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
나종일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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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등의 인권선언 문서집』 같은 책들은 소장하고 싶어하고, 또한 소장 가치가 있는 책이다. 물론 가격은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영국의 마그나카르타에서 유엔의 새천년선언까지 인류의 인권사를 선언을 통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 페이지는 1500쪽을 상회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영한대역으로 되어 있어서 그렇게 길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 날 때마다 인권선언들을 한 편씩 읽어보면, 어느새 오늘날 우리가 보장받는 혜택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며 깨달은 점 중 하나는 인간의 잘 살고 싶어하는 욕구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대헌장 이전의 영국은 의회나 국민의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정사를 진행하는 국왕으로, 일부 특권층만 잘 살고 나머지 사람들은 불평등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대헌장으로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다음, 인권은 점점 발달해간다(그 과정은 마치 한 편의 소설과도 같다). 대헌장의 시초가 된 영국을 예로 들면, 마그나 카르타로 의회와 국민의 권리를 보장받은 이후, 권리청원, 권리장전 등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는 인권선언이 등장했으며 이는 미국과 프랑스로 이어져 미국 독립 선언과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의 시초가 된다. 인권선언의 내용은 현대로 갈수록 중복된다. 이것은 한 번 선언한 것을 영원히 지키겠다는 사람들간의 합의이다. 즉, 이 선언들은 불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조항도 삭제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추가로 그것을 발전시킨다. 그것을 종합한 것이 바로 '빈 선언'과 '새천년선언'이다.

 

 흥미로운 점은 52가지의 인권선언들 중 낯익은 선언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바로 『공산당 선언』이다. 이 책은 원래 여러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거대하고 장엄한 책 안에서는 그저 하나의 선언에 불과하다. 공산당 선언은 책의 거의 중간에 위치해서 약간 단절된 듯한 과거의 선언과 현대의 선언을 이어준다. 이 다리 덕분에 우리는 세계인권사의 흐름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청구권, 사회권을 시작으로 노예제 폐지, 노동자들을 위한 선언, 어린이의 권리선언,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선언, 여성의 평등에 관한 권리선언,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선언, 그리고 환경과 발전에 관한 선언.......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한 나종일 선생님도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사실 이 책은 후반으로 갈수록 익숙한 내용이 등장하여 지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라. 왜 그들이 이렇게까지 중복을 하며 강조하는가? 그것은 선언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선언은 하나의 약속이자 다짐일 뿐이다. 선언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유엔의 새천년선언을 우리가 지켰다면 지금쯤 지구촌은 전쟁없고 차별과 가난이 없는 지상낙원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현실은 13년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52개의 선언에서 중요한 공통점을 찾았다. 그것은 선언 이전에 행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행동이 없었다면 선언도 없다. 움직이지 않는 자는 말할 권리가 없다. 프랑스 국민들이 가만히 앉아서 시민의 권리를 부르짖었는가? 미국이 영국과의 분열 없이 독립 선언을 했는가? 영국이 국왕과의 전쟁 없이 의회와 국민을 위한 법을 제정했는가? 이제 움직일 차례이다. 그리고 또 다른 선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현재의 선언을 지켜야 한다. 이 인권사는 곧 선언의 역사이다. 우리의 행동은 곧 선언으로 기록된다. 앞으로 이 선언의 역사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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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페르노 2 로버트 랭던 시리즈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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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책이 댄 브라운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동안 『천사와 악마』나 『디지털 포트리스』로 대표되는 댄 브라운의 작품들이 다양한 매체를 타고 나에게 다가왔지만, 그 때마다 나는 망설였다. 두 권으로 나뉘어진 까닭에 필연적으로 생긴 가격의 부담뿐만 아니라 이 저자 역시 대중적인 통속 작가의 일부일 뿐이라는 선입견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스트 심벌』 때 많이 흔들렸지만, 그 때도 나는 나의 주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작가는 어떻게 해야 내가 자신의 소설에 끌려갈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불멸의 서사시『신곡』을 쓴 단테를 매우 좋아했고, 그를 더 알기 원했다. 그런데 댄 브라운이 '단테'를 소재로 한 방대한 스케일의 작품 『인페르노』를 쓴 것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고, 결국 댄 브라운 속의 세계로 들어갔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댄 브라운은 자신이 만든 세계 속에서 자신이 창조주임을 결코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서술자는 그저 서술자의 역할만 충실할 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리지 않는다. 한 마디로, 나는 로버트 랭던을 따라가느라 서술자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몰입감 아니겠는가? 나처럼 '댄 브라운'이라는 작가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거나 낯선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도 이렇게 책 속에 빠져들게 하다니. 그의 능력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아마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댄 브라운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까닭이 아닐까 싶다. 나 역시 그의 세계로 들어온 것 같다. 댄 브라운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많이 보이는, 로버트 랭던의 세계로.

 

 그러나 원초적으로『인페르노』에 접근한 것은 단테 때문이 아닌가? 저자는 마치 그의 흔적을 뒤따라가는 서술 방식을 사용한다. 단테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 남긴 유산, 그가 살았던 장소, 그에게 뜻깊었던 공간 등을 하나하나 훑는다. 『인페르노』는 단순히 랭던과 시에나의 도주극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단테 알리기에리의 작품과 그의 삶을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소개하는, 일종의 단테 안내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솔직히 나는 단테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소설 속에서의 독특한 시구 해석, 들어보지도 못한 단테 유적지 등을 보고 나니 사실 나는 그 시인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결론적으로, 『인페르노』는 단테의 세계와 댄 브라운의 세계가 공존한다. 단테의 '지옥'은 엄청난 상징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류의 생사를 위협하는 화학물질의 위치는 그 거대한 지옥 속에 숨겨져 있다. 추격, 도주, 사랑, 배신, 오해, 화해, 희망이 오고가며, 우리는 단테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으리라. 사실 그는 지옥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요, 연옥과 천국의 행복만을 노래하고자 함도 아니었다. 그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었다. 랭던은 마치 단테처럼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인도자 시에나, 즉 베르길리우스를 만난 이후 그의 삶은 변화되었다. 아니, 시에나는 오히려 베아트리체를 연상시킨다.

 '이곳, 이날로부터 세상은 영원히 변했노라.' 랭던이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그 후부터,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댄 브라운은 수많은 은유와 에피소드를 담아 나와 랭던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인류에 대한 색다른 해석, 역사의 특별한 분석도 매우 인상깊었다.

 

 당분간 이 지옥 이야기, 아니 희망의 노래는 내 기억 속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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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드 매치드 시리즈 3
앨리 콘디 지음, 송경아 옮김 / 솟을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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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제된 사회는 우리의 암울한 미래를 상징한다.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디스토피아'라고 불리는, 국가의 강력한 권력 앞에 사람들이 통제되고 조종되는 사회를 묘사한 바 있다. 대표적인 예로, 조지 오웰의 『1984』, 로이스 로우리의 『기억 전달자』, 영화로는 <매트릭스>, <브라질> 등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곳 안에서도 삶이 존재하는 것을 본다. 아무리 사람들을 통제한다 해도 그곳에는 사랑이 있고, 저항이 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담은 책이 바로 『리치드』다.

 

 앨리 콘디의 『리치드』 안의 디스토피아는 다른 매체에서 보았던 감시 사회와 많이 다르지 않다. 이 '소사이어티(흥미롭게도, 이 사회의 이름의 뜻이 바로 '사회'이다)'에서는 개인의 삶 전체가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고, 사랑조차 반려자로 정해준 이와 해야 한다. 이 불합리한 사회 밑에는 강력한 봉기 세력이 있다. 이 봉기 세력의 일원인 카시아는 소사이어티 소속인 카이와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들키는 날에는 양쪽 모두 무사할 수 없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는 듯한 아슬아슬한 연애는 전염병이 터지면서 크게 바뀌게 된다.

 

 소사이어티와 봉기 세력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습격하는 전염병 때문에, 둘의 사랑은 방해되기 시작했고 결국 직접 만날 수밖에 없다. 인도자를 앞세운 봉기를 틈타 두 사람은 마침내 만나게 되지만, 돌연변이 전염병 때문에 카이가 쓰러지게 된다. 다음 일을 예측할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까? 이 소설의 끝장을 덮게 되면,『리치드』는 결국 통제되는 사회와 죽음의 전염병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연인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임이 드러난다. 일단 카시아와 카이, 그리고 잰더를 화자로 하는 장이 번갈아 가면서 진행되는 형식만 보아도 그것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파란색, 붉은색 등 색깔이 상징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작가는 이 소설을 색채적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 도전이 성공적이라고 본다. 나는 이 책에 대한 평들 중에 "『기억 전달자』를 떠올려라. 하지만 더 섹시하다."라는 평을 가장 인상적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곳은 흑백의 세상이니까. 『리치드』는 『매치드』 시리즈의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고, 각각의 작품은 색깔을 가지고 있다.

 

 『리치드』는 붉은색이다. 나는 그것을 서로 만나고 싶어하는 연인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본다. 비록 나는 다른 시리즈를 보지 않았지만, 제목으로 그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1편 『매치드』는 'matched(만나다)', 2편 『크로스드』는 'crossed(엇갈리다)', 그리고 3편 『리치드』는 'reached(닿다)'이다. 마치 가문의 갈등처럼 어울릴 수 없는 두 세력, 봉기 세력과 소사이어티 사이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두 연인, 그들은 어떻게든 닿을 수 있기를 바랬으리라. 그 바람은 마침내 이루어졌고, 붉은 정원의 날의 약속은 성취되었다. 디스토피아의 결말이 해피엔딩일 수 있을까? 작가는 그 사회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 사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바꾸었다. 차이는 단지 그것뿐이지만, 그 차이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을 왜 나는 이제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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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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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눈먼 자들의 도시』가 나에게 준 파급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소설일 뿐이다. 위의 책은 하나의 우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나는 보게 되었다. 그것이 현실이자 역사임을. 『눈뜬 자들의 도시』는 『눈먼 자들의 도시』에 눈이 먼 나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후자가 내가 눈이 멀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면, 전자는 장님인 나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는 서로 정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눈먼 이들의 이야기가 가상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우화라면, 눈뜬 자들의 이야기는 그것이 4년 전에 일어난 전염병의 결과라는 역사이다. 나아가, 『눈뜬 자들의 도시』는 정치인과 경정의 심리와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의사의 아내를 중심으로 한 눈먼 시민들의 모습과 사뭇 대비된다. 무엇보다 그들은 눈이 멀었고, 이제는 눈이 뜨였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여전히 정부는 무기력하고 시민을 억압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사라마구는 자신의 작품 속에 언제나 자신의 정부와 국가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눈뜬 자들의 도시』의 출발점은 바로 그러한 저항에서 시작된다.

 

 선거에서 대부분의 표를 백지 투표로 낸 사람들이 발생한다. 투표의 익명성 때문에 누가 그것을 주도했는지, 어떤 이들이 거기에 가담했는지 알 수 없다. 정부는 계엄령을 발포하여 국가를 혼란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저자는 시민들에게 절대 다가가지 않는다. 사태를 해결하려고 회의를 하는 도중, 4년 전 국가에 창궐했던 백색 전염병에 대한 언급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다시 한 번 그 사태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론은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의사의 아내를 백지 투표의 주도자라는 것, 그리고 그녀가 살인자라는 것을 통해 그녀를 추궁하는 것이다.

 

 이런 어리석음을 행하는 자들이 바로 정부다. 그들은 여섯 명의 사람을 살린 영웅을 살인자, 반역자로 여기고 '마녀 사냥'을 했다. 결국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의사의 아내는 자살하고, 개 콘스탄테 역시 죽는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희망의 시작으로 끝난다면, 『눈뜬 자들의 도시』는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 여인에 대한 진혼곡은 『이름없는 자들의 도시』로 이어진다. 내가 후자의 작품을 보고 그 사실을 몰랐던 까닭은 『눈뜬 자들의 도시』를 보기 이전에 내가 장님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눈을 떴다. 우리가 정부를 바꿀 수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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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삼성 - 이건희, 그리고 죽은 정의의 사회와 작별하기
김상봉 외 지음 / 꾸리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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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만 전하는 메시지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삼성에게 지배당한지 오래다. 한 기업이 한 나라를 이렇게 '식민지' 삼는 것은 역사상 유례 없는 일이다. 이 기업의 회장은 대통령에 버금가는 권력과 부, 그리고 명성(어떤 방향으로의 명성인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업에 반란을 일으키는 세력의 등장을 아예 막는다. 사실 이것은 모든 독재자들의 공통적인 특징 아니겠는가? 독재자가 시민군에게 무기를 쥐어주는 경우는 없으니까. 이제 늙어버린 ㅎㅈ(회장, 아니 황제)은 자신의 권력을 자식에게 세습하여 통치를 이어가려고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 거대한 기업의 노예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 결국 우리나라 최고의 일류 기업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제국의 수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다. 이 삼성 제국에 들어가기 위해 5살부터 20살까지 15년 동안 우리의 유년, 청소년 시절을 소비하게 한다. 그러나 이 제국에 들어가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고, 사회는 이들을 성공한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패배자로 간주한다. 그리고 모든 문화는 이 제국에 의해 통제된다. 그러니까 국민은 두 강력한 세력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는 우리가 '표'로 만든 정치적 세력, 다른 하나는 '돈'이 만들어 낸 경제의 세력.

 

 물론 봉기의 세력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소수로 행동했고, 대기업의 거대한 음모 앞에 진압되고 말았다. 반란자들은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끊임없이 대항하고 있지만, 삼성 제국은 언론, 방송 등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막지 못한 것은 우리의 영원한 유산, '책'이었다. 삼성 제국의 황제가 책을 읽는다면, 아마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읽었을 것이다. 아마 그는 이 정신적 반란을 보고 깜짝 놀라 진압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저항이 금세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면, 정신적 반항은 끊임없이 세력 중에 회자된다. 결국 2차 반항이 시작된다. 『굿바이 삼성』이다. 이 책을 통해 삼성 제국을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등장한다.

 

 책을 통한 혁명이다. 혁명의 깃발을 이끄는 사람들은 김상봉, 김용철, 김재홍, 김진호, 류동민, 성현석, 우석훈, 이계삼, 이득재, 이택광, 조국, 최성각, 하승우, 홍윤기, 황광우다. 성격도, 하는 일도 모두 제각기인 이 사람들은 '삼성'이라는 하나의 독재 세력에 저항하기 위하여 한데 뭉쳐, 각자만의 방식으로 삼성에 저항하는 방식을 알려주었다. 이들의 말하기는 매우 호소적이다. 제발 깨어나라고, 제발 혁명하자고 외친다. 하지만 나도 인정하기 싫은 사실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미 삼성이 만들어 낸 물질과 문화의 노예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삼성이 만든 갤럭시, 전자 제품에 빠져 살며 우리나라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죽은 정의의 사회'를 만들어버렸다. 이건희가 있는 한, 자유도 평등도 없다. 영원한 차별과 억압만 있을 뿐이다.

 

 사실 나는 두렵다. 이건희 황제는 가히 '빅 브라더'를 연상시키니까. 조지 오웰의 미래소설 『1984』에서 절대적인 존재,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바로 그 인물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미래소설은 현재가 되었고, 빅 브라더는 실존하는 강력한 세력이다. 이제 이 독재를 끊을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자유가 찾아올까? 마음놓고 삼성을 하나의 '기업'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 날까지, 혁명은 계속되어야 하리라. 삼성이 제국이 아니라 기업이 되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 기업은, 적어도 국민을 노예로 보지 않는다. 지금의 삼성은 너무나 변질되었다. 돈이 많다고 자신이 하나의 나라인 듯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세상이 '돈'으로만 된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할 때다. 세상은 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을 시작한다. 굿바이, 삼성. 이것으로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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