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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 이야기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15
제프리 초서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2월
평점 :
"최고의 영문학 작품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영문학을 시작하려면 어떤 책을 읽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들으면, 몇 가지 후보가 떠오른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이다. 현대 영문학이라는 거성의 시작점이 된다고 평가받는 이 운문집의 내용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 토머스 베켓의 묘소를 참배하고, 기도하기 위해 캔터베리로 가는 순례자들이 재미를 위해 이야기를 준비해서 들려주는 형식이다. 어떤 이는 정말로 재미있는 설화를 가져오고, 어떤 이는 다른 이의 말을 반박하느라 바쁘고, 또 다른 이는 다소 따분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페스트로 흉흉한 바깥 세상에 대한 시름도, 순례의 고단함도 잠시 잊을 수 있다.
영문학도로서, 『캔터베리 이야기』는 소설이나 시라는 하나의 장르로 분류하기 어려운 입문서이다. 또한,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 중세부터 근대의 영문학은 종교적, 신화적 주제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영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성경, 그리스 철학과 신화를 어느 정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학부 과정에도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그리스의 비극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을 영문학의 시작으로 접하는 이들은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교리와 신화의 내용이 어렵거나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 살았던 이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단편소설을 모아놓은 듯한 『캔터베리 이야기』에서도 가장 인상깊은 이야기들을 꼽자면, 베스 여인의 이야기와 옥스퍼드 서생의 이야기이다. 이 두 이야기는 여러 판본으로 존재하는 초서의 작품을 추릴 때, 항상 언급되며 영문학 수업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을 오가는 서사들 속에서도 단연 드러나는 주제는 역시 '사랑'과 '결혼'인데, 그것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당시 여성을 대하는 시선이나 결혼 제도의 모습이 묘사된다. 어른들 간의 대화다 보니, 성적인 표현이 거침없이 등장하기도 하며, 은어를 비롯한 다양한 언어로 그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두 이야기 모두 초서의 독자적인 창작은 아니다. 당대에 유행했던 설화나 전설을 각색한 것이기에 그 내용을 여기에 모두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다소 극단적인 형태의 사랑이 환상적 요소와 결합하여 나타났기에 다른 이야기들보다 훨씬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진정한 사랑을 맹세하고 나서야 추한 노파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했다는 베스의 여인의 이야기나, 그리셀라의 헌신과 무조건적인 복종이 보상받는 이야기 등은 오늘날 독자의 시선으로 보기에는 언짢은 요소가 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캔터베리 이야기』 전체를 읽을 자신이 없다면, 4부까지 수록된 이야기들에 대해 토론을 벌여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이 책은 이야기 모음집이기 때문에 각 서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뿐더러, 수사의 이야기로 들어서면 상당히 따분해지기 때문이다(물론 앞의 이야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의미이다).
초서가 이 작품집을 만들 당시보다 시대가 아주 많이 변했다. 21세기 한국에 사는 독자가 이 책을 무작정 읽는 것은, 영문학의 시작점이라 평가받음에도 불구하고 권장사항이 아니다. 영문학사에 유명한 셰익스피어조차 막상 책을 펼쳐보면 난해한 대사들이 난무하지 않은가. 그들의 사상과 생활 양식을 배우는 것이 먼저일지도 모른다. 물론 책을 통해 먼저 배우는 것도 가능하다. 내 입장에서는 이것 역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지와 비슷하다. "책을 통해 문화를 배우는 것이 먼저일까, 문화를 배우고 책을 읽는 것이 먼저일까?"라는 문제 말이다. 대답은 독자가 처한 상황에 달려 있다. 영문학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캔터베리 이야기』를 택했다면, 충분히 사전 지식을 공부하고 올 것을 권한다. 하지만 가볍게 즐길 목적으로, 또는 일부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면 편한 마음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아무튼 이야기는 즐거우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