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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평점 :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에 얼마만큼 만족하면서 살까? 어린시절 이름에 대한 불만이 컸던 나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 법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가장 먼저 이름부터 바꾸리라 다짐하면서 자랐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6세쯤 이었을 것이다. "엄마, 나는 왜 000 이야?" 라고 물으면 그저 "네 이름은 엄마가 지었는데..." 라고 웃기만 하시더니 그날은 우리 세 자매들의 작명과정과 의미등을 진지하게 설명해 주셨다. 큰 언니는 그나마 지역에서 유명하던 학자분이 지으셨다고 하고, 둘째 언니는 할아버지께서 지었고, 여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다음 번에 아들을 낳으시려는 욕심으로 작은 언니의 이름을 거꾸로 한데서 생겨났단다. ^ ^;;
출생 신고 하던날 "내가 맨날 부르던 그 이름으로 호적에 올리세요."라고 당부하던 엄마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머릿속에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하지만 엄마의 의도와는 달리(엄마는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이름의 끝자만 따서 부르곤 했다) 이름이 바뀌어 버렸고, 거기다 동사무소 아저씨의 실수까지 더해져서 이건 완전... 하여간 아버지가 가지고 오신 서류를 보고 엄마도 많이 놀랐단다. 내 이름이 이렇게 생겨났구나. 정말 눈물이 왈칵 쏟아질만큼 슬펐다. 비밀로 할 수도 없는 문제지만 차라리 몰랐으면 좋을 뻔 했다. ㅠ.ㅜ
이 책은 <눈 먼 자들의 도시>의 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대반 흥분반 꼭 읽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책이다. 영화에 있어서도 작품성과 흥행성을 모두를 얻는 다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책이 대중에게 쉽게 읽히고,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를... ) 그런 의미에서 그의 전작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작품이었다. 기발하다 못해 충격적인 설정, 다소 난해한 주제를 흡입력 있는 문체로 써낼 줄 아는, 사라마구는 그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진 작가이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에서 주제씨는 책의 주인공이자 유일하게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이다. 우습게도 작가의 이름과 같다. 정말 웃기는 주제씨다. 하여간 등기소의 보조사무원인 주제씨는 민원인들의 서류를 통해 생과 사를 정리하는 일을 한다. 52세 독신남인 그는 삶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혹은 직업상 가지는 특권(?)을 그저 흘려버리기 아까워서인지 '무의식적 습성'에 따라 유명인들의 '사적인 기록'을 수집하다가 우연히 딸려온 한 여인의 서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 끌리는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체 그녀의 행적을 쫓는데만 생각을 집중한다.
권위적인 사무실에서 지금껏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고 존재감조차 없었던 주제씨는 '알지 못하는 여자'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면서부터 개인적으로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결근이나 지각, 조퇴 한번 없던 그의 인사 기록에 흠집이 생기고 공문서 위조에 불법 침입까지 갈수록 가관이다. 무모해 보이기도 하고,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도대체 왜 저런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어느 순간 안스럽기도 하다. 무언가를 위해 저렇게 올인할 수 있다는 것. 그 점 만은 존경스럽다.
많은 책을 통해 '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고, 어떻게 죽느냐가 어떻게 사느냐의 대답과 같다고 배웠다. 하지만, 이 책은 서류상으로 남겨져 등기소 서랍에 보관된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자칫 '허무주의'로 느껴질 수도 있다. 주제씨의 행위는 단순히 그렇게 서류상으로 존재하던 '아무것도 아닌 여자'에게 존재감을 부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가가 의도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이 책을 '소화'시키고자 한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소장의 말처럼 '그 누구'에 대해 우리 각자가 의미를 부여하는 대로 '산 자'가 '죽은 자'도 될 수 있고, '죽은 자'가 '산 자'도 될 수 있다고 말이다.
얼마전 외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 외가의 족보를 재정리하는데 우리 세자매와 남편들의 생년월일과 결혼일자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더니 그 말이 맞구나 싶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았든지 비록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은 못되어도 적어도 대한민국 등기소와 친가, 외가, 남편의 가문에 이름 석자는 남기게 생겼다. 내 이름에 대한 섭섭함은 말로 표현 못할 정도지만 어린 시절 다짐했던 것처럼 이름을 바꾸지는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나' 일뿐. 나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가듯이 내 이름의 가치 또한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