로 되갚아준다면, 또한 우리에게 은혜를 준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 은혜를 배로 되돌려준다면 많은 이들이 우리의 친구가 되려고 하지 우리의 적이 될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오. (p. 273)


 이후 제국을 세우는 과정, 그리고 제국을 유지하는 정책 등에서 키루스의 지혜가 드러난다. 그는 언제나 누군가를 희생시키기보다 모두가 잠시 힘들더라도 함께 과업을 이루는 방식을 추구했다. 역사상 황제들이 큰 나라를 세우기 위해 자주 택했던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방식을 그는 거부한다. 그가 행군에 대비해 병사들을 적응시키고 보급품을 일일이 챙기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실용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인지 보여준다. 후에 방대한 제국을 세우고 나서는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말이 최대로 갈 수 있는 지점마다 역을 설치하고 관리자를 배치한다. 이렇게 볼 때는 참으로 근대적인 발상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업을 이룬 키루스가 죽음을 앞두고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키루스는 자신이 겪었던 고충과 실패를 모두 지혜로 전수하는 데에 힘쓴다. 과연 그에게 경험은 최고의 스승이었다. 내가 이렇게 앉아서 키루스가 들려주는 인생 수업을 편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캄비세스, 너는 너의 제국을 유지하는 것은 이 황금 왕홀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군주가 가진 가장 참되고 확실한 왕홀은 바로 충직한 친구들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연적으로 충직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또 우리 모두가 자연의 다른 속성이 늘 같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같은 사람이 항상 충직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너는 네 친구들이 스스로 충직하게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런 친구를 얻는 것은 강요가 아니라 친절을 통해서만 가능하단다. (p. 439)


 훌륭한 경영자는 직접 부딪히기도 하고, 고전을 읽음으로써 교훈을 적용한다. 왜 우리가 몰락한 나라의 군주들을 보아야 하는가? 때로는 우리가 누군가를 다스려야 하고,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또는 다른 영역에서 그러한 순간이 온다. 키루스가 제국을 세운 지 한참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을 다스리는 일은 어렵다. 사랑을 스스로 제어하는 것도 여전히 불가능하다. 독서가 간접 경험이라고 입이 닳도록 듣지 않았나. 그리고 모두에게 경험은 최고의 교육이지 않던가? 새삼스레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다니, 어색한 기분이 든다. 한 권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 "상대는 이 책을 읽지 않았다"고. 그러므로 나는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또 다른 경험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인생은 끝없이 즐거운 여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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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5
제프리 초서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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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의 영문학 작품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영문학을 시작하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들으면, 몇 가지 후보가 떠오른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이다. 현대 영문학이라는 거성의 시작점이 된다고 평가받는 이 운문집의 내용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토머스 베켓의 묘소를 참배하고, 기도하기 위해 캔터베리로 가는 순례자들이 재미를 위해 이야기를 준비해서 들려주는 형식이다. 어떤 이는 정말로 재미있는 설화를 가져오고, 어떤 이는 다른 이의 말을 반박하느라 바쁘고, 또 다른 이는 다소 따분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페스트로 흉흉한 바깥 세상에 대한 시름도, 순례의 고단함도 잠시 잊을 수 있다. 


 영문학도로서, 『캔터베리 이야기』는 소설이나 시라는 하나의 장르로 분류하기 어려운 입문서이다. 또한,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중세부터 근대의 영문학은 종교적, 신화적 주제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영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성경, 그리스 철학과 신화를 어느 정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학부 과정에도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그리스의 비극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을 영문학의 시작으로 접하는 이들은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교리와 신화의 내용이 어렵거나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 살았던 이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듯한 『캔터베리 이야기』에서도 가장 인상깊은 이야기들을 꼽자면, 베스 여인의 이야기와 옥스퍼드 서생의 이야기이다. 이 두 이야기는 여러 판본으로 존재하는 초서의 작품을 추릴 때, 항상 언급되며 영문학 수업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서사들 속에서도 단연 드러나는 주제는 역시 '사랑'과 '결혼'인데, 그것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당시 여성을 대하는 시선이나 결혼 제도의 모습이 묘사된다. 어른들 간의 대화다 보니, 성적인 표현이 거침없이 등장하기도 하며, 은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로 그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두 이야기 모두 초서의 독자적인 창작은 아니다. 당대에 유행했던 설화나 전설을 각색한 것이기에 그 내용을 여기에 모두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다소 극단적인 형태의 사랑이 환상적 요소와 결합하여 나타났기에 다른 이야기들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진정한 사랑을 맹세하고 나서야 추한 노파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는 베스의 여인의 이야기나, 그리셀라의 헌신과 무조건적인 복종이 보상받는 이야기 등은 오늘날 독자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언짢은 요소가 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캔터베리 이야기』 전체를 읽을 자신이 없다면, 4부까지 수록된 이야기들에 대해 토론을 벌여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 책은 이야기 모음집이기 때문에 각 서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뿐더러, 수사의 이야기로 들어서면 상당히 따분해지기 때문이다(물론 앞의 이야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의미이다).


 초서가 이 작품집을 만들 당시보다 시대가 아주 많이 변했다. 21세기 한국에 사는 독자가 이 책을 무작정 읽는 것은, 영문학의 시작점이라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권장사항이 아니다. 영문학사에 유명한 셰익스피어조차 막상 책을 펼쳐보면 난해한 대사들이 난무하지 않은가. 그들의 사상과 생활 양식을 배우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물론 책을 통해 먼저 배우는 것도 가능하다. 내 입장에서는 이것 역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지와 비슷하다. "책을 통해 문화를 배우는 것이 먼저일까, 문화를 배우고 책을 읽는 것이 먼저일까?"라는 문제 말이다. 대답은 독자가 처한 상황에 달려 있다. 영문학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캔터베리 이야기』를 택했다면, 충분히 사전 지식을 공부하고 올 것을 권한다. 하지만 가볍게 즐길 목적으로, 또는 일부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면 편한 마음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이야기는 즐거우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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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텍 SF 어워드 수상작품집 No.1 - 2021_2022
김한라 외 지음 / 아작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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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이 압도적으로 발전한 이 시대에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한 학생이 물었다. 평소에 과학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학생이어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의외였다. 나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묻고 싶구나. 문학은 무엇을 해 왔을까? 그것이 어떤 대단한 업적을 이룬 적이 있을까?"

 "결정적으로 기여한 적은 없죠. 언제나 보조하는 역할이었어요." 

 역사에 관심이 많은 다른 학생이 끼어들었다. 

 "딱히 반박하지는 못하겠구나. 그동안 문학은 과학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분야로 여겨졌거든. 문학은 증명하려고 하는 순간, 그 의미를 잃는 학문이야. 반대로 과학은 증명하고 인정을 받아야만 가치를 얻어. 그렇기 때문에 과학에 비해 문학이 쓸모없어 보일 수도 있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내가 대답했다. 어느새 모든 학생들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시중에 과학소설들이 참 많이 출판되었어. 내가 최근에 읽은 책은 포스텍 SF어워드에서 수상한 단편소설집인데, 너희에게 소재를 소개할게. 머리 이식, 차원실험연구소, 자동 노동, 우주 청소기, 가상 세계, 언어고고학자, 외딴 섬 뉴런, 이세계로 통하는 구멍, AI 면접, 축소 기계, 광합성을 하는 인간. 어때? 재미있어 보이지 않아?"

 "몇 개는 처음 듣고, 몇 개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아요." 

 처음에 질문했던 학생이 대답했다. 

 "바로 그거야. 우리는 어느새 과학소설의 소재에 익숙해져 있어. 세상이 그만큼 인간의 상상대로 움직였기 때문이야. 조만간 차원실험, 자동 노동, 우주청소기, 그리고 온라인 면접에 대해 논의하는 시기가 오겠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참 작가들이 유쾌하다는 거였어. 기술의 발전이 언제나 바람직한 현상만 가져오지는 않잖아. 소설들은 그 양면성에 대해 무겁게 다가가기보다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접근해. 그래서 오히려 더 생각할 거리를 주지." 

 "선생님은 아름다운 게 좋아요, 웃긴 게 좋아요?"

 "나는 전달에 너무 힘을 주면 부담스럽더라고. 심사평에도 나왔지만, 이야기는 설득하려거나 논평하려 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보여질 때 가장 효과적인 법이야. 그래서 「잇츠마인」이랑 「리버스」가 기억에 남아. 두 작품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기숭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야. 처음에는 그 효용성과 부작용에 대해 걱정해서 시도하지 않다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용하니까 덩달아 쓰게 되거든. 나중에 가서는 자동 노동 서비스와 제2의 인생을 사는 가상 세계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이 시대에 뒤처진 사람으로 취급 받아. 변화하는 시대에 휩쓸려야 하는 게 우리의 숙명일까? 이런 생각이 되게 많이 들었어." 

 "의외네요."

 역사를 좋아하는 남학생은 무미건조하게 반응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휴대전화가 없어도 친구들과 잘 어울렸어. 이제는 스마트폰이 없으면 친구들과 노는 건 물론, 일상생활에도 지장이 많지. 어린 학생들도 기술에 의지해야 숙제를 해 올 수 있고, 다른 학생들과 효율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 이게 나쁘다는 게 아니야.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그 변화가 부담스러운 사람들도 있겠지만, 혼자 외딴 섬처럼 떨어져 있으면, 그대로 고립되고 말아."

 "시간이 멈춘 사람들처럼요?" 

 "그렇지." 

 나는 처음 질문했던 학생에게 대답하고 나서 잠시 멈칫했다.

 "「어떤 사람의 연속성」을 읽은 거야?" 

 "아뇨. 차원실험연구소라는 단어를 듣고 나니 다양한 생각이 났어요. 분명 시간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겠다, 추측이 되더라고요."

 "과학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아?"

 "시간과 차원에 관한 영상을 우연히 봤어요. 갑자기 궁금해지더라고요."

 "「어떤 사람의 연속성」은 차원실험을 하다가 시간이 정지한 재난에 대한 이야기야. 주인공은 4차원을 넘나들 수 있는 존재고. 알고 보니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 더 높은 차원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3차원인 이 세상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인 거래. 차원에 대한 접근이 정말 흥미로운 소설이었어."

 "그런 소설들이 현실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은 나와 이 학생뿐이었다. 

 "놀랍겠지.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꽤 단순하게 묘사돼. 놀랍도록 멍청하게. 하지만 현실은 복잡해.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거야. 이 소설들은 단지 가능성만 보여줄 뿐이야. 유쾌한 상상을 우리가 이루는 순간, 변화는 시작돼. 설령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그냥 상상만 해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단 말이에요?" 

 "확대 해석은 금지야. 문학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천차만별이야. 위대한 이야기는 없어. 위대한 독자만 있지. 너는 어떻게 할래?" 

 "도전해 볼게요. 읽은 책이 많지 않아서 자신은 없어요."

 "그래, 이제 공부해라."

 수업 시간이 거의 끝나갔다. 딱히 후회는 없었다. 앞으로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성심을 다해 대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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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서의 죽음‧토니오 크뢰거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6
토마스 만 지음, 김인순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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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어난 소설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대답은 저마다 다르다. 대체적으로 훌륭한 작가의 기준은 현실을 얼마나 그대로 반영했는지, 또는 사회의 문제에 대해 어떤 대안을 제시했는지, 아니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로 결정된다. 토마스 만의 작품은 마지막 특성에 있어서 독보적인 영역을 지닌다. 자전적 체험과 평소에 지닌 생각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이루어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공감 또는 감정의 해방(카타르시스)을 경험하며 강한 인상을 남기게 된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은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에 대한 '끌어내기'의 작업을 정교하게 설계한다. 그의 세계에 진입하는 이는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 자신의 의식으로 전이되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토니오 크뢰거』 역시 좋은 작품이지만, 처음으로 읽었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 나에게는 조금 더 인상 깊었다. 두 작품 모두 예술가의 숙명적인 고민을 다루고 있지만, 후자가 한층 더 보편적인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예술가에 한정된 토니오 크뢰거의 갈등은 보편성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 『베네치아의 죽음』은 사랑하는 자의 마음을 끈질기게 추격하여 어떤 인상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 더구나 콜레라가 주는 불길한 인상과 다가오는 재난 등은 여전히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전염병의 존재를 애써 숨기려는 당국과 사람들에게 서서히 퍼지는 불안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잠시나마 생각나게 했다. 


 『토니오 크뢰거』의 대표적인 장면은 "문학은 절대 직업이 아니라 저주"라는 토니오의 선언이다. 토마스 만은 모든 작가들이 거쳤던 딜레마를 서슴치 않게 내뱉는다. 시민성과 예술성의 대립은 단순히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의 고민을 뛰어넘는 무엇이다. 이를 테면, 작가는 남들과 어떻게든 구별되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 외로움이나 가난함 따위는 얼마든지 감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말이다. 어떤 작가는 자신 속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스스로를 세상과 격리하거나 단념하고, 어떤 이는 사회와 타협하다 못해 처음에 지녔던 의식을 상실한다. 대부분의 창작자는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겨내야 한다. 이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필연적인 긴장감과 두려움을 저주의 굴레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토마스 만은 조금 더 솔직한 마음을 택하지 않았나 싶다. 어떻게 자신의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있을까? 작가는 치유받기 위해 글을 쓰는 법이다. 고통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나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서사를 보면서 지나친 자의식은 독이라는 생각도 했다. 아셴바흐는 전염병에 의해 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잡아먹혔다. 그에게는 충분히 베네치아를 떠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타지오가 없는 삶은 그에게 죽음과도 같았다. 과도한 지식은 인간을 병들게 한다. 차라리 그가 아무 것도 몰랐더라면, 잃을 것이 없었다면 조금 더 적극적일 수 있었을 텐데. 그가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는 스스로의 생각에 갇혀 있었다. 타지오와 대화를 몇 마디라도 나누었다면, 아셴바흐가 가진 집착은 사그라졌으리라.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사랑받는 자의 마음속에 신을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결국 그 작가는 스스로를 넘어서지 못했다. 


 섬세하고 여린 두 작가의 이야기가 보편성을 확보하려면, 끌어내기의 과정에 동참해야 한다. 예전에 나는 어떤 책을 읽을 때, 특히 소설을 읽을 때 특정한 교훈을 얻기 위해 부던한 노력을 해왔다. 그 교훈 한 줄이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라고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작품 안에 나의 감정을 담아내거나 끌어내는 작업 자체가 유의미함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글쓰기를 통해 치유되는 존재는 작가 자신임을 인지한 순간부터였다. 소설을 읽는 순간 머리를 스치는 찰나의 깨달음과 느낌도 시간이 지났을 때 나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곤 한다. 독서와 창작은 고통을 수반한다. 누군가의 세계에 침투하는 것도,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도 쉬운 여정은 아니다. 하지만 피와 눈물을 흘리고 나서 돌아보았을 때, 내가 걸었던 길은 누군가가 잘 따라올 수 있게 잘 닦여 있기 마련이다. 그 기쁨이 모든 시름을 능가하기에, 나는 기어이 아픈 길을 걷고자 하는 것이다.

인식은 타락일세. 그래서 우리는 단호하게 인식을 배척하고, 오로지 아름다움, 다른 말로 표현ㅇ하자면 단순함과 위대함과 새로운 근엄함, 제2의 자연스러움과 형식만을 얻으려고 줄곧 노력할 뿐일세. - P135

너처럼 푸른 눈을 가질 수만 있다면. 토니오는 생각했다. 너처럼 모든 세상과 잘 지내며 행복하게 어울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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