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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이스마엘 베아 지음, 송은주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에잇~ 전쟁이나 터져서 이놈의 세상 확 뒤집어져 버려랏~!!" 지금 여섯살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입덧을 거의 하지 않은 대신 식욕만 왕성해서는... 그날도 저녁 한그릇 뚝딱 하고는 남편과 함께 동네 막창집에 앉았다. 지글지글~ 막창 굽히는 소리마저 향기롭기만한데 술이 거하게 취한듯한 아저씨가 목청높여 버럭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닌가. 전쟁이 났으면 이라니 그 순간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 앉는 것 같았다. ㅠ.ㅜ 예정일에 맞추어 의학분업 사태와 같은 끔찍한 일이 다시 또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했었어도 전쟁이 나면 이라고 생각해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전쟁... 이라고? 내 아가는, 나와 남편, 우리 가족은... 갑자기 울컥 부아가 치밀었다. 이미 막창맛은 달아나 버렸고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남모르게 째려보기만 했다.
대한민국은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가이면서 '휴전' 상태인 나라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남의 나라 일인양 가슴으로 와닿지는 않는다. 내 부모님은 어린시절 피난을 겪었고, 폐허가 된 나라를 일으켜 세우시는데 한평생을 보내셨지만 자식인 우리 세대는 전쟁에서 너무나도 멀어져 있다. 아마도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분단된 조국이었기에 머나 먼 미래에도 그냥 이런 상태가 지속될 것이란 막연한 확신(?) 때문에 그런가보다. 하지만 전쟁에 대해서 단 한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내가 딱 한번 그 심각성을 절실히 고민해본적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경우이다. 심리적으로 예민해지고, 이런저런 걱정이 많아지는 시기라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지켜야 할 소중한 존재로 인한 본능적 반응이었나 싶기도 하다.
<집으로 가는 길> 이 책은 전쟁을 직접 겪은 이스마엘 베아의 실제 이야기다. 랩 음악과 힙합 댄스를 좋아하던 평범한 소년이었던 이스마엘은 이웃마을에서 열리는 장기자랑에 참석하기위해 친구들과 함께 집을 나선 뒤에 뜻하지 않게 전쟁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 놓여지게 된다. 이로써 집으로의 힘겨운 여정이 시작되는데... 인간이 극한에 처하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어떤 초인적인 힘이 솟는 것일까. 12살 어린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처참한 상황들이 많은 부분에 걸쳐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한바탕 전투를 치른 후 돌아와서 람보 영화의 나머지 장면을 본다든지 마약을 먹어가면서 강행군을 하는 부분은 실로 충격적이다. 이스마엘이 들려주는 전쟁이야기는 더구나 이 모든 것이 논픽션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슴을 조여들게 만든다.
전쟁은 인간을 지독하게도 무자비하게 만든다. 반군이나 정부군모두 서로가 국민을 위한 군대라고 주장하지만 누가 더 나쁜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다. (이는 6.25때 미군,국군,북한군 모두가 민간인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는 사실과 같다) 마을에 침입해서 빼앗고, 부수고, 불태우고, 민간인을 학살하는등 만행을 저지르고 소년병을 앞세우는 것조차도 다를 것이 없다. 안타깝게도 어린 병사들은 어른들보다 더 깊이 전쟁에 몰입한다. 처음엔 살기 위해, 죽지 않기위해 총을 들었지만 어느순간 "사람을 죽이는 것이 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소년병들이 유니세프와 같은 구호기관의 재활훈련에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장으로 보내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에서 섬뜩하면서도 가슴이 찢어지는듯 아파왔다.
삶이 힘겹다고, 세상이 원망스럽다고 전쟁을 입에 담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전쟁이란 나 한사람을 위해 행해지는 이벤트같이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을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나와 내 가족은 빼놓고 눈에 가시같은 사람들만 제거해주는 맞춤형이 아니란 말이다. 전쟁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빼앗아 갈 것이다. 삶의 터전을 잿더미로 만들고, 가난과 기아만을 남겨 줄 것이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이스마엘이 말하는 전쟁... 이것이 진짜 전쟁의 참상이다.
책을 덮으며, 이스마엘의 나라 '시에라리온'을 검색하여 보았다. 서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의 낯선 나라. 가로줄 세 개로 이루어진 국기의 초록은 천연자원과 산, 하양은 통일, 파랑은 세계평화를 의미한다고 되어있다. '세계평화'라는 단어 참으로 낯설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자연과 가장 부조화스러운 존재이며 모순덩어리다. 그 중에서도 전쟁은 인간이 보여주는 모순의 극치다. 이념과 사상, 종교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전쟁을 일으키는 자마다 '평화'와 '미래','희망'을 부르짖는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덮어두고라도 30만 소년병들은... 이건 정말 아니다. 그들만큼은 어른들의 전쟁에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