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이름들이 아니어서 누구누구라조 정확한 인칭으로는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어쨌든 이 영화는 독일 의식을 구성하는 사고, '독재'를 다룬다. 편의상 선생이라고 부를 인물은 독재라는 주제의 수업을 원치 않게 맡게 된다. 독재란 무엇인가? 독재란 어떻게 가능한가? 독재란 사고는 어떠한 것인가? 등등이 수업에서 다루어지고, 열기를 보이며 참여하는 학생들의 태도에 선생 역시 고조되며 수업을 이끌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수업과 일상은 흐릿해져 가고, 과제의 이름이었던 '디 벨레'는 하나의 서클처럼 사회와의 담을 허물고 통합된 차원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중간에 묻는다. 지금 정말 독일에서 다시금 독재가 불가능한가? 흥미롭게도 영화는 독재에 대한 이중적인 노출을 보여준다. 하나는 당연히 고도로 조직화된 집단을 보여준다. 그런데 또 하나 출현하는 독재는 흥미롭게도 독재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독재이다. 영화 중반을 넘어서면 선생은 그저 죽은, 바로 그 죽었다는 것 자체로 영원한 상징인 디 벨레로 존재한다. 학생들 스스로 디 벨레를 조직하며 확장하는 autokratie, 즉 자기의식화를 거치기 때문이다. 그런 선생이 모두를 강당에 모아 연단에 올라서 스스로를 죽음으로 폐위하면서 선생은 독재를 해제하는 독재를 자임한다. 이 과정에서 외면받고 소외된 한 층위가 노출된다. 어떻게도 어떤 말을 구상할 수 없는, 그래서 스스로의 머리를 날려버릴 수밖에 없는, 우리가 이름 짓지 못한 그런 층을. 어떻게 보면 독재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야말로 가장 편협한 시각, 흔히 말하는 '정비되고 교육화'된 질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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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을 같이 쓰는 친구가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아직 어린 동생이었다. 주변에 같이 생활하는 동생 역시도 하나 같이 어떤 의미에서 늙어빠져서 군대 이야기라면 누구나 한 숟가락 얹을 수 있을 만큼 군대라는 사항은 아주 보편적인 경력 사항(?)으로 갖추어진 집단이었다. 어쨌든 발단이야 기억나지 않지만 '용서받지 못한자'라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내게 발끈... 생각해보니 발끈까지는 아니고 '그거 완전 동성애 영화잖아요'라고 말했었다. 나는 아니 어떻게 보면 영화가 그렇게 보일 수 있느냐, 그건 아니다, 유태정과 이승영, 허지훈을 읽으면 그런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씨름 아닌 씨름을 하다가 결국에는 제3자인 룸메이트 동생을 끌어들여 '판단'을 부탁했다. 한참 영화가 흘러(뒤의 내용이 스포일러임을 의미한다) 승영이 태정을 찾아와 말그대로 '빨간방'에 뒤에서 껴앉는, 써놓고보니 동생의 말이 참 타당한 구석이 있음을 제삼 확인하는 흥미로운 일이, 내게 있었다. (이 홍동방을 보던 제3의 동생은 괴로운 신음을 나직이 뱉었다.) 나는 긍/부정으로 동성애를 그리지 않는다, 그렇게 이전까지는 여겼다고 믿었는데, 막상 내 사고의 근저에는 '군대 밖에서도 여전히 구닌스러움'이 일상화되어 그대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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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외적으로. 어째선지 군대 있을 당시에 김영하 소설에 꽂혀 여타 중대를 오가며 김영하 컬렉션을 수집한 기억이 있다. 어차피 대대 단위라 몇개 없는 중대이긴 하지만 가면 으레 김영하 책이 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게 다가온다. 무튼 이 엉뚱한 수집욕의 불을 지폈던 첫만남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이었다. 지금도 가끔이면 이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을 펼치곤 하는데, 하루키가 언급하는 개츠비처럼이 아니라, 소설 끝에 자리한 작가의 후일담에 관심이 있어서 이다. 사라진 파괴의 미덕에 대해서라기보다는(당초에 내게 그런 건 있지도 않았으니까) '변한 지금'이란 접점은 어쩐지 그의 책을 계속해서 회상케 한다. 지난 미련인가? 모를 일이다. 아, 그래서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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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이야기는 몰락을 걷는다. 테베의 왕인 오이디푸스는 역병이 도는 도시를 구하기 위해 신탁 또는 전언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 라이오스 왕을 죽인 범인을 찾으라는 신탁으로부터 출발한 운명애적 이야기는 수많은 만류와 선택지 속에서도 바뀌지 않는 가장 순수한 결정, 숙명애로 탈바꿈한다. 두 눈, 아내이자 어머니, 자식, 국가를 잃는 파국들 사이에서 오이디푸스는 괴로워하고 또 괴로워하면서 모든 걸 미루지 않는다.이점은 안티고네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조금의 차이를 언급하자면 오이디푸스가 서 있던 징조라는 발화점과 달리 안티고네는 (신화라는 서사 속에서 언급되곤 있지만) 하이몬의 언급(362)처럼 좀 더 행위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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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플린은 이 영화에서 두 가지 역할을 소화한다. 하나는 독재자 힐켄이고, 하나는 힐켄에 의해서 핍박받는 유대 민족인 이발사 찰리다. 찰리는 전쟁터에 복무하게 되어 슐츠라는 고위 장교를 구하게 된다. 그리곤 함께 비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조종을 맡은 슐츠가 기절하는 탓에 비행기는 뒤집힌 채로 (멀쩡하게) 날게 된다. 상상할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일그러지며 나타나는 얼빠진 장면의 희극성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화를 불같이 내는 힐켄이 바나나를 차근차근 까고선 먹지 않고 아주 집어던져 버리는 장면들처럼 말이다. 바로 그런 상상 그리기를 원천적으로 금기하는 그 불가능성, 차단, 가림의 기재들을 비틀고 뒤틀어 엉뚱한 외연들로 하여금 상처나고 찢어져 벌어진 공간의 내부를 출현시키고 보이게 한다. '힐켄의 이름으로' 연단에 올라선 찰리는 연설을 한다. 힐켄의 이름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힐켄의 이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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