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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쟁이 유씨
박지은 지음 / 풀그림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그러고 보면 세상에 좋은 일, 베푸는 일이 따로있지 않은 것 같다. 모두가 생소하게 여기는 일이지만 염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많은 시신은 누가 거두겠는가? 그들의 손길에 새삼 찬사를 보낸다. " p.121
문득 수년전에 TV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염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장의업'을 자신의 천직이라고 믿는 사람, '소명의식'이 분명하고, 죽은이에 대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그 분, 스스로 자원해서 강 바닥을 뒤지며 수습되지 못한 이들을 찾아 헤메고, 지역에서도 신원미상의 사체가 발견되면 그 분을 젤 먼저 찾는다고 한다. 처음엔 '염을 하는 사람'에 대한 낯설음때문에 진짜로 '간 큰' 아저씨로만 느껴졌고, 무섭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존경심이 솟아났다.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그분의 두 아들이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며 가업을 잇겠다는 다짐을 밝혔을 때, 또 한번 놀랬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갑자기 그분의 근황이 궁금해 졌다.
<염쟁이 유씨> 이 책은 60평생을 염을 하면서 살아온 유씨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다. 대대로 염을 하는 집안에 태어나 그토록 하기 싫었던 염쟁이 노릇을 되물림 받은 이야기로 시작해서 유씨의 마지막 염 이야기로 끝을 맺으니 분명 유씨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유씨의 이야기는 책의 굵은 뼈대와도 같고, 그분이 염을 했던 사람들의 사연이 주를 이룬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생을 마감하는데 어찌 사연이 없을수가 있으랴.슬픈 죽음, 안타까운 죽음, 가슴아픈 죽음, 황당한 죽음, 어이없는 죽음등... 20여편의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유씨가 말해준 사연들 중 '솔로몬의 지혜'를 연상케하는 내용이 가장 기억이 남는다. 재산이 좀 있어보이는 젊은 남자의 염을 앞두고 두 명의 어머니가 나타나 서로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표면적으로는 장례절차를 두고 싸우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미혼인 죽은 남자의 재산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염쟁이 유씨가 그럴듯하게 꾸며대기를 폐병으로 죽은 사람이 출상할 때, 주변에 여자가 있으면 그 집안 사람들에게로 병이 옮는다고 말하자 무정한 생모는 바로 달아나 버리고, 공들여 키웠다는 계모가 남아 장례를 치른다는 내용이다. 남자의 생전에는 두 어머니가 존재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한 명의 어머니, 진짜 어머니만 남았다. 애초에 자식을 버린 것도 모자라 자식을 두 번 버린 생모에 대한 씁쓸함과 가슴으로 낳아 가슴에 자식을 묻은 계모에 대한 안타까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사연이다.
"며칠 전 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죽음에 대한 고민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유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죽음에 대한 고민은 삶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삶을 배제하고 단순히 죽음의 길을 쉽게 가려 했던 내 모습이 자꾸만 부끄럽게 느껴진다." p.116
책의 주인공이면서 기자인 '나'는 사랑으로 인해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었다. 말그대로 죽을만큼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유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삶과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데 삶과 죽음을 따로 떼어놓지 않고 같은 선상에 두어야 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여간 어떤 이유로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산다는 것이 때론 죽기보다 더 힘들다는 말을 한다. 죽을 각오를 하면 살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들 한다. 그 말이 참으로 옳다. 삶을 쉽게 포기하려들기 전에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려는 이들과, 그 순간에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투를 벌이는 이들을 한번쯤 떠올려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염쟁이로 평생 살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우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네. 아직도 잘 모르겠네만, 죽는다는 건, 생명이 끝나는 거지 인연이 끝나는 게 아닌 거 같거든. 그러니께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뭔가 남기는 죽음, 부끄럽지 않은 죽음, 그런 죽음은 그런 삶에서 비롯되는 거 아니겠는가 말여." p.203
결론을 말하자면 유씨의 이야기는 단지 '죽음'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단 하루만 더> <좀머씨 이야기>등에서처럼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내게 주어진 삶의 소중함과 지금 내 옆에 있는 가족과 친구의 소중함을 떠올려 본다. 유행가 가사처럼 있을 때 잘해야 하는데...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되새겨 본다. 내가 죽고 난 뒤에 뭔가 남기는 죽음, 부끄럽지 않은 죽음은 그렇게 살았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