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의 ATOM, 절대영도도 곁들여 보면 흥미롭다. 이 논점이 무언지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이 있어 함께 싣는다. 《과학동아》(340)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빛의 파동성을 이용하는 거다. 벽에 작은 구멍을 하나 뚫고 빛을 통과시켜보자. 구멍의 크기가 작아지면 구멍을 지나 스크린에 도달한 빛의 크기도 작아진다. 그런데 구멍이 아주 작아지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스크린에 도달한 빛이 오히려 커지는 거다. (...) 이것을 빛의 회절이라 부른다.

 빛은 광자라는 입자이기도 하다. 구멍이 작아진다는 것은 광자가 지나가는 위치를 점점 정확하게 알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구멍이 작아질수록 회절에 의해 광자는 더 퍼지므로 광자의 운동량 오차는 점점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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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센스라는 말이 역설적으로 '비정상적'이게 구현되는 때가 있다. 그것은 이것이 넌센스라고 지시되면서 동시에 물어지는 질문인데, 가령 역사적인 -위대한- 유물을 만든 사람이 누구? 라는 것이다. 여기에 넌센스적인 답은 상식에 기대어 답해지고, 그것은 '인부'라는, 전혀 감흥조차도 되질 않는 뻔한 답으로 결론지어진다.

 

 그러면 이 인부라는 상식성은 어떻게 '넌센스'로 물어지는 것인가? 무거움과 가벼움. 무엇이 긍정적이고 부정적인가? 그들은 역사적인가? 가벼운가? 무거운가? 그의 『농담』 역시 역사를 거부하는 태도로부터 역사에 '휘말려 버리는' 비역사적인 역사적 운명(?)이라는 서사? 일화?를 보여준 바 있다. (그러니까 그 농담을 농담으로 치부하지 않고 차라리 적극적으로 수용했더라면 『농담』이 아니었단 말이다.) 이런 제스쳐는 『참을 수 없는...』 역시 반복된다. 아니, 일관된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es muss sein. 이 엄숙하고 경건해지는 압도되는 문자그대로의 명령. 모든 역사의 일관성 속에 있는 핵. 그러나 그 부동의 엄숙함에 자리한 희극을 비춘다. (그러니까 베토벤은 꿔간 돈에서 비극적인 서정을 찾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땅한 표현을 찾던 내게 '수다맨' 님의 "냉소주의와 허무주의"라는 표현은 딱 적격이란 마음이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럼에도" 그 냉소와 허무의 공간(어김없이 역사적으로 찬란할 순간 모두가 '꾸르륵거림'으로 엇갈린 채 시작되는 두 작품 모두의 그러함들) 속에서도 찾아지는 존재의 '속닥임'들 때문에 미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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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미트. 그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듯한 시리즈이지만, 그 시리즈의 제목이 '문제적 인간'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깊은 친화성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해제를 앞당겨 빌려와) 그의 나치 가담 사실, 그러니까 "해적선에 있는 몇몇은 해적들에 의해 강제적으로 혹은 생존하기 위해 그들에게 어쩔 수 없이 협력할 수밖에 없는 희생자라는 것", 따라서 "나치의 범죄행위와 구별"되는 것, (그의) "메모에서 왜 히틀러 같은 '교양 없는' 개인이 이른바 독일 같은 문명국가의 '총통'이 되었는가를 자문하면서, 히틀러를 독일 역사의 '집행자'로, (...) '히틀러의 권력은 전적인 합법성과 심지어 민주적 정당성을 지녔다'"는 묘한 긴장감을 암시하기 때문이다.(p.198)


 이 알싸한 긴장감은 물론 해명된다. 충돌되는 모순도 없다. 슈미트적으로 말해서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서 인간은 추상적인 인간으로서 마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해관계를 지니는 정치적으로 결정된 인간, 달리 말해 시민으로, 통치자 혹은 피통치자로, 정치적 동맹자 혹은 반대자로서, 그러므로 어느 경우든 정치적 범주 속에서 대립하고 있다."(p.28) "그는, 제3자란 늘 해적선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해적으로 취급한다고, (...) 36년 이후 자신이 나치 친위대에 의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강조(또는 불평)했다."(p.199) 조건은 결정을, 결정은 조건을 만든다.


 이런 슈미트의 동선은 충분히 혼란을 준다. 뒷장에 부연되는 그의 사후 발언은 더 가관이다. "동화된 유대인이 진정한 적이다", "'유대계 러시아인들과 인도주의자들의 우정보다 히틀러의 적대감'이 더 낫다고" 그의 사후 비밀 메모는 전한다(p.200). '끓어오르는(신학적) 적대(정치)'라는 조소 섞인 배치 전략으로 차라리 등가할 수 있을까? 대체 (의회적) 현재를 "최악의 무정형한 상태", "더욱더 부당한 결과"(p.28)를 이야기해도 될 만큼의 자격성을 갖추기나 한 걸까? 그러니까 그의 논의를 참조로 끌어다 '펼침'을 시도하려는 일련의 좌파적 지연들(사실 이 상황은 진즉에 끝났어야 했는데? 라고 현재를 참조하는 많은 끌개)에게서 답해지기 어려운 추궁과 스캔들을 낳는다.


 전적으로 그러나! 옳다고 해서 그를 맹적으로 따를 이유는 없으며, 그가 틀렸다고 해서 그의 관찰을 단순히 폐기할 이유는 없다. "대도시에 작용하는 힘들은 전체 역사적 삶의 뿌리와 정점에 자리 잡고 있고 우리는 하나의 세포 같은 덧없는 존재로서 그러한 삶에 속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과제는 불평하거나 용서하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이해하는 데에 있다"는 짐멜의 말은 그렇게 이해된다.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

 

 그의 논의가 가진 악랄함(?)은 그 겨냥이 오늘날 민주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일환인 현대 의회주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현대 의회주의가 민주주의의 적자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대립"(38)으로 상정, 민주적인 것의 가장 비민주적임을 말하고는 극적인 반전을 꾀한다. 



 사람들이 현대 의회주의라고 부르는 것 없이도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있고, 민주주의 없이도 의회주의는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민주주의가 독재의 결정적인 대립물이 아닌 것처럼 독재는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대립물이 아니다.(67)



 현행하는 일련의 민주적인 파노라마들이 "활활 타오르는 불의 환상"(18), 바로 그 "환상이라는 (말에) 쉽게 적용될 수 있을 것"(15)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상황이 한층 더 엉망이고 이와 같은 희망조차 거의 파괴하는 현상, 여러 국가들에서 모든 공적인 업무가 정당과 그 추종자의 강탈과 타협의 대상으로 변질되고, 정치는 엘리트가 하는 일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거리가 멀고 상당히 비천한 계층의 사람들이 하는 꽤 천한 일이 되었다는 상황을 의회주의가 이미 초래했던 것이다."(15) 그는 일련의 몸짓들이란 확정적인 진리가 아니라 단순히 가설일 뿐인, "그러므로 이 가설을 입증하지 못할 때는 즉시 포기하는 것이 이성적인 태도"(15)로 단정한다. 


 민주적이라는 조건 속에 작동하는 의회, 그 자체가 지닌 간극을 지시한다. 민주주의에서 토론이라는 안정적이고 "공통된 신념"(17)은 "[상대방에 의해] 기꺼이 설득될 의향, 당파적 구속으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이기적인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태도"를 종용한다. "예를 들면 모든 의원은 어떤 정당의 대표자가 아니라 전 국민의 대표자이며 어떤 지시에도 속박되지 않는다."(17) 우리는 여기서 한편의 모나지 않으면서도 매끄럽게 이어지는 갈증적인 모순을 느끼게 된다. 그가 의원인 까닭은 어디까지나 신임이지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 국민의 대표자로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지는 않기에 그렇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회사적 지위이지, 민주적인 태도는 아니다. 의회는 여론을 동정한다. 근거하는 기반과 작동의 괴리는 몇몇 표명을 통한 유대감으로 적당히 물러진다. "현대의 대중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논의적인 공적(공개적) 토론을 공허한 형식으로 만들어"(18) 버린 것이다. 격정적인 논쟁과 첨예한 대립의 중심에서도 빗겨가지 않고 늘 사려되는 건, 시간적인 안배와 당파적인 전략들(그것이 제휴건 대립이건)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늘 획득 가능한 자원이며, 이런 '전략성'들은 특히나 의회사적 상황에서 발전한다. 슈미트가 프리먼의 저서 『여론』을 언급하며 "대단히 현명하지만 지나치게 심리학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전형적인 미국적 서저"(19)라는 평가를 그 자신에게 재신임하기 위해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지나치게 심리학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전형성이야말로 대단히 현명한 것이다. (물론 앞서 슈미트가 말한 이성의 가치와는 위배된, '계약'이라는 차원의 위상을 뜻하지만.) 그렇기에 의회사적 상황은 다음과 같은 정신 상태로 규정되어 진다.



 오늘날 더는 의견의 옳음이나 진리에 대해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수와 함께 지배하기 위해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참으로 잘 알려져 있는 것이라고 전제해도 된다.(20)



 "'토론에 의한 정치'인 의회주의에 대한 믿음은 자유주의 사상 계열에" 속하며 "그 믿음은 민주주의 사상 계열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따라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양자는 현대 민중민주주의를 형성하고 있는 이질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구성물로 인식되기 위하여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까지 말한다.(23) 의심과 술렁이는 동요 속에서도 "토론과 공개성에 대한 믿음과 결합되는 한에서" 이념적인 믿음으로 존속할 뿐이라고 지적한다.(21) 또한 획득되는 '산술적인 평등'은, 그 준함은 이율배반적인 제외분을 낳고 그 완결성은 정치적 기만이라고 이야기한다. 탈락, 배제, 예외는 그 정치적 시도의 불능성과 자체의 불구성으로, 그것을 보충하는 편입성 또한 한편으로는 정치적 손익과 계산의 맞물림에 들어맞는다는 점, 즉



 "(...) 사적인 것과 무책임한 영역을 벗어나지 않은 채로 '보호 장치들' 아래에서 '감시받지 않고' 표를 행사하고 나서 모든 개별 투표가 기록되어 산술적 다수가 계산되는 방법으로만 인민은 자신의 의지를 표명할 수 있다는 생각", (pp.36-37)



 바로 이 차원이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이자 의회사적 정신상황인 것이다. 투표는 현장이다. 정치가 불러일으키는 모든 민감성을 일순에 해소한다. 그러니까 사회 초년생으로 가장 빠르게 습득하는 삶의 정직한 교훈(?), 생활 속에서 정치적 사안은 꺼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 피곤함은 머지 않아 양도되며, 투표의 비밀은 우리가 현장을 떠나 는 순간 모종의 안도감과 긴장감을 모두 불식하며 조화로운 세상을 가능하게 한다. '비청치적임'이야말로 정치적인 현안됨. 따라서 슈미트는 "1억의 사적인 개인들이 일치된 의견을 가진다 해도, 그것은 인민의 의지도 아니며 여론도 아니다. 인민의 의지는 갈채, 즉 자명하고 부인되지 않은 현존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37) 바로 이 가정된 현현이 존재하기에 "현대 의회민주주의의 위기는 조금도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 볼셰비즘과 파시즘이라는 두 적재자의 출현 결과로서 (위기가) 성립된 것이 아니라, 이 양자가 출현하기 전에 존재했고 양자의 이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38) 

 

 이것의 문제됨은 무엇인가? 그는 루소에게서 나타나는 상보적이지 않은 두 개념, '계약'과 '보편 의지'를 문제 삼는다. "모든 의지들 상호 간의 만장일치와 합의가 현실적으로 그 정도로 크다면 무엇 때문에 여전히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계약이 체결되거나 구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 만장일치는 일반의지와 마찬가지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둘 중 하나다. 그러나 계약은 다양성과 대립을 전제로 한다. (...) 일치가 존재하는 곳에서 계약은 아무 소용이 없다."(33) 그리고 여기에 부연한다. "군주적 절대주의에 대항하여 1세기 동안 역사적으로 제휴해서 공동으로 투쟁해왔다는 사실이 이 대립에 대한 인식을 방해한다."(38)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적인 군주제의 원리가 사라졌을 때, 민주주의 자체도 내용상의 정확성을 상실했고 모든 논쟁적인 개념의 운명을 공유하게 되었다."(54)


 따라서 모티브 없는 모티브의 운명. "국가는 사회학적으로 보면 하나의 커다란 경영에 지나지 않고, 오늘날에는 경제적인 관리 장치와 공장 그리고 국가는 이미 본질적으로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점"(55), 유지와 보수의 영원한 항구성, "시민적 군주들이 나타나서 그들이 자신의 신성함과 명예 대신에 자신의 유용함과 실용성을 입증"(22)하려는 시도들, "여러 세기에 걸쳐 반복된 가장 오래된 의회의 정당화는 외면적인 '편의성'"(72), "진리와 대조적으로 그것은 명백한 결과를 포기하"고 "법률을 공포하는 관청이 스스로 그 법률을 시행한다면 그것은 위험"하므로(이 위험은 "인간의 권력욕에 대한 너무나 커다란 유혹" 때문인데) "행정부의 수장으로서의 군주나 입법기관으로서의 의회도 모든 국가권력을 한 몸에 독점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로크의 전언(86-87)은 "영원한 대화"(77)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인공적인 기구, 갈채[지지와 민주주의적 실질적 힘의 직접적 표현], 둘의 극복할 수 없는 대립(38). 현실인즉 의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원리로 자임하(또한 되)며 과거-현재-미래를 향한 모든 (그것은 가능성에 의해 동시적으로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열망을 모두 포섭한다.





 이 책은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이기에 관찰 대답성으로 구성돼 있다. 따라서 응답성은 읽는 각자의 확신만큼이나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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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님과 대화를 나누다 어쩐지 대화가 '시절'적으로 퇴행되는 주제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우리 둘 모두에게 속하는 어렸던 유년들 말이다. 나는 씁쓸하게, 또는 한편으로 행복감에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와의 우정에 대해, 사랑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씨름하기도 했던,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바보 같은 주제들로 겪어야 했던 순간들에 대해.. 이렇게 나열된 단편들은 추억이라는 유아적 퇴행 속에 젖어드는 순진한 낭만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후퇴할 수 없는 일부분이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근사한 계획도, 두둑한 여비도 없었지만, 떠날 수 있었고, 떠나야 했던, 이 영화가 말하는대로 "우린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고, 그것은 굉장한" 나날이었다. 물론 유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흩어졌고, 예전엔 듬성듬성 들려오던 이야기도 이제는 적당히 서로들이 바쁜 이해관계에서, 그리고 서로가 다르게 살아간 시간들에 의해 적당히 수긍할 수 있게 되면서 그 시절은 그렇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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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리다의? 사실 이런 ? 자체가 굴종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만, 어찌 되었건 데리다라는 명명 속에서 그를 호명하는 작업에는 필연적으로 붙을 수밖에 없는 구구한 이야기들 -어떤 사상가의 사상이 국내에 소개되고 수입된 지가 어언 몇 년이 지났는데..- 을 경유하지 않기 힘든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만큼 '그의'라고 밖에 지칭되는 2차 텍스트조차 온통 ??로 점철된다.


 특히 그 특징은 해체라는 작업이다. 논의를 미리 빌려와 "말(언어)은 … 잠못 이루게 할만큼 '제어할 수 없는 깊은 혼란과 고뇌'를 가져다 주는 지옥"(126), "인간의 원초적 심리를 공간화 시간화하고 쾌를 절제하는 것이 쾌라고 말한 프로이트"의 유물들(과 유실물들)(122)이 자리한 "이 세상에 있는 도서실, 우체국, 경찰서 모두를 불태우고 싶다고 고백한다."(126) 저자는 단정한다. "니체는 스스로를 일러 다이너마이트라고 했는데, 데리다는 폭탄이다.(126) 불길이 아닌 심층부로부터 허물어지는 것, 그것을 그의 작업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을 대상에 기입하고, 그 상태로 허물어져 버린다. 


 사실 그런 연유에서 이 책은 눈에 들지 않는다. 짧게 서론격을 요약하자면, 정신-분석이 3항이라는 무대를 상연하고, 그곳은 "나의 무의식의 표상이나 표출이 아니라, 공유하고 축적된 문화의 틀로 되돌아가는 것, ... 나의 꿈이 아닌, 한 특정한 종족이 보유하고 있는 '고대 문화의 형식'으로 되돌아가는 것, ... 우리의 의도와는 별도로 또 다시 나르시시즈믕로 비밀스럽게 되돌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묻는다.(56-57) 즉 "마치 유리창 너머 저쪽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손짓 몸짓은 볼 수 있지만 이야기 내용을 들을 수 없는 것과 비유한다(된다). 이때 정신분석가는 꿈을 꾼 사람을 제외시키고, 기존의 상징이 말하고 있는 의미에 따라 꿈에 나타난 사물, 혹은 꿈상징을 해석하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한다는 것이다."(55-56) 내 안의 나조차 몰랐던 것들이 수면 위로 망라되면서 정리되는 총화의 서사성들 속에서 ""분열된 자아가 다시 이 아자를 복사하는 분열된 자아로의 이행, 아니 이미 타자들의 타자의 욕망을 내재화시키는 타자화된 욕망, 그래서 그 누구의 욕망도 아닌, 문화체계라는 대타자로의 이행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94) "따라서 정신분석 상담실 카우치에 누워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예술품이라는 사실을 아브라암은 여러 번 강조한다."(96) 그렇기에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데리다가 "서구담화 속에 정신이라는 이름 하에 은폐되어진 폭려과 잔인성에 대한 고발", 즉 "프로이트와 라캉은 어쩔 수 없이 이 폭력적 상황을 수용하라고 권려하고 있지는 않는지." 묻는다.(119)



 "한마디로 말하면 데리다는 이성이 상상적 세계를 삼키려드는 것에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데리다는 이성의 대체계를 정립시킨 헤겔의 변증법을 두고 '모든 것을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개념 기계'라 부르는 것이다."(63)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역설적이게도 -또한 정당하게도- 하이퍼 기능할 패러디 소스, 정신분석학을 요구한다. "단순한 자들, 경험주의자들, 도무지 무엇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 즉 효율성만이 실제인 줄 아는 통화발화이론자들, 그리고 이들과 견고한 동맹관계에 있는 심리학자들, 다시 설명하면, 말 뒤에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 몽매한 자들"(72)의 유령을 그 자신으로써 소환한다. 이것은 필히 되기를 통한 되지 않기의 되기, 파생성을 예고하는데, 따라서  그 자신을 흩뿌려 분산하고 분광함으로써 그것을 적극 거부한다.



 사실 서론격에 전부 그치는 이 논의와 기획이 그의 사고인지는 나로서는 자신이 없는 부분이지만, 우선 (누구보다 격노할) 이런 방편으로 읽다 놓았다. 철학의 위안? 러셀식으로 농담을 하자면, 그가 (해체로) 다루는 정신분석학이나 그가 오르는 극적 무대나 모두 읽기에는 가공할 난해함을 자랑하며, (따라서) 다행히도 이 둘을 읽지 않거나 모른다고 해서 생활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는 서적이 단 한 권도 없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는 흥미로운 출사는 이 책에 대한 관심에 참고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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